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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31화 (31/129)

31화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도인호의 모습에 호은은 자신을 못 믿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있는 도인호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내가 유명한 너튜버는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영상을 올리긴 했거든.”

마지막에 올린 영상 때문인지 호은이 활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영상부터 최신 영상까지 조회 수가 만 단위 이상을 넘어갔다. 생각보다 많이 올라간 조회 수에 호은은 계속 영상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다 곧바로 멈췄다. 너튜브 영상 중 아무거나 하나를 틀며 도인호에게 보여 줬다.

“사실 뭐 재미있는 콘텐츠를 많이 한 건 아니고. 먹는 거 위주로만 찍긴 했는데.”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호은은 조심스럽게 도인호를 쳐다봤다. 관심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도인호는 영상을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이걸 이 숫자만큼의 사람들이 본 거예요?”

“아. 응 그렇지. 인기가 없는 편이라 조회 수가 잘 나온 건 아니라 조금 부끄럽네.”

영상 속 호은은 얼굴 전체를 보이지는 않았다. 음식 위주의 영상이다 보니 코 밑에 부분까지만 비쳤다. 호은이 말하는 먹는 거 위주의 콘텐츠를 본 적 없는 도인호는 이것이 잘 찍은 건지 못 찍은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저 붉은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혀가 잠깐 보이는 것에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모든 영상을 당장이라도 지우고 싶다.

이걸 지금도 누군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몸 안에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도인호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호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망하기라도 한 듯 손이 부산스럽다. 볼을 만지던 손이 매끄러운 목덜미를 매만진다.

올라오는 불쾌함의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감정이 드는 건 도인호에게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다. 에스퍼 강화제의 부작용인가 의심해 본 도인호다.

“내가 생각 해 봤는데. 홍보부의 목적이 에스퍼와 가이드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거라면 이 직업에 관해 다루는 게 어떨까?”

“직업이요?”

“우리가 회사에서 하는 일을 일반인이 알아도 되는 수준으로 보여 주는 거야. 일단 에스퍼 인식 개선이 우선이니까. 친근하게 다가가는 거지.”

도인호는 호은의 말에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했다. 홍보부의 구성원은 문제아 집합소다. 징계를 내리는 대신에 반정부와의 전쟁에서 가장 전방에 가까운 위치로 추방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홍보부는 표면상의 이름이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은 반정부 소탕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의미 없는 홍보 영상 제작은 무엇을 위해 하는 걸까?’

도인호가 생각하기에는 독이 가득 오른 반정부에게 찍힐 인질을 정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상으로 도발한다. 도발이 제대로 먹힌다면 반정부에서는 해당 영상을 제작한 직원에게 보복하려 움직일 것이다.

지난번 상황으로 예상했을 때 반정부에 제대로 된 가이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가장 높은 등급이 있다 하더라도 A등급 정도. 그 이유라면 지난번 S등급 가이드를 가지고 딜을 하려던 것이 이해된다. 이번에도 가이드를 노릴 확률이 높다.

도인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호은에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호은이 차고 있는 초록색 사원증 레벨 부분에 D+라고 적혀 있다.

임무 레벨과 해당 직원의 실제 등급이 일치할 경우는 플러스로 표시. 낮을 경우는 마이너스로 표시한다.

아무리 봐도 호은의 가이딩 등급은 A급 이상이었다. 무엇 때문에 D등급으로 설정되었는지는 몰라도 호은이 S등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도인호의 입술이 점점 내려갔다. 아무리 봐도 상황의 타깃이 점점 호은에게 맞춰지는 것 같다.

“우선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볼까요?”

“아. 그렇네! 콘텐츠가 겹치면 안 되니까. 확인하러 가 보자.”

도인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팀원이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호은이 아닌 다른 가이드를 타깃으로 정할 계획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 움직이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지니가 들어온다.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네!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좋죠. 같은 팀원들을 만나 보려고 하는데…….”

“홍보팀은 총 6명으로 현재 두 명씩 3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어느 팀을 보러 가실 건가요?”

“가까운 곳에 계신 분들이 계실까요?”

호은의 물음에 지니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3팀과 가까운 팀은 2팀입니다.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는 지니가 걸을 때마다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의미 없이 지니의 머리카락을 보며 걸음을 맞추던 호은은 한때 익숙하게 들렀던 건물과 가까워지자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훈련장에서 영상을 찍을 일이 있나?”

세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철로 된 문 앞에 멈췄다. 지니는 두 사람에게 들어가라며 문 앞을 비켜 줬다. 호은이 문을 열자, 비가 내리기라도 했는지 습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내부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싶을 때 호은의 앞으로 돌고래가 돌진했다.

“어어?”

당황한 호은의 신음이 터진 순간 도인호가 조금은 거칠게 호은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고 곧바로 남은 한 손을 들어 원형의 불길을 만들었다. 원 안으로 들어간 돌고래는 증기를 내며 순식간에 소멸했다.

“어머! 괜찮으세요?!”

잔뜩 놀란 여성의 목소리가 훈련장 안을 채웠다. 호은은 도인호 어깨너머로 보이는 여자를 발견하고 순식간에 도인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지난번에…… 그 임신하셨던.”

호은은 연노랑 임부복을 입은 여자를 보며 아는 척했다. 그러자 여자도 호은의 얼굴을 보고는 기억이 났는지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눈을 한다. 도인호는 멀어진 호은의 옆을 자석처럼 따라나섰다.

“여기서 이렇게 보니 더 반갑네요. 많이 늦었지만, 저희 통성명할까요? 저는 레오의 파트너 가이드인 최유빈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저는 권호은이라고 합니다. 어…… 이쪽은 도인호 에스퍼입니다.”

물의 이능력이 익숙하다 했더니 저 멀리서 레오가 당황한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너도 징계?”

“…….”

평소처럼 무뚝뚝해 보이는 도인호였지만 레오는 그의 심기가 뒤틀렸다는 걸 눈치챘다. 미세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살기다.

레오는 자신의 가이드를 지키기 위해 권호은을 위험한 현장에 보낸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자신의 옆에 무사히 살아 숨 쉬는 와이프 덕에 서서히 잊혔다.

호은이 한 달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소식에도 안타까움보다는 안도가 먼저였다. 저기 누워 있는 게 자신의 와이프가 아니라는 안도. 마치 그 속내를 눈치챈 듯 도인호의 살기에 레오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권호은 꾀어내서 현장 보낸 줄 알겠네. 권호은이 먼저 부탁한 건데…….’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속으로 삼키며 식은땀을 흘리는 레오에게 호은이 다가왔다.

“그럼 레오 대리님이 2팀이신 거네요?”

“내가 도인호한테나 대리지. 그냥 우리끼리 있을 땐 말 편하게 해도 돼. 그치, 자기야?”

“응 그럼! 호은 씨도 영상 제작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현재 구성까지 다 짠 상태라 영상 촬영 중이었어요.”

주변을 둘러보자 가운데에 삼각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호은이 받은 것과 같은 캠코더가 있었다.

“방금 이능력도 영상 때문에 쓴 건가요?”

“맞아요. 콘텐츠 정하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우리 축복이가 알려 준 거 있죠.”

최유빈은 자신의 배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걸 바라보는 레오 또한 같이 미소를 짓는다.

“밤마다 남편이 축복이한테 동화를 읽어 줬는데 이번 콘텐츠도 그렇게 해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물의 이능력을 이용한 동화를 만들고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네, 좋아요.”

최유빈은 눈을 감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동화를 읽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 남들과는 다른 힘이 있는 소년이 있었답니다.”

최유빈의 목소리에 맞춰 레오가 손을 움직였다. 내리는 빗방울이 뭉치더니 어린아이 형태로 변했다.

“소년은 자신의 특별한 힘을 이용해 힘든 사람을 도와줬어요. 가뭄이 있는 마을에는 비를 내려 주고 물이 없어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물을 만들어 줬죠. 소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어요. 사람을 구해 주는 게 행복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자기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요.”

본인이 에스퍼인 줄 모르고 능력을 쓰던 소년은 결국 가이딩이 부족해 폭주 직전까지 갔다.

소년은 죽는 순간까지 남을 도와주겠다 결정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 마을로 향했다.

목적지에서 비를 내리고 소년이 쓰러진 순간 마을에 살던 한 소녀가 쓰러진 소년을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그렇게 소녀에 의해 기적처럼 소년은 건강을 되찾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다.

다시 건강을 되찾은 소년은 소녀와 함께 어려운 사람을 찾아 모험을 다녔다.

동화에 악당이 나와야 하듯 소년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지만 나쁜 일에 사용한 나쁜 소년이 소녀를 뺏으려고 한다.

소년은 나쁜 소년과 정정당당하게 붙어 물리치고 소녀를 되찾으며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며 이야기가 끝났다.

익숙한 이야기 구성과 동화 형식에 내용은 단순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쉬웠다.

사람들을 위해 능력을 쓰는 소년은 정의롭다. 그것은 정부 에스퍼다. 그리고 그런 에스퍼를 도와주는 소녀는 가이드다. 그런 소녀를 노리는 나쁜 소년은 반정부다. 내용을 인지한 사람들은 곧바로 역할 관계를 연결 짓게 된다.

호은은 잘 만들어진 동화에 손뼉을 쳤다.

“좋은데요! 저는 이런 생각 못 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유빈 씨 목소리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호은과 최유빈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오는 도인호의 옆에 섰다.

“파트너 육아 휴직은 언제 들어가나요.”

“원래는 지난달에 들어가야 했는데. 알잖냐. 징계받아서 나가리 됐지.”

“…….”

“내가 만약에 조금 더 인맥이 있었더라면…… 등급이 높았다면…… 실적이 좋았다면……. 유빈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 싶다.”

레오는 괴로운지 주먹을 쥐었다. 도인호는 저 얼굴을 안다. 자기혐오로 인한 괴로움이다. 레오는 단전에서 끌어내듯 후! 하고 강하게 숨을 내뱉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영상이 채택되면 딜 좀 해 보려고. 2팀은 최유빈 가이드 제외하고 진행해 달라고 말이야.”

“프로젝트 목적을 알고 계셨네요.”

“당연하지. 내가 멍청해도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건 머리가 빨리 돌아가거든.”

그저 성과를 내고 싶어 열심히 하는 건 줄 알았건만, 레오 또한 해당 프로젝트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레오가 손을 가볍게 튕긴다. 카메라 정면에 물방울이 춤추듯 그려진다.

Happy Ending.

이상적인 동화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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