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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22화 (22/129)

22화

구두 소리가 장내를 채운다. 긴 다리의 시원시원한 보폭으로 회의장에 들어온 남자에게 모두 시선을 빼앗겼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시선을 받으며 빈자리에 착석했다.

“대통령과 얘기는 다 끝내고 왔습니다. 우리는 타이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짧은 은발 머리카락과 바다가 담겨 있는 것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호수를 보며 윙크를 보냈다.

가이드 공단 이사장 백우경.

가이드 공단 이사장은 여태까지 일반인이나 가이드였다.

대한민국 가이드 공단이 세워지고 처음으로 에스퍼가 이사장이 되었다.

30대 초반의 외모로 서글서글한 인상은 호감 쌓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뱀 같은 남자. 호수는 백우경의 등장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여기서 해결할 순 없다 보니 회의 참여에 늦어졌습니다. 타이거 협박을 확인하고 바로 대통령실에 연락해 상황 보고했습니다. 한국은 반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이능력 전쟁이라도 한다는 건가. 거기다 현재 63 스퀘어에 잡혀 있는 인질들을 포기한다면 여론 반발이 심상치 않을 거라네.”

에스퍼 협회장이 백우경의 말에 문제를 지적했다.

“저희 쪽에서 전쟁 일으키지 않고 인질도 구할 대안을 가져왔습니다.”

백우경과 같이 들어온 연구원이 노트북이 있는 뒤쪽으로 가더니 USB를 연결하고 화면에 자료를 띄웠다.

“가이드 능력 강화제입니다. 현재 개발 중인 단계로 임상 시험 결과 가이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이딩을 3배 이상 늘려 줍니다. 부작용으로는 가이딩을 제외한 가이드의 신체는 평소와 똑같기에 가이딩으로 손실된 체력이나 내부 피해를 복구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또한, 이외에도 다른 부작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서 저게 무슨 대안이라는 거지.”

“우리는 약속대로 타이거가 원한 인원수만큼의 가이드를 보낼 겁니다. 단 등급은 B에서 C등급으로 구성할 예정이죠. 낮은 등급의 가이드에게 가이드 강화제를 먹여 눈속임할 겁니다.”

“가이드만 보내서는 인질을 구할 수 없을 텐데.”

가만히 내용을 듣던 호수가 비아냥거렸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연구원이 말을 멈추자 백우경은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계속 발표를 진행하게 했다. 발끈조차 하지 않는 백우경의 행동에 호수는 혀끝을 찼다.

호수의 행동으로 잔뜩 긴장한 연구원은 목이 마르는지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다시 발표를 이어 갔다.

“멤버 구성에는 에스퍼도 있습니다. 가이드 강화제를 에스퍼가 먹었을 경우 1시간 동안 가이드처럼 몸에서 가이딩이 생성됩니다. C등급 가이드는 에스퍼로 구성해 인질을 구하면 됩니다. 우리 쪽에서는 S급 가이드를 보내지 않은 채 에스퍼를 잠입시켜 인질 구조를 하는 계획입니다.”

“그다음은 제가 설명하도록 하죠.”

가만히 있던 백우경이 회의장에 들어올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서류를 꺼내 모두에게 돌렸다. 이미 해당 대안을 생각했을 때부터 인원을 구성했던 건지 가이드와 에스퍼가 섞인 총 열 명의 사원 프로필이 있었다. 호수는 프로필을 보다 도인호의 이름을 보고 멈췄다.

“도인호를 보낸다고?”

“보내야죠. 도구는 이럴 때 사용하는 건데.”

호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싸늘한 눈으로 백우경을 쳐다봤다. 너였냐? 도인호의 정상적인 폭주를 방해하던 인물이. 호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는 듯 백우경은 상쾌한 미소로 답했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주도 안 남은 이 시기에 와서 왜 저러는 용의가 궁금해졌다.

호수는 에스퍼 협회장을 쳐다봤지만, 사월이 말한 내용이 맞는지 협회장은 해당 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나서지 않으면 호수가 나설 명분이 사라진다.

입술을 짓뭉개며 호수는 도인호의 프로필을 한참을 봤다. 이후 프로필을 넘겼지만, 가이드의 등급들을 보아하니 도인호를 케어할 만한 녀석은 없는 듯했다.

***

반정부 등장으로 치킨집 분위기는 다운되었다. 인턴사원들은 자리를 파하고 호은은 숙소에 들어가지 못한 채 단지 내를 서성였다.

주변이 평소와 다르게 소란스러웠다. 인턴에게는 공지 내려온 게 없지만 다른 사원들에겐 이번 반정부와 관련된 업무 지시가 내려진 모양이다.

호은은 주변을 괜히 얼쩡거리며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집중하였다.

“아싸! 나 없어!”

파란색 사원증을 차고 있는 무리에서 나오는 환호성에 호은은 슬며시 다가갔다. 각자 핸드폰으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에 총 열 명의 사람이 특별팀으로 구성되어 내일 현장을 나가는 것 같다. 호은은 궁금증을 찾지 못하고 가이드 무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하지만, 저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사원들은 호은이 차고 있는 노란색 사원증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인턴사원이면 이번 임무는 해당하지 않을 텐데.”

“아는 사람이 있나 궁금해서요.”

“뭐 어때. 보여 줘.”

호은 또한 회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회원 가입이 된 상태였지만 인턴사원 신분으로는 일부 게시글이 보이지 않았다. 호은은 가이드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 스크롤을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호은은 핸드폰을 돌려주고 가만히 서 있었다. 가이드 무리는 그런 호은을 이상하게 쳐다보다 자리를 피하듯 금방 떠났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 있다.

도인호의 이름이 있는 걸 확인한 순간 호은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쿵, 쿵. 처음 느껴 보는 불안감이다. 그저 현장에 나가는 것뿐인데 이 불길한 느낌은 뭘까? 마치 복도에 고인 피 웅덩이를 봤을 때처럼 쉽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호은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일은 도인호와 서울에 갈 생각이었다. 아침에는 인천 공항에서 김치찌개 정식을 시켜 먹고 전철 타러 가는 길에 델리만쥬도 먹이고 서울에 가서는 오락실도 갈 예정이었다. 배고파지면 분식집에 들어가 분식을 먹고 오후에는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게 놀다 저녁에는 서울 야경이 보이는 빌딩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도인호에게 자기가 얼마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인호는 내일 호은이 생각했던 장소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아, 아니다. 63 스퀘어 아쿠아리움에 가려고 했으니까 가긴 하는 건가.

“확인했나 보네.”

“담당자님…….”

호은은 자기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호수가 호은을 내려보다 이내 옆자리에 앉았다.

“도인호 살리고 싶었는데 어쩌냐. 반정부 정도면 내일 폭주하고도 남겠네.”

“그걸 막으려고 저랑 도인호 씨 실습 가이딩 파트너로 맺어 주신 거 아니었나요.”

호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금연 구역이라 차마 피우지는 못하고 필터만 잘근잘근 씹었다. 호은의 말에 호수는 조금 전 회의실 상황이 떠올랐다.

‘작전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인질 구출 작전을 끝내고 나서 두 번째는 반정부 동맹이 한국을 공격 못 하게 만들어야죠. 언약 이능력을 가진 자의 결정체로 만든 계약 서류입니다.’

흰색 백지를 흔들며 백우경이 입맛을 다셨다.

‘계약 내용은 해당 시간부로 타이거는 반정부 동맹에 한국을 공격하란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 이를 어길 시 계약 서명을 한 사람은 심장이 멈춘다. 정도면 되겠죠.’

호수는 주먹을 쥐었다. 가이드 공단과 이능력자 협회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안이다. 회의 안건은 백우경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호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능력 있는 가이드는 살릴 에스퍼를 정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선택지에 도인호는 없다. 폭주 직전의 도인호를 살리는 건 네가 죽겠다는 소리와 같은 거야.”

“해 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도인호가 네 가족이냐? 임무 나가서 뒈지든 살든. 네놈이랑 상관없는 놈이다. 너랑 그만큼의 유대감도 없었던.”

“…….”

호은은 호수의 말에 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도인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담당자님 그거 아세요? 영웅은 타인을 구해요. 가족도 아니고 유대감도 없지만. 눈앞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요.”

“네가 영웅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제 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뜻이었어요. 저 백수 시절에 되게 형편없이 살았거든요. 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

“그런데 이제는 알아요.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단단한 호은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빛에 반사된 안광이 반짝거린다. 호수는 호은의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새벽 두 시. 연구소 앞에서 대기라고 했던가…….”

마치 혼잣말이라도 하는 듯 호수는 호은이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호은은 조소당할 걸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비웃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들리지 않을 호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호은은 가이드 워치를 확인했다.

앱으로 본 도인호의 GPS는 처음 보는 장소였다. 인천 지사의 단지이긴 했으나 호은은 가 본 적 없는 거로 보아 가이드만의 공간이 따로 있듯 에스퍼만의 공간이 따로 있는 것 같다.

호은은 숙소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르게 잠옷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넣어 놓고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를 꺼내 놓은 다음 소파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평소 자던 시간이라 이렇게 눈을 감으면 잠이 와야 하는데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치 카페인이 몸에 안 받기라도 한 듯 몸이 긴장한 상태다.

눈을 감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사신이 호은의 뒤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집에서 나가면 너를 뒤쫓을 거라며 겁을 주는 것 같다. 그 서늘함에 소름이 끼쳤다. 호은은 감았던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사신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 1시 40분.

호은은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운동화를 신었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보다 몸은 가벼웠다.

도인호는 숙소에 들어오지 않았다. 호은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연구소를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호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펄럭이는 우비 옷을 보며 호은은 의아한 소리를 뱉었다. 저 사람은…….

호은은 조심스럽게 레오의 뒤를 따라갔다.

“자기야, 가지 마……. 다른 가이드도 많은데 왜 자기가 가? 각인한 가이드는 이런 임무에서 배제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연구소와 가까운 숲속 길. 레오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왜 애처럼 여길 왔어. 그냥 단순한 임무일 뿐이야.”

“뭐가 단순한 임무야!!! 너 바보야? 거기 도인호 있잖아. 그 녀석 능력 쓰다가 만약 폭주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가이드가 어떻게 살아남아!”

호은은 도인호라는 이름이 들리자 귀를 쫑긋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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