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00화 (100/129)

100화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피부가 끈적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벽에 달린 호랑이 머리였다.

“여긴…… 어디지.”

눈 떠보니 처음 와 보는 방에 갇혀 있었다. 창문도 없는 벽과 일반 나무 문이 아닌 철제문은 번호 키가 안쪽에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기는 어렵다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핸드폰은 압수당한 거 같은데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무전기는 건들지 않았다는 거다.

“그나저나 무슨 방이 이렇게 넓어.”

호은은 뒤늦게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을 확인했다. 흰색 벽면에 어울리지 않는 호랑이 장식품이 누가 봐도 타이거 아지트라는 것을 알게 해 줬다.

그것 외로는 더블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안 그래도 넓은 공간이 더 커 보였다.

“아. 인형은 안 가져갔네.”

압수의 기준이 뭔지 한여울의 인형이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방 안쪽에는 화장실이 있었는데 웬만한 필수용품은 다 있었다. 구경할 거리도 없는 방을 전부 둘러본 호은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자 마지막으로 봤던 그림자 뭉텅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납치당한 거 같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한 호은은 무전기를 숨길 곳부터 찾았다. 타이거에게 발각되면 무전기가 처참히 부서질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방안을 뒤지다 결국 침대 밑에 넣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고, 이곳 말고는 숨길 곳이 없기도 했다.

납치당한 건 처음이었으나 평범한 방에 떨어진 덕분인지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호은은 침대에 앉아 천천히 상황을 정리했다.

“썬은 타이거와 연관된 거겠지.”

썬과 마주친 장소마다 타이거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팬이라고 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었나? 핸드폰 배경 사진을 떠올리면 보면 팬 같다가도, 인질 운운했던 모습에 악의가 없다고 단정을 지을 순 없었다.

“현장은 마무리됐나? 배연우 대리님은…….”

선악율의 그림자에 먹히고 타이거의 아지트로 보이는 공간에 납치됐다.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에서 배연우는 상처를 입었고 남운수는 구속구의 열쇠를 던졌다. 그로부터 얼마큼의 시간을 기절한 건지, 납치당한 이후의 시간 개념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도인호…….”

귓가에 도인호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고통에 찬 얼굴은 처음 본다. 새파랗게 질려서 애처롭게 뻗은 손을 마주 잡지 못했다. 심장 한쪽이 쓰라렸다.

시트 자락을 사정없이 구긴 호은은 벌떡 몸을 일으켜 철제문을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두드렸다.

“문 열어!!! 사람 잡아다가 뭐 하자는 건데!!!”

십여 분을 두드렸을까. 목은 쉬었고 까진 피부는 쓰라렸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삑

열받아 발로 철제문을 차려고 한 호은은 문밖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에 문에서 두 발짝 멀어졌다.

“잘 잤어?”

“…….”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싱긋 웃고 있는 썬이었다.

자신을 속인 썬에 호은은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 한쪽을 뒤틀렸다.

“썬 씨. 타이거였어요?”

“으음. 썬 아니고.”

“?”

“한여름이야.”

한여름이라고 말한 남자에 호은의 눈썹이 물결쳤다.

‘한여름?’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았다. 한여름이란 이름의 흐릿한 잔상은 형체만 남길뿐 세세한 외모가 기억나지는 않았다.

“역시. 나 같은 건 기억 못 하나 보네. 그러면 이건 어때? 빵돌이.”

호은의 동공이 커졌다. 빵돌이는 자신의 너튜브를 구독하고 있는 팬의 닉네임이었다.

첫 번째 영상부터 꾸준히 댓글 달아 주던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하. 이건 아나 보네. 역시 댓글 달길 잘했어.”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잘 생각해 봐. 빵돌이, 한여름.”

“한여름…….”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보자 작고 왜소했던 남자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썬이 말한 한여름이…….

유난히 작고 약해 보여 중학교 시절 괴롭힘당하던 한여름이란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여름과 썬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하지만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이제 알겠어? 우리가 구면이라는 거.”

한여름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를 보이며 활짝 웃더니 호은에게 와락 안겼다. 한여름이 닿자마자 가이딩이 빠져나가는 것에 몸을 움찔거렸다.

“에스퍼? 하지만…….”

여태까지 접촉했을 때를 떠올리자 가이딩이 빠져나가던 느낌은 없었다. 호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한여름은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더욱 몸을 밀착했다.

“가이딩을 차단하는 이능력품을 사용했어. 한 번에 들키면 재미없잖아?”

“그렇다는 말은 처음부터…….”

“맞아. 처음부터 널 노렸던 거지.”

호은의 귓가에 속삭인 한여름은 장난이라도 치듯 귓불을 깨물었다. 고통에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자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스. 그런 건 문 닫고 하지 그래?”

반설아의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가 내뱉은 보스라는 호칭에 호은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반정부 보스?!”

한여름을 밀어낸 호은은 거칠게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네가 정말 반정부 보스야?!”

무표정으로 변한 한여름은 호은의 손을 잡더니 눈 깜빡할 타이밍에 호은을 침대 쪽으로 눕혔다.

“?!!”

한여름 밑에 깔린 호은이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이자 오히려 한여름은 호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끼워 그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래. 빵셔틀 하던 찌질이가 반정부 보스가 됐네?”

“어째서…….”

“너랑 같아. 나도 정의의 편에 서 있는 거뿐이야. 악의 무리는 네가 몸 담그고 있는 이능력자 협회니까.”

호은의 손목은 어느새 붉게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손목의 고통보다 빠르게 빠져나가는 가이딩의 고통이 더 컸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우리가 커서 에스퍼와 가이드로 만나다니.”

“…….”

“그리고 우리가 만든 가이딩 약의 샘플이 너라니.”

“뭐?”

“63스퀘어 가이드의 정체가 너란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한여름은 호은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손길이 마른 배를 훑고 지나가자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읏! 비켜!!”

“네 혈액으로 만든 가이딩 약도 기분 좋았는데……. 역시 직접 가이딩은 차원이 다르네.”

나른한 한숨을 뱉은 한여름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무언가를 억누르며 혀를 내밀었다.

“진짜 구원받는 느낌이야.”

부드러운 호은의 피부가 기분 좋은지 한여름은 손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그날 데려오는 건데.”

호은이 밑에서 아무리 밀어내고 버둥거려도 한여름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그저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협회에서 주는 일반 가이딩 약은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거든. 그래서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했던 건데.”

목덜미에 코를 박은 한여름은 체취를 맡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닿자 호은의 목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목에 주사기가 박히고 피가 빠져나갔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긴가민가한 상태로 샘플만 가져간 상태라서 등급이 높더라도 이렇게까지 우리랑 잘 맞을 줄 몰랐거든.”

“…….”

“호은이 넌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찾던 가이드였던 거지. 널 데려오기 위해 찾는데 63스퀘어 가이드 명단에 S등급은 없었어.”

호은의 위에 앉아 있는 한여름은 위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정부에서 숨겼나 싶어서 반 포기한 상태였지. 그러다 너튜브에 가이드가 된 널 발견했고, 옛 추억에 빠져 데려오려고 했어. D등급이어도 권호은은 내게 특별하니까.”

“…….”

“하하. 그런데 샘플의 주인이 권호은이라네? 그 사실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아, 역시 넌 날 도와주기 위해 존재하는 나만의 히어로구나.”

시선을 아래로 내린 한여름은 얼굴을 붉혔다.

“이제 알겠어? 우리가 운명이라는 거! 과거에도 날 구원해 줬던 네가 현재에 와서도 날 구원해 준 거야!!”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내가 널 구원해? 무슨 개소리냐고!!”

“못 본 사이에 입이 거칠어졌네.”

한여름은 손을 들더니 호은의 두툼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말랑하다. 네가 너튜버로 영상 찍고 다니길래 꽤 열심히 봤거든. 근데 얼굴은 나오지도 않고 맨날 입술만 나와서는.”

호은은 불안한 듯 한여름을 쳐다봤다.

까만 눈동자가 점점 붉게 물들더니 검은색 머리카락 또한 어두운 남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호은이 했던 것처럼 한여름 또한 잠입할 때는 외형을 바꿔 주는 이능력품을 먹은 모양이다.

홀린 듯 한여름이 변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호은은 가까워지는 얼굴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아랫입술을 여러 번 깨문 한여름은 피 맛이 느껴짐에도 계속해서 물고 빨기를 반복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뜯긴 입술이 공기에 닿자 따가웠다. 주먹 쥔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들 만큼 힘을 준 호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여름의 얼굴에 주먹을 뻗었다.

-탁

“헤헤. 궁금했거든. 입술만 보여 주는 걸 계속 빨아 보고 싶어서. 뭐 별거 없긴 한데 피는 맛있네. 가이딩이 잔뜩 묻어 있는 게.”

호은의 주먹을 가볍게 제압한 한여름이 반달로 눈을 휘었다.

“미친 새끼.”

“응? 어떻게 알았어. 나 너한테 미친 거!”

한여름은 굳어 있는 호은의 귓가에 비밀이라는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0년 동안 단 하루도 널 잊은 적 없어.”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고백으로 들릴 말이 호은에게는 살인마가 내뱉는 대사처럼 스산하게 다가왔다.

“왜 무서워? 네가 모르는 10년 동안 내가 널 지켜봤다는 게?”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한여름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때는 일반인인 너를 지켜보는 거로 만족했거든.”

눈썹을 모아 선량한 표정을 지은 한여름은 진짜라며 믿어 달라 말했다.

“그런데 네가 취업하고…… 가이드라는 소식을 듣고는.”

얼굴에 그늘이 진 한여름은 혀를 찼다.

“아 씨발. 역시 그냥 일 정리되는 대로 납치할 걸 그랬네 싶었지.”

“크흑!”

호은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한여름은 분풀이하듯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은 씹는 거지만, 언제 돌변해 물어뜯을지 몰라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럼 귀찮게 잠입해서 데리고 올 필요도 없었는데.”

귓구멍에 들어온 혀에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귀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듯 한여름은 깨물고 핥고 마치 음식을 갖고 노는 듯 장난치기 바빴다.

“너 때문에 손해 본 게 많은데 이 정도 보상은 괜찮잖아?”

키득, 낮게 웃은 한여름은 탁한 눈으로 호은을 감상했다.

땀에 젖어 엉망인 머리카락과 평소보다 피부는 열에 올라 붉은 장미 같았다. 흐트러진 상의는 가슴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중학교 시절 자신을 지켜 주던 남자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이런 꼴이라니.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던 한여름의 눈동자에 탐욕이 깃들려는 순간 불청객이 등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