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밖으로 빠져나갔어야 할 썬이 불이 나고 있는 지하로 내려온 게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불타고 있는 건물에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썬은 드라마 감상하듯 의견을 내뱉었다.
“저것 봐요. 다친 가이드는 신경도 안 쓰고 바로 반정부 잡겠다고 뛰어 들어가는 거.”
도인호에게 시선을 돌리자 놓친 선악율을 잡으려는 듯 불기둥 속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호은 씨가 생각하는 정의랑 다른 형태지 않아요?”
정곡을 꿰뚫는 말에 호은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선악율이 아닌 배연우를 택했을 거다. 눈앞의 도망가는 나쁜 놈을 잡는 것보다 동료의 생사가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배연우 한 명의 목숨과 선악율이 무수하게 저지를 범죄.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과연 정의일까. 아니, 감히 누가 옳다 아니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썬 씨. 여긴 위험합니다.”
쥐고 있던 인형에 힘을 준 호은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썬에게 말했다.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지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창고에 있는 기름통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니 서둘러 동료에게 알려주고 도망쳐야 했다.
“호은 씨는 혹시 운명을 믿나요.”
“네?”
홍보부와 합류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인 썬을 위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썬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며 호은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 운명론자는 아니었어요. 근데 내가 찾던 사람이 권호은이라는 걸 듣고는.”
“찾던 사람이요?”
“이런 게 운명이구나 싶더라고요.”
“네?”
“아. 그쪽은 날 아예 기억 못 했지.”
서늘한 얼굴로 비소를 보인 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었다.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썬은 갑자기 말을 놓기 시작했다.
“나랑 같이 가자.”
“썬 씨? 저는 아직 할 일이.”
“네가 구원해 줄 상대가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야.”
어디서 이런 악력이 났는지 썬에게 붙잡힌 팔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나는 또 네게 구원받을 거야.”
“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연기를 가득 마셔서 머리라도 어떻게 된 건지 썬이 걱정됐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람이 어떻게 180도 달라지냔 말인가.
“이상한 말 그만하고 얼른 위로 올라가세요!! 반정부한테 인질로라도 잡히고 싶은 겁니까?!”
호은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뿌리치고 배연우와 남운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뒤에서 미친 듯이 웃는 썬만 아니라면 말이다.
“푸하하하. 내가 인질?”
웃음에 취한 듯 비틀비틀 걸어온 썬은 호은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인질은 권호은, 너야.”
“???”
“가이드 찾았다.”
선악율 쪽을 바라보고 썬은 말했다.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다급한 도인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은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자 보이는 검은색 뭉텅이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도인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어 파랗게 질린 게 도인호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호은은 검은 그림자에 먹혀들었다.
***
“호은 형!!!”
호은이 없는 공간에 손을 뻗은 도인호가 처절하게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다정한 목소리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뻗은 손이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인호는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애타게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새빨간 불이다.
“연우야, 연우야 괜찮아?”
“남 팀장님! 위로 오십쇼!”
가냘픈 숨소리를 뱉는 배연우를 품에 안은 남운수는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품 안에 배연우를 안고는 서둘러 강힘찬이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일단 위로 올라가 지원 요청하죠.”
폴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도인호를 보고는 남은 인원을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이체를 잃은 안광은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다. 폴은 호은을 걱정하는 한편, 새삼스럽게 결정체 이식자인 도인호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깨달았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분노로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는 도인호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화르륵, 불이 타는 소리만 가득 울리는 아지트. 도인호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피가 다 빠진 듯 새하얀 얼굴은 그가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는지 알게 했다.
바닥에 조용히 꿈틀거리며 벗어나려는 원신을 잡아 올린 도인호가 온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권호은 어디 있어.”
“크흑, 내가 말할 거 같아?”
반항하듯 몸부림치는 원신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이드를 챙긴 우리의 승리라며 중얼거리는 원신을 망설임 없이 게임 테이블 위로 던지는 도인호였다. 테이블이 반으로 부러지며 그 아래로 원신이 떨어졌다.
도인호는 메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처음부터 호은을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있어야만 했다. 최선율과 원신에게서 호은을 구했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라도 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분명 호은과 자신은 이능력품을 사용해 외모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썬이라는 남자는 도중에 호은을 알아봤다.
“썬이라는 남자는 누구지?”
원신에게 다가간 도인호가 멱살을 잡아 올렸다.
“끄으윽…….”
원신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썬은 단순한 호은의 팬이 아니었다. 뒤에서 들렸던 대화는 분명 호은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호은을 노렸다는 듯이 납치해갔다.
“…….”
도인호의 뒤로 푸른 불꽃이 날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천장에 닿을 만큼 커진 불꽃에 원신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그는 반정부 보스랍니다.”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인호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이드도 없는데. 이능력 아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새 도인호의 앞까지 다가온 백우경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능력 때문인지 원신은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을 늘어트렸다. 도인호가 바닥에 원신을 고통스럽게 던졌지만, 감긴 눈은 요지부동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이 녀석한테 정보를 들어야 하는데!!!”
“무슨 정보 말하는 거죠? 아하. 권호은 가이드 말입니까.”
도인호가 사나운 눈으로 백우경을 쳐다봤다.
“상황실에서 모니터했습니다. 큰일이네요. 가이드 납치라니. 도대체 타이거는 무슨 생각인지.”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어가며 걱정된다고 말하는 백우경에 도인호가 주먹에 이능력을 담았다. 일자로 곧게 뻗은 주먹이 백우경의 뻔뻔한 면상을 공격했으나 너무나도 쉽게 백우경은 그것을 피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도인호 에스퍼? 서둘러 위로 올라가죠. 여기 있는다고 권호은 가이드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말이죠.”
어금니를 깨물며 도인호는 분노를 삭였다. 권호은이 납치됐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선악율이 그림자로 최선율을 챙기는 것을 막는 것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그림자를 크게 만들어 호은과 썬을 삼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호은이 없다. 호은이 납치당했다. 도인호는 권호은을 잃었다. 까만 글자가 머릿속에 빼곡히 써 내려간다.
‘지켜준다면서 거짓말쟁이. 한심한 놈. 너 때문이야. 네가 폭주해 죽었으면 권호은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도인호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호은, 호은 형을 구하러 가야 해. 무슨,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난!!”
“…….”
지키는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 방법이면 충분히 현장에서 호은을 지킬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아지트에 도착해 수행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사람이 많았고, 또 지나치게 협소한 공간이었다. 원래 자신이 쓰는 공격적인 전투 방법이라면 많은 일반인이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이능력을 쓸 때도 사람에게 해가 가지 않게 조심히, 타이거를 한 번에 제압하는 공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뒀다. 만약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틀림없이 호은에게 칭찬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인호야 정말 잘했어. 우리 일반인 사상자 아무도 없대.’
따듯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호은이 다정하게 웃었을 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일반인이 휘말리든 말든 한 번에 공격해 버렸을 텐데. 선악율이 호은을 납치하기 전에 죽여버렸을 텐데. 무수한 후회와 자책이 도인호의 분노가 되어 불꽃을 키우게 했다.
“가야겠습니다. 호은 형에게.”
도인호는 재가 날아다니는 현장을 훑어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리고 호은을 데려오면 그만이다. 가이드니까 죽이지는 않겠지. 만에 하나 호은에게 손을 덴다면 어떤 식으로 타이거를 고통스럽게 보내버릴지 이미지를 그려 나가자 이상하게도 머리가 차분해졌다.
아지트 밖으로 나가서 먼저 호은의 위치를 추적해야 했다. 혹시 몰라 줬던 위치추적 목걸이가 이제야 떠올랐다.
도인호가 아지트를 나가기 위해 걸음을 떼자 백우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
“멈춰요. 도인호 에스퍼.”
“왜 막는 겁니까.”
“홍보부의 역할을 잊었나요? 타이거를 잡는 게 홍보부의 역할이죠. 배연우 가이드는 중상이라 당장 현장에 투입하기 어렵고, 권호은 가이드는 납치.”
백우경은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도인호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다.
“재정비하고 싸웁시다. 원신에게 타이거에 관한 정보도 캐내고.”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도인호가 백우경을 지나쳐 걸었다.
“하아~ 정말.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도인호의 등 뒤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천천히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백우경이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권호은 가이드 안 구한대요? 일단 지금은 내버려 두자고요. 권호은 가이드한테 원하는 게 있어 보이니까. 천천히 가도 늦지…….”
순식간에 뒤를 돈 도인호가 총을 들고 있는 백우경의 팔을 가격했다. 바닥에 총이 떨어짐과 동시에 도인호는 백우경의 목을 손으로 짓눌렀다.
“당신에게 허비하는 이 시간조차 아깝습니다. 권호은 가이드는 나중이 아닌 지금 구하러 갈 겁니다. 홍보부 그만둘 테니까 단독행동에 대한 처벌은 돌아온 뒤 받도록 하겠습니다.”
“포부는 좋다만 아직 멀었군요.”
도인호가 꺾은 오른쪽 팔이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도인호는 백우경의 쥔 목에 힘을 가했다.
“총이 왜 꼭 하나라고 생각해?”
“?!!”
꿈틀거리는 오른팔에 시선을 준 순간 왼쪽 옆구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온몸을 퍼지는 마취에 도인호의 다리가 꺾였다.
“왼쪽 손도 봤어야지.”
백우경은 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만지며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럼 잘 자.”
“……호은 형.”
흐려지는 시야 속 도인호는 호은의 이름을 외쳤다. 구하러 가야 하는데.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도인호의 눈꺼풀이 완전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