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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1화 (41/129)

41화

아이들을 남자와 떨어트렸다는 기쁨도 잠시. 하준은 자신이 <디스코 팡팡>을 타고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의 이능력에 여기저기 벽에 한번 천장에 한번 바닥에 한번, 처박히기 바빴다.

“살려, 살려 주세요!”

아래층에서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다 도망치고 건물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지원하러 협회 직원이 온 건가.

“키히힛. 이번 건 상품이 되려나?”

하준을 바닥에 던진 남자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단에 무엇이 있는지 복면을 쓴 남자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어두컴컴한 복도가 순간 푸른 불꽃으로 밝아졌다.

-화르륵

폭죽이 터지듯 파란 불이 일렁거린다 했더니 계단에 있던 에스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남자의 머리를 잡고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쿠과쾅!

복도의 가장 끝에 파란 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사라졌다. 시선을 빼앗긴 하준은 상황과 맞지 않게 그 불꽃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염력을 쓰던 남자는 어떻게 되었지? 복도 끝으로 사라진 두 사람은 조용했다. 협회 직원이 이긴 걸까. 아니면 염력을 쓰는 남자?

-뚜벅, 뚜벅

-스윽, 스윽

작은 불꽃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아니 가까워지고 있는 건가.

“누구…….”

염력을 쓰던 남자의 목에 은색 쇠 목줄이 걸려 있다. 이능력 구속구다. 바닥에 질질 끌려오고 있는 게 기절한 걸로 보였다.

“지원 투입된 도인호 사원입니다.”

사납게 찢어진 눈매 아래로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았다. 뺨에 튀겨진 붉은 피. 위화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덩치.

살았다는 안도감이 찾아오기 전에 도인호라 소개한 남자의 어두운 기운에 눌려 하준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민원부 하준입니다. 그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목구멍에서 나오질 못한다. 간신히 숨소리만 헐떡거리며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하시죠.”

도인호는 하준을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 아이들은 서로에게 꼭 붙어 있다. 밧줄이 풀려 있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가지 못한 모양이다.

하준은 점점 회복하고 있는 몸을 느끼며 도인호와 살짝 떨어져 아직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애들아, 괜찮아. 다 끝났어.”

아이들은 하준에게 와락 안겼다. 공포에 질려 마음껏 소리를 내 울지 못한 아이들이 이제는 울어도 되는 걸 아는지 엉엉 소리를 낸다.

“집에 가자.”

하준은 눈물로 엉망이 된 아이들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 주며 뒤를 돌았다. 도인호는 기절한 남자의 구속구를 잡은 채 하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싹. 하준의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사람이 저렇게 메마른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잡으면 으스러질 것 같은 모래처럼 도인호의 얼굴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아…….”

하준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진짜 히어로는 우스꽝스러운 유니폼을 입을 필요 없다. 진짜 히어로는 악당을 물리칠 수 있는 특수한 무기나 필살기 그 무엇도 필요 없다.

진짜 히어로는, 아무런 사명감 없이 명령에 따라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하준에게 살려 줘서 감사하다는 아이들을 무사히 보호자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도인호의 등장부터 모든 기억을 지웠다. 대체 기억으로 하준이 자신을 지키고 악당을 물리쳤다는 내용으로 조작했다. 기억 조작의 이유는 단순했다. 도인호 사원은 폭주 위험자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도인호의 존재를 지우고 가짜로 만든 기억에 하준은 그토록 바라던 히어로가 됐다. 비록 가짜 히어로지만.

***

다시 현실로 돌아온 하준은 고추를 따며 대답했다.

“도인호 에스퍼님은 기억 못 하겠지만, 절 구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인호가요?”

“네. 따지자면 제 히어로 같은 거죠.”

“에스퍼의 히어로라. 뭔가 근사하네요.”

하준은 호은의 말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추를 마저 바구니에 채웠다.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있자 도인호는 자신이 맡은 라인을 다 끝낸 건지 호은의 옆에 붙어 도와주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 나눴어요?”

멀리서 하준과 호은이 대화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 거슬리는 소리에 도인호는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낸 뒤 호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비밀.”

호은이 장난치듯 웃자 고추를 따고 있던 도인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 인호야. 이거 조심히 따야 해. 고추 부러졌다.”

“네.”

어두운 기운이 도인호의 발밑부터 올라오기 시작한다. 기분이 왜 가라앉지. 마치 지난번 호은이 다른 사람의 냄새를 몸에 묻혀 왔을 때 느꼈던 기분이다.

“사실. 인호, 네 이야기 했어. 팀장님이 너를 알고 계셔서 말이야.”

호은이 도인호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훈훈한 일화가 있던데.”

호은이 웃으며 대견하다 칭찬하자 도인호는 두 동강 난 고추를 짓밟고 있던 발을 조용히 들었다.

“내가 모르던 네 이야기를 들으니까 궁금해졌어. 도인호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호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인호를 바라봤다. 태양을 그대로 잘라 내 담은 것 같은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저도 궁금해요.”

“우리 둘이 같네.”

호은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도인호는 요란하게 뛰는 심장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심장이 떨렸다.

“서울 양반들. 고생했슈. 이거 하나씩 챙겨 가.”

작업 마무리를 하고 나자 어르신께서 과일을 바구니에 가득 채워 호은에게 건넸다. 복수박과 포도, 사과 등이 담겨 있었다.

네 사람이 이장 댁으로 복귀하자 고생했다며 이장이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실 베란다 문을 열자 빗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이장이 준비한 식사는 잔치국수와 부추전이었다. 호은은 카메라맨의 역할에 충실하게 음식의 모습을 열심히 찍었다.

“이런 것도 들어가나요?”

“분량 부족하면 넣으려고요.”

블랙이 물어보자 호은이 답했다. 가이드 영상은 둘러본 곳이 많아 시간이 괜찮았으나 에스퍼 영상은 편집하다 보면 나올 게 적을 것 같단 판단이 들었다. 이런 것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면이긴 하니까.

영상에 맛있게 잘 담긴 음식을 확인하고 나서야 호은은 수저를 들었다.

배부르게 식사를 끝내고 나자 이번에는 이장이 아까 받아 온 과일을 손질해 내왔다.

“세호야. 너도 나와서 이거 먹어라.”

안쪽 방문이 열리며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거실로 나오자 이장이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파요. 할아버지 저 민수랑 개구리 잡고 올게요.”

“비 오는데 어딜 나간다는 겨?”

“비 내려야지 개구리 잡기 좋아요.”

이장의 손주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야무지게 우비와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손주인가 봐요?”

“방학이라고 놀러 왔는디. 어제부터 계속 개구리 타령이여.”

이장님은 고개를 저으며 요즘 애들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호은은 복수박을 입에 우물거리며 창밖을 쳐다봤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개구리 잡으러 어디로 가는지 아세요?”

“산 아래쪽에 냇가가 있는디. 아마 거기로 갔을 겨.”

블랙은 할아버지의 대답을 듣고 자리에 일어섰다. 빠르게 현관문을 빠져나가 점점 멀어져 가던 세호의 어깨를 잡고 차근차근 뭐라 말하자 세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블랙이 이장에게 30분만 놀다 들어오라고 잘 말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했다.

“그러고 보니 블랙은 동생이 있다고 그랬지.”

“네 맞아요. 시간을 안 정해 주면 자기 마음대로 놀다 들어오니까. 시간에 제약 거는 게 습관이 되었네요.”

블랙과 하준이 대화하는 걸 들으며 호은은 가만히 앉아 있는 도인호에게 사과를 입에 물렸다. 사과를 씹자 단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네 사람이 웃고 떠들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슬슬 갈 준비할까요.”

“그런데. 세호가 안 들어오네요.”

하준이 갈 준비를 하려고 하자 블랙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세호를 언급했다.

“조금 걱정되는데. 세호 집에 돌려보내고 출발할까요?”

호은의 말에 세 사람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러 가는 사이에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블랙은 이장님 댁에서 대기 부탁드립니다.”

“넵. 팀장님.”

굵어진 빗줄기에 우산을 쓰고 호은은 산으로 갔다. 냇가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직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큰일이네요. 비 때문에 물이 불어나고 있어요.”

지난번에도 장마가 와서 그런지 냇가라는 표현에 맞지 않게 깊어 보였다. 세 사람은 냇가를 따라 걸어갔다.

“세호야!”

세호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대답 소리는 그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찢어져서 돌아다녀 볼까요?”

이대로 냇가를 따라 걷는 게 맞나 싶어 호은이 말하던 순간이었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요.”

하준이 손으로 귀를 매만졌다. 도인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앞장서서 뛰는 하준의 뒤로 호은과 도인호가 따랐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호은은 뛰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구리 잡으러 간 애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 리는 없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불안한 생각이 풍선처럼 부풀 때 하준이 찾았다! 큰소리로 외쳤다.

“살려 주세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호와 같이 개구리를 잡으러 온 친구인지 또래 아이가 엉엉 울며 세 사람을 쳐다봤다. 냇가를 따라가던 길은 저수지와 연결된 건지 물의 크기도 넓어지고 깊이도 높아 보였다.

하준이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옆에서 호은이 장화를 벗어 던졌다.

“호은 씨!”

호은은 망설임 없이 바로 뛰어 들어갔다. 물에 대한 공포는 없다. 어렸을 때 수영을 배우기도 했고 선수를 준비하기도 했으니 자신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생각보다 깊은 물은 비가 내려서 그런지 빠르게 저수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호은은 발이 닿지 않아 허우적거리는 세호의 몸을 붙잡았다.

“괜찮아.”

하준이 잠바를 벗어 울고 있는 세호의 친구에게 덮어 줬다. 도인호는 호은의 상황을 확인하며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하준과 아이가 있는 곳에 모닥불을 피었다. 우산으로 불이 꺼지지 않게 막은 다음 도인호는 물에서 나오려는 호은을 꺼내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휙

그 순간 도인호의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화살은 호은을 노렸는지 바로 앞에 떨어져 강물 밑으로 사라졌다.

“인호야! 세호부터.”

호은이 세호를 들어 올리자 도인호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도인호의 품에 아이가 무사히 안긴 걸 확인하고 나서야 호은도 강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어?”

그러나 그 순간 다리에 무언가 휘감는다는 느낌이 들더니 물 밑으로 순식간에 몸이 가라앉았다. 마치 누군가 다리를 붙잡는 것 같았다.

“……!!”

호은은 물속에서 힘겹게 눈을 떠 밑을 확인했다.

물회오리가 호은의 다리를 감싸 놔주지 않고 있다. 이건 뭐지? 회오리의 중심에는 호은의 앞으로 떨어졌던 화살이 있었다.

‘저거 때문인 건가?’

호은은 손을 뻗어 화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팔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았다. 앞으로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지. 호은은 회오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호은 형!”

호은을 구하기 도인호가 강에 들어가려 하자 뒤쪽에서 줄 당기는 소리가 들린다.

“안 돼. 구하러 가면.”

그때 또다시 날아오는 화살을 낚아챈 도인호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꺄아. 표정 무서워. 그러면 인기 없다?”

전통탈을 쓴 여자가 활을 어깨에 멘 채 등장했다. 검은색 도포와 황금색 자수. 도인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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