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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9화 (19/129)

19화

“카레. 이거 금방 만들어요.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어요?”

“아뇨…….”

하.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뱉은 도인호가 머리를 쓸어 넘긴다.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어? 비웃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비, 비웃다니.”

“으하. 뭐 비웃어도 괜찮아요. 방사 가이딩은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시간을 좀 색다르게 보내고 싶어서 그랬어요.”

호은의 두 볼이 붉어진 상태로 웃는다. 긴장한 건 호은도 마찬가지였다. 당근을 썰어야 한다는 핑계로 붉어졌을 얼굴을 숙였다.

1차 가이딩 측정 수치는 인턴 세 명 중 가장 낮았다. 도인호는 가이딩 소모량이 많다고 했으니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같이 있어야 할지 몰라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른다. 텔레비전도 없는 도인호의 삭막한 집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같이 밥 먹으며 친해지기 작전이었다. 음식 앞에서 사람은 기분이 좋아진다는 단순한 결론이었다.

-탁, 탁, 탁

호은이 당근을 써는 걸 물끄러미 본 도인호가 커다란 몸으로 호은의 주위를 배회했다.

“도인호 씨. 양파 껍질 좀 벗겨 줄래요?”

“네, 네!”

할 일이 생긴 도인호는 호은의 옆에 서서 수도꼭지 물을 틀었다. 호은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도인호에게 보조 역할을 부탁하며 두 사람은 빠르게 저녁 식사 준비를 끝냈다.

호은이 가져온 그릇에 카레를 보기 좋게 담자 도인호가 그릇을 받아 식탁에 내려놨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도인호가 한입 먹자 호은이 기대에 찬 눈으로 쳐다봤다.

“맛있죠?”

입 안에 음식이 있는 도인호는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다 대신 답했다. 사르륵, 호은의 두 눈이 접힌다.

“도인호 씨 한국의 정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요?”

“?”

“바로 밥입니다. 한국의 정 하면 밥! 나 지금 도인호 씨한테 정 주고 있는 거예요.”

“아…….”

“그런데 이번 정은 동정이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도인호 씨를 알면 알수록 신경 쓰이고 챙겨 주고 싶어요. 왜 그러지. 저 외동이라 동생도 없는데.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도인호 씨는 가족이 어떻게 돼요?”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흐릿해서.”

“아, 어음. 그러면 형 동생 할래요? 회사 동료긴 하지만 우린 같은 소속도 아니고. 이렇게 의지할 사람 만들어 두는 거 좋잖아요. 맛있는 밥 차려 주는 형이 생기는 거라고요.”

“저 같은 동생도 괜찮다면…….”

“도인호 씨 같은 이라면 귀여워해 주고 싶은 동생이죠. 그럼 형이라고 불러요. 저도 ‘인호야.’라고 이름 부를 테니까. 서로 말도 놓고!”

“……마, 말은 나중에 놓도록 하겠습니다.”

“음. 바로 말 놓기 어려운 사람도 있기는 하죠. 편해지면 말 놔요.”

“알겠습니다.”

“그래 인호야.”

호은이 쿠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도인호는 호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저를 들었다. 나중에……. 언젠가 말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아니 그럴 만한 시간이 자신에게 있을까. 우울한 생각이 도인호를 덮었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호은이 먼저 말을 떼는 구도의 대화가 시작됐다. 그런 그의 모습에 도인호는 지난번 케이크를 먹었을 때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방사 가이딩으로 인한 안정감인가? 아니면 호은이 말한 정 때문이라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이 꽃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꽃을 식탁에 내려 둔 걸 알아챈 도인호가 처음으로 먼저 질문을 했다. 호은은 활짝 핀 꽃을 보며 과제라고 답했다.

“직접 가이딩 연습용 과제인데. 내일까지 버티려면 방사 가이딩도 계속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

호은의 대답과 함께 가이드 워치에서 진동이 울렸다.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가 20% 달성했다는 알림이다. 호은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다. 조금 더 편해진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 갔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저녁에도 식사를 같이했다. 식탁에는 못 보던 화병이 있었다. 내용물은 비어 있었으나 호은은 곧바로 그 용도를 알아채고 가져온 꽃 다섯 송이를 화병에 꽂았다.

꽃 한 송이 과제가 끝나자 다음 날 과제는 꽃 다섯 송이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두 사람의 저녁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자리 잡혔다.

세 번째 저녁 식사. 테이블 위에는 꽃다발이 화병에 자리 잡고 있었고 채소를 써는 호은의 칼 소리가 주방에 퍼졌다.

고요한 도인호의 집이 저녁 시간만 되면 소란스러워졌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부터 두 사람의 편안해진 대화 소리. 호은을 도와주던 도인호는 식탁에 놓인 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다발이나 되다 보니 근처에만 가도 향긋한 향이 난다. 꽃향기를 맡던 도인호는 호은 모르게 한 송이를 꺾었다. 꺾인 부위는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꽃이 폈다. 도인호가 들고 있던 꽃은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내일… 직접 가이딩 날이네요.”

“그러고 보니까. 너 원래 되게 바쁘지 않아? 임무가 없어서 직접 가이딩할 기회가 없었네.”

호은의 말에 도인호는 시든 꽃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결정체를 노리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호은에게 방사 가이딩을 받은 이후부터 쭉 임무가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과 같은 가이딩 소모를 조작하기 위한 이능력 훈련 같은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마치 폭풍이 오기 전 맑은 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이번 주말까지 쭉 없었으면 좋겠다. 외출 나가면 너랑 갈 때 엄청 많거든.”

“…….”

도인호는 답하려던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도 모르게 기대된다고 말할 뻔했다.

‘기대 같은 거 해 봤자 의미 없잖아.’

거실 테이블에 캘린더가 놓여 있다. 폭주 날짜를 확인하며 도인호는 두 눈을 감았다. 7월 30일. 만으로 20세가 되는 나이다.

‘그날 내 옆에는 당신이 없겠지.’

도인호는 핸드폰을 보고 있는 호은을 눈으로 담았다.

“이것 봐 봐. 크레페 디저트 카페도 있다.”

도인호는 호은을 쳐다본 걸 들키지 않게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

금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호은은 평소와 다른 기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최근 며칠 동안 도인호와 저녁을 먹으며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어제저녁엔 왜인지 가라앉아 보이는 도인호였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매일 같이 맛있는 저녁을 먹이다 보면 다음에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려던 작전이었다. 하지만 자신만 맛있게 먹고 도인호는 입맛에 안 맞았던 건 아닐까 뒤늦게 의구심이 들었다.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설마 오늘 파트너로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호은은 출근 준비를 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먼저 나와 있던 건지 도인호가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까 했던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굳어 있는 표정이다.

빙판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주먹에 땀이 살짝 고이는 것 같다. 호은은 열심히 도인호를 탐색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어? 직설적으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봤던 도인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혹시 자다가 악몽이라도 꿨나? 아니면 급하게 준비하다 새끼발가락을 벽에 찧었다든가. 하지만 이내 도인호의 얼굴을 떠올리면 전부 어울리지 않아 각설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럴 만한 이유는…….’

오늘 직접 가이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싫나. 아니면 긴장되나?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어느덧 두 사람은 지하 훈련장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평소보다 조금 더 떠들썩한 내부다. 지금 보니 사람 수도 평소보다 많다.

“안녕하세요.”

호은이 인사하며 들어가자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답인사가 들려왔다. 맨 처음 눈에 띄는 건 김세희를 껴안고 있는 한 여자다. 김세희보다 살짝 큰 키로 짧은 붉은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형의 여자가 경계하듯 호은과 도인호를 쳐다본다.

“어……. 이쪽은 제 파트너로 온 에스퍼 도인호 씨 입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호은이 먼저 나서서 도인호를 소개했다. 이걸 계기로 모두 각자 파트너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제 파트너인 란 씨예요. 이능력은 애니멀! 되게 귀여워요.”

김세희의 말에 란이라고 불린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손을 까닥하며 인사했다. 화려한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인상의 란이 짐승과 교감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나저나 애니멀 이능력은 교감이라는 걸까? 애니멀로 변할 수 있는 걸까? 애니멀로 변한다면 한번 보고 싶다. 호은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란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에스퍼 김한슬입니다. 이능력은 신체 강화예요.”

강아지처럼 살짝 처진 눈꼬리에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다. 흑발의 긴 머리카락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청순한 느낌을 들게 했다.

두 사람 모두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류윤재는 김한슬의 옆에 서서 볼을 살짝 붉힌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류윤재도 키가 큰 편인데 김한슬 또한 키가 크다. 뭔가 동생과 누나처럼 보이기도 하고. 호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김한슬의 인사를 받았다.

“취향 참 한결같네.”

뒤에서 들리는 미성의 목소리에 호은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평소라면 기본 10분은 지각하던 호수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일찍 왔다.

호수는 지휘봉으로 목을 툭툭 두드리며 누군가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싱긋 웃고 있는 김한슬이 보였다. 호은은 이내 성격 나쁜 호수가 괜한 사람을 잡는다고 답을 내렸다.

“자. 오늘은 직접 가아딩을 에스퍼와 함께 측정하는 날이다. 오늘 측정까지 끝이 나면 너희들의 등급이 D에서 올라가겠지. 각자 자신이 받은 등급에 따라 인턴 기간에 실습할 팀이 정해진다. 각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는 팀에서 남은 인턴 생활하려면 측정 결과가 잘 나와야겠지?”

“세희야. 언니가 꼭 높은 등급 나오게 해 줄게.”

호수의 말이 끝나자 란이 김세희의 팔짱을 끼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태까지 각자 파트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 몰랐는데 생각보다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 보였다. 호은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도인호를 흘끔 쳐다봤다.

“가이딩 측정은 연구소에 가야 하니 따라와라.”

호수가 앞장서서 걷자 여섯 사람이 그의 뒤를 쫓았다.

“안오혁 선배가 방해해서 파트너 못 구할 줄 알았는데. 구하셨네요?”

“저도 오늘이 꿈만 같네요. 측정 결과 0%는 피했습니다.”

“흐음.”

옆구리를 푹 찌르며 김세희가 호은에게 말을 걸었다. 애초에 안오혁이 싫어하는 도인호를 건드려 지금 이런 사달이 난 거지만 설명하다 혹시라도 도인호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돌려 말했다.

다행히도 김세희와 류윤재는 도인호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것 같다. 혹시라도 무례한 행동을 할까 봐 온몸을 곧추세우고 있던 호은은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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