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두 사람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네 사람이 반겨 줬다.
“뒤풀이도 할 겸 우리 치킨 먹으러 가요!”
“아 좋습니다. 인호야, 너도 괜찮지?”
“네.”
호은은 도인호와 단둘이 되는 상황을 피했다는 거에 안도했다. 그런 짓을 하고 바로 얼굴을 마주 볼 정도로 뻔뻔하진 못했다. 앞으로 더한 짓을 해야 하는 걸 알지만 실제로 해 보니 부끄러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섯 사람은 김세희의 안내에 따라 인천 지사 안에 있는 치킨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치킨집 내부는 어느 평범한 호프집과 비슷했다. 커다란 스크린 화면이 벽을 차지했고 금요일 저녁 음악 방송이 나오는 채널을 통해 스피커에서는 아이돌 음악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음식이 나오고 미성년자 김세희가 있는 관계로 술 대신 탄산음료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각자 잔에 음료를 따라 건배하며 도인호를 빼고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인 게 분명한 도인호는 살짝 어색해 보였지만 호은은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재미를 도인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술자리처럼 시끄럽고 재미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도인호도 자신에게 질문이 올 때마다 착실히 대답해 주며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 상태로 내일 주말까지 도인호와 알차게 보낸다면 도인호가 조금은 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지? 눈을 반짝이며 호은은 도인호를 쳐다봤다.
도인호는 시선을 내려 호은의 입술을 쳐다봤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호은은 도인호의 미소에 안도했다.
-지지직─
경쾌한 음악 소리가 나던 스피커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렸다. 여섯 사람은 동시에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아이돌이 나오던 화면이 검은색 화면으로 변했다.
‘고장이라도 난 건가?’
호은이 가게 주인을 부르려는 순간 검은 화면에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그들은 전통 탈을 쓰고 한국의 전통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도포와 황금색 자수. 뒤를 돌고 있는 남자의 등 뒤 문양을 보니 호랑이다.
“반정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도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뭔데요?”
김세희가 내뱉은 질문에 다들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는 다섯 사람 중 뒤를 돌고 있던 한 사람이 기괴하게 움직이며 화면 중앙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에스퍼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반정부 타이거입니다. 자, 저희는 지금 정부랑 협상 중인데요. 이걸 정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어서 친히 국민 여러분에게 저희가 알려 드리려고 나왔어요. 브이, 브이. 엄마, 나 텔레비전에 나왔어.
가면을 쓴 얼굴로 자랑을 해 봤자 누구도 자기 자식인지 몰라볼 것 같다. 요란한 동작으로 브이를 하는 사람 뒤에 있던 누군가 나오더니 뒤통수를 한 대 휘갈기고는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아얏, 방금 건 잊어주세요. 가오 떨어지네. 자 여러분! 그래서 저희 타이거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요! 전 세계 에스퍼 협회에 속하지 못한 에스퍼들이 한마음 모아 협회를 쳐부수자고 계획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왜 쳐부수냐? 에스퍼 협회에서 끔찍한 일들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죠. 이걸 공개하는 건 마지막 수단이니 비. 밀♡
-즉당히 해라잉.
-알겠어 알겠어. 두 번은 때리지 망. 진짜 가오 떨어진다고. 자 그럼 대한민국은 저희 요구를 얼른 들어주세용. 아 참고로 우리 뒤에 세계 각국 반정부 동맹이 있다는 사실 잊지 말고요. 하핫♡ 대한민국은 수백 명이 넘는 우리와 싸울지. 아니면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항복할지. 두근두근.
화면이 치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익숙한 건물을 보여 준다.
“어……?”
-자 첫 번째 협상 장소는 63 스퀘어에서 하겠습니다. 만약에 협상이 안 이루어진다면 이곳을 악당답게 쳐부수도록 하겠습니다. 아 맞다. 안에 아직 도망 못 간 사람도 있으니까 인질로 붙잡아 둘게요♡
기분 나쁜 영상은 끝이 나고 다시 음악 방송이 이어졌다.
“방금 뭐죠?”
스피커는 다시 밝고 통통 튀는 음악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노래로 얼어붙은 긴장감을 깨트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호은이 조심스럽게 도인호를 쳐다봤다.
“한국에도… 반정부 에스퍼 집단이 있다는 걸 알지만 내부 기밀 건이라… 자세한 건 관련 부서만 알 겁니다.”
그 순간 테이블에 놓인 도인호의 핸드폰에 전화가 울렸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도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은이 자신도 모르게 도인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디가?”
“임무입니다. 아, 아무래도 방금 방송 실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도인호의 전화를 시작으로 란과 김한슬의 핸드폰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자리는 순식간에 파장되었다. 가이드 세 사람만 남겨진 테이블. 김세희는 식은 치킨을 젓가락으로 괴롭혔다. 류윤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유언장. 이번에 사용되는 건 아니겠죠.”
“목숨값 1억 원. 다시 생각해 보니 적은 것 같아요.”
김세희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류윤재는 겁먹은 듯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걱정하고 있을 때 호은은 도인호가 나간 출입문으로 시선을 줬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
호수는 긴급회의가 열린 회의장으로 가기 위해 가이드 공단으로 이동했다. 가이드 공단 정문에는 조금 전 급하게 호수를 부른 직원이 서 있었다.
“차장님!”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의 목에는 호수와 같은 파란색 사원증이 채워졌으며 사월이라고 네임이 적혀 있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사월은 호수의 등을 떠밀며 급해요! 빨리라고 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덩달아 빨라진 걸음으로 회의장으로 향하며 호수는 사월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짧게 들었다.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에스퍼 협회에서는 이사급까지 다 나온 상태예요. 가이드 공단은 이사장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고…… 다들 차장님만 기다리세요.”
“도인호 이야기는 뭐야?”
“전달해 드린 내용 그대로예요. 에스퍼 협회장님이 도인호 에스퍼의 결정체 회수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하아.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회의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원형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호수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걸 멈췄다. 몇 군데 비어 있는 자리를 확인한 호수가 자신의 지정석에 앉자 호수의 정면에 앉아 있는 남자가 회의장 안을 둘러본다.
“이걸로 다 모인 것 같군. 이번에 모인 이유는 반정부 통칭 ‘타이거’가 우리와의 협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거. 호수는 들리는 이름에 눈썹을 까딱였다. 뒤쪽 탁자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이 노트북을 만지자 각자 앉은 자리에 놓인 화면에서 영상이 재생됐다.
한국 전통복을 입고 전통 탈을 쓰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 한국 반정부 타이거의 특징이었다.
오래전부터 각 국가에는 에스퍼 협회를 인정하지 못하는 에스퍼들이 있었고 그들은 정식 소속을 버린 채 정부를 부정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연스럽게 반정부가 되었다.
에스퍼들과의 전쟁은 핵전쟁 수준을 넘었기에 정부는 최대한 반정부의 요구를 수용해 주고 이는 암묵적인 평화 협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는가?
-총 10명의 가이드를 요구한다. S급 가이드 1명 A급 가이드 2명 B급 가이드 3명 C급 가이드 4명.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와 전쟁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적으로 테러를 시작하겠다.
-또한, 현재 우리는 각 세계 반정부와 동맹을 맺은 상태이므로 우리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전 세계 반정부 연합을 무시한 걸로 판단하여 전쟁을 선포한다.
영상이 끝나고 검은 화면이 된 것과 함께 내부는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협회도 가이드 수가 적은 상태인데 타이거가 요구한 가이드 중 상위 등급의 가이드도 있다.
S급 가이드는 현재 국내에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한 명은 해외 지원 업무를 나간 상태. 협회에서 아무리 전쟁이 무섭다고 해도 가이드를 쉽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료 중에 폭주 위험군이 있는 것 같네.”
호수는 앞에 있는 회의 서류를 의미 없이 넘기며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정부는 반정부에게 가이딩 약을 제공했다. 하지만 약으로는 에스퍼에게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현되는 가이드는 대부분 정부 소속이다.
정부 소속이 아닌 가이드는 이유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아직 발현되지 않아 가이드가 아닌 자들.
그렇기에 반정부에서 가이드 공단 소속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건 어렵다. 반정부 소속이던 에스퍼 중 결국 가이딩 한계를 이기지 못해 정부 소속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흔한 사례 중 하나다. 가이드는 전부 정부에서 독차지한다.
에스퍼 협회에서 반정부 담당 부서가 조사하기를 현재 반정부 에스퍼는 가이드 복지가 좋지 못한 다른 국가에서 불법 가이드를 돈으로 사 부족한 가이딩을 채우고 있다 했다. A급 2명 B급 3명 C급 4명은 함정일 뿐이다. 저들의 진짜 목적은 S급 가이드 1명이다.
“폭주 위험군이요?”
“버릴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거나 특이한 이능력이라 어떻게든 폭주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겠지. 반정부끼리 국가 동맹을 맺었다면 다른 곳도 현재 협상 중일 수 있겠네. 일단 미국 에스퍼 협회장에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회의장에서 가장 어려 보이는 호수였지만 그의 반말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의 뒤에 서 있던 비서가 누군가에게 전화 연결을 했다.
“협회장님. 연결되었습니다.”
호수는 전화를 받는 한국 에스퍼 협회장을 슬쩍 쳐다봤다. 아직 회의 내용에서 도인호의 결정체를 포기한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사월이는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지.’
미국 에스퍼 협회장과 대화하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아직 오지 않은 빈자리에 문득 시선이 간다.
현재 회의는 가이드 공단과 에스퍼 협회 두 곳에서 같이 진행하고 있다. 빈자리 대부분은 가이드 공단 소속이다.
“확인해 보니 다른 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가이드 수가 부족한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전쟁은 가능한 안 하는 거로 가는 게 좋겠죠. 만약 폭주 때문에 타이거가 이러는 거라면 S급 가이드로 폭주를 막은 다음 다시 협상하는 방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협회장의 말에 사람들이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을 얹었다.
“하지만 내일 당장 S급 가이드를…….”
총 3명의 S급 가이드 중 한 명은 해외 지원 업무로 나간 상태이며 계약 기간 내에 한국으로 돌아오긴 어렵다. 다른 한 명은 현재 에스퍼 협회에서 가장 밀어주고 있는 가이드로서 팀 가이드를 하고 있다. 해당 가이드를 보내면 팀원으로 남아 있는 상위 등급의 에스퍼들의 반발이 거셀 테니 일이 복잡해진다.
나머지 한 명은……. 가이드 활동은 안 하고 있으며 현재 가이드 육성 교육을 하는 남자.
“그럼 내가…….”
호수가 말하려는 순간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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