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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40화 (40/129)

40화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가자 호은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기운을 차린 하준이 두 사람을 반겨 줬다. 골라 먹을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샀더니 가장 먼저 쭈쭈바가 사라졌다. 호은과 도인호도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자 이번에 다시 가겠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호은은 캠코더를 든 채 촬영을 재개했다. 하준은 크게 숨을 들이켜며 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필살…… fly high!”

흙무더기가 공중으로 올라간다. 하준이 손을 움직이는 방향으로 춤을 추듯 흙이 이동하다 파란 봉지 위로 떨어진다.

옥수수를 짓누르고 있던 흙무더기가 사라지자 꺾인 옥수수의 형태가 보였다.

“컷!”

컷 소리에 하준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엄지를 든다. 마지막 모습까지 영상에 담았다.

호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인호에게 손을 뻗었다. 호은이 내민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인호가 호은처럼 손을 들자 ‘짝!’하고 마주치는 소리가 들린다.

도인호는 자기 손바닥을 접었다 펴며 블랙과 하준에게도 손바닥을 치는 호은을 바라봤다.

“그러면 이걸로 사무실 복귀하면 되나요?”

“그렇긴 한데…….”

하준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흐렸다.

“아이고. 서울 양반들! 여기 끝나면 후딱 와야제!”

옥수수밭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밑을 내려다보니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네 사람을 불렀다.

“농촌 현장은 봉사 개념으로 집마다 도와드리고 있거든요. 요즘 시골에 사람이 없기도 하고.”

“아 정말요?”

“네. 그래서 두 분은 바쁘신 거면 먼저 올라가셔도 됩니다.”

하준의 말에 호은과 도인호는 서로를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하고 가겠습니다.”

도인호가 대답하자 호은이 잘했다는 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준과 블랙은 허리를 굽혀 얌전히 쓰다듬을 당하는 도인호를 보며 수군거렸다.

“도인호 에스퍼님을 조련하시네요.”

“그렇군요. 저도 조련당하고 싶─”

“팀장님.”

싸늘한 블랙의 눈초리에 하준은 마무리 작업을 해 볼까 혼잣말하며 딴청을 부렸다. 블랙이 마을 주민에게 조금 이따 내려가겠다고 답하자 어르신은 고추밭으로 오면 돼! 대답하고 전동차를 타시고 사라졌다.

하준이 이능력을 나눠 사용하며 산에다가 흙을 모조리 옮기고 나서야 네 사람은 고추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고추밭에서의 일은 단순 작업이었다. 잘 익은 고추의 줄기를 잡고 상처 나지 않게 따면 되는 거라 넷이서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바퀴 달린 이동식 의자에 앉아 각 라인당 둘씩 앉았다.

자리 배치는 고추밭 주인이 해 줬기에 아쉽게도 호은과 도인호는 떨어져 앉을 수밖에 없었다. 호은의 뒤에 앉은 하준은 빠른 손놀림으로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팀장님. 손 엄청 빠르시네요?”

“하하. 별거 아닙니다. 제가 시골 출신이라. 이능력은 C급이어도 농사일은 A급이거든요.”

“오 대단하신데요!”

“그래서 저한테 이런 현장이 많이 오나 싶기도 하고.”

빨갛게 익은 고추를 바구니에 담으며 밝게 대답하던 하준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바구니에 수북하게 찬 고추를 플라스틱 통에 담고 다시 비어 있는 바구니에 고추를 기계적으로 담는 모습이 능숙했다.

“사실 도인호 에스퍼님이 촬영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허락하고 조금은 후회했습니다. 제가 에스퍼로 발현하고 시골에서 현수막 달 정도로 좋아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이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허락해 주셨네요.”

“당연합니다. 도인호 에스퍼님의 부탁인걸요.”

“엇? 그 반응은 뭐죠!”

“하하. 제가 도인호 에스퍼님께 갚을 빚이 있어서요.”

하준은 3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

일반 회사와 다르게 에스퍼는 팀장이 되려면 진급 시험이라는 것을 봐야 했다. 진급 시험은 자신의 등급보다 두 배 정도 높은 현장을 나가 임무를 맡게 되고 해당 임무에서 보여 줬던 활약이나 상황 판단, 대처 능력 등에 점수를 매긴다.

하준이 맡은 현장은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목숨과 직결된 현장은 처음이었기에 전투복 안이 땀으로 흠뻑 젖었던 거로 기억한다.

납치된 아이는 3명으로 초등학생 연령대의 아이들이었다. 단순한 실종 사건이었다면 이능력자 협회에서 나서지 않았겠지만, 아이들은 1차 발현이 나타난 에스퍼 의심자 전 단계였다.

에스퍼의 발현은 1차와 2차로 구분된다. 1차 발현은 에스퍼와 비슷한 유전자로 구성된 사람 중 회복 능력이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고 2차 발현은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며 대부분 2차 발현까지 하고 나서야 에스퍼라 확정 짓는다.

-건물 안에 아이들과 납치범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코드 네임 옐로우 상황은?

“건물 밖에는 아무 장치도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하준은 무전기를 들고 응답했다. 진급 테스트라고 해도 현장은 실제 상황이기에 하준을 제외하고 다른 에스퍼들은 B급으로 구성되어 건물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일반인으로 1차 발현자를 비싼 값에 팔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런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보였다. 평소 민원부에서 하던 업무보다야 높은 등급의 현장이지만 제압해야 하는 상대가 일반인이기에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른 진급 테스트로 테러 현장에 나가는 일도 있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껌이지. 하준은 알사탕을 혀로 굴리며 명령이 내려지길 기다렸다.

-작전 개시.

납치범을 제압하는 팀과 인질을 구조하는 팀으로 나누어진 이번 작전에서 하준은 인질 구조팀이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 유령 상가가 된 건물의 뒷문으로 침입한 하준은 인질 수색 작업을 시작하였다.

스산한 기운이 건물 전체를 감싼다. 벽과 버려진 가구들에 몸을 기대며 하준은 빈방을 하나씩 수색했다.

에스퍼로 일한 지 5년 차가 됐는데 이런 현장은 처음이다. 낯선 긴장감에 목이 말라 갔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걸음에 신경 쓰며 걷고 있자 위쪽에서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하준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빠르게 복도 계단으로 올라가 숨소리가 들리는 문을 경계하며 열었다.

“흐윽. 흑.”

문을 열자 인질이 된 아이들이 검은 천으로 앞이 가려졌고 입은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세 명의 아이 중 한 명이 입에 붙은 테이프를 뗐는지 반쯤 벗겨진 테이프 사이로 하준의 귀에 들렸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옐로우. 인질 찾았습니다.”

-치지직.

“상황실?”

-치지직, 치직.

대답하지 않는 상황실에 의아해하며 하준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무서웠지? 금방 구해 줄게.”

하준은 묶인 손과 발을 풀어 주기 위해 단도를 꺼내 들었다.

-옐로우. 응답하라. 현장 레벨을 B에서 A로 승격. 현장에 신분을 알 수 없는 A급 에스퍼 출현. 무전 듣는 즉시 현장에서 빠지, 치직. 칙.

“뭐야 씨발?”

하준은 끊긴 무전기에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스퍼가 출현했다고? 운이 좋다고 말한 건 취소다. 그래. 내가 운이 좋을 리 없지. 운이 좋았다면 C급 에스퍼로 태어났을 리 없다.

하준은 욕설에 놀란 아이들을 달래 가며 서둘러 밧줄을 잘랐다.

-뚜벅. 뚜벅.

그때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목적지가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걷는 발소리를 듣는 순간 무전기에서 말한 신분을 알 수 없다는 에스퍼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장 동료들은 다 어디에 갔길래 하나의 발소리만 들리는 걸까.

마지막 인질의 밧줄을 풀어 주며 하준이 몸을 일으킨 순간 문이 열렸다.

“키힛. 상품이 하나 더 늘었네.”

“윽!”

검은색 복면을 쓴 남자가 하준을 향해 손을 올리자 하준이 벽에 처박혔다. 입 밖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

‘저 남자. 나랑 같은 염력 에스퍼야.’

하준은 벽에서 몸을 일으켜 아이들의 앞을 지키듯 섰다.

“내가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셋 셀 테니까 도망가는 게 좋을걸. 나 생각보다 강하거든.”

하준은 자신이 지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됐다. 머릿속에는 온통 ‘큰일 났다.’ 네 글자만 커다랗게 돌아다녔다. 어떡하지? 에스퍼와 대련했을 때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는 최약체인데.

“당신 강해? 키히힛. 그러면 그 실력 좀 볼까.”

다시 손을 드는 남자에 하준은 커다랗게 엑스자 표시를 만들었다.

“스톱 스톱! 지금 당신이 악당 포지션인 것 같은데. 아무리 악당이어도 어린 학생들이 있는 곳에서 싸울 만큼 최악은 아니겠지? 내 이능력 한 번이면 이 방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은 보내 줘.”

하준의 뒤에 벌벌 떨며 서로의 몸에 꼭 붙어 의지하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남자는 손뼉을 치더니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만큼 강하다면 저 세 명보다 값어치가 있겠네. 좋아. 필요 없는 상품은 없애야겠어.”

남자가 손을 들었다. 염력은 몸으로 막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준이 아이들을 가리고 있어도 남자가 이능력을 쓴다면 아이들의 몸은 들어 올려질 거다.

하준은 남자가 한 것처럼 손을 뻗었다.

‘젠장. 묵직하잖아.’

남자는 상당한 실력의 에스퍼인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몇 초 못 버티는 염력인데 남자와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간신히 남자의 염력을 막고 있지만 시간문제였다. 5초 가지고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안 돼!”

이능력 해제가 된 하준이 뒤를 돌아 아이들을 감싸 안고 몸을 뒤집어 벽에 닿는 면을 자기 몸으로 바꿨다.

벽에 부딪힌 충격에 뇌가 흔들린다. 에스퍼이다 보니까 금방 괜찮아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못 느끼는 건 아니기에 하준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방금 뭐 한 거니? 이능력을 왜 쓰다 말아?”

“너 같은 놈은 이능력 없이도 이길 수 있거든.”

하준은 아이들을 내려놓고 곧바로 남자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

-쾅.

“키히힛. 뭐야, 약하잖아?”

남자의 얼굴에 주먹이 닿기 전 하준의 몸이 다시 벽에 처박혔다. 하준은 벽에 부딪히면 튀어 오르는 탱탱볼처럼 다시 자세를 잡아 남자에게 몇 번이고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남자에게 단 한 번도 닿지 않았다.

“불량품이네.”

불량품. 남자의 말을 곱씹으며 하준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었다. 낙오자라는 단어는 들어 봤어도 불량품이라는 단어는 처음이다. 낙오자보다 훨씬 기분 나쁜데 맞는 말이었다. 이능력을 5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확실히 제 기능을 못 하는 에스퍼니까 불량품이다.

얼마나 벽에 처박혔을까. 회복 속도가 상처를 따라잡지 못한다. 하준은 인질을 데리고 나가려는 남자를 보며 손을 뻗었다.

-툭

이능력으로 공중위로 떠오른 돌이 남자에게 닿기 직전 5초가 지나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하준은 주먹을 쥐었다.

처음 에스퍼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어린 시절에 봤던 지구를 지키는 <파워 레인저>가 될 줄 알았다. 강한 힘을 가지고 세상을 지킨다. 혼자서 지키지 못하는 건 동료들과 같이 지킨다. 그런 꿈을 가졌었는데.

현실은 어땠는가. 낙오자들의 집합소라 불리는 민원부 발령. 같은 동료 에스퍼들에게 무시당하는 처지. 처음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현장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준은 남자에게 닿지 못한 돌을 들고 뛰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인 남자에게 돌은 던지고 돌이 남자와 가까워졌을 때 이능력을 발동했다.

“하?”

정확히 명중한 돌은 남자의 머리를 공격했다. 염력은 이능력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발동 대상에게 집중해야만 이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아이들을 염력으로 공중에 들고 있던 남자가 험악한 얼굴로 하준을 쳐다봤다.

‘저 녀석 집중력이 흐트러졌어.’

하준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능력을 발동해 아이들을 계단 밑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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