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호은은 가이드 워치를 확인했다.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 이건 능력을 쓰고 있다는 뜻인데.
새로 업데이트된 가이드 워치는 담당 에스퍼의 위치도 확인이 가능했다. 메뉴를 눌러 확인하자 놀랍게도 도인호는 같은 건물에 있었다. 서둘러 1층 안내 데스크로 찾아간 호은은 도인호의 이름을 대며 어느 훈련장에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더니 2층 A-5 관을 안내했다.
호은은 엘리베이터가 아닌 중앙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 복도를 걸어가자 굳게 닫힌 A-5 관 철제문이 보였다. 방음이 잘 되어 있기에 문 바로 앞으로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왼손에는 꽃을 쥔 채 오른손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진 건 뜨거운 열기였다. 그리고 눈앞에 푸른색 불꽃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었다. 폭죽에 시선이 빼앗겨 잠시 멈췄지만, 다시 훈련장으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열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쿠과쾅!
귓가에 크게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뜨거운 바람이 호은이 서 있는 쪽으로 불었다. 심장 박동이 점점 거세진다. 아까 전 스크린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무장한 군인들을 쓸어 버리던 사람. 마을 하나를 없애 버리던 사람. 누군가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에스퍼들이 스쳐 지나간다.
호은은 걸음을 멈췄다. 열기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온다.
-삑, 삑, 삑, 삑
가이드 워치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손목으로 시선을 주자 워치가 적색으로 깜빡깜빡하며 숫자 10%가 커다랗게 화면에 나타나 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가슴팍이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색 머리카락. 묘하게 계속 쳐다보고 싶은 노란색 눈동자. 근육으로 다부진 상체. 그리고 시선을 더 내리자 푸른 불꽃을 피우는 손이 보였다. 호은의 시선이 닿자 불꽃을 화르르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삑, 삑, 삑, 삑
호은은 오른손을 들어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흠칫 놀라 빼려는 그의 손을 순식간에 깍지를 끼며 행동을 제지했다.
호은은 눈을 감았다. 잡은 손이 따듯하다.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온기가 느껴질 리 없다.
‘이능력자는 사람이 아니다. 괴물이지.’
호수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하지만 담당자님 보세요. 괴물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털도 이상한 감촉도 없잖아요. 그저 굳은살이 박인 손. 잡으면 따듯하고 투박한 손가락 마디가 길어 내 손과 꼭 맞는.
“역시 그냥 도인호잖아.”
시끄럽게 경고음을 내던 워치가 조용해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녹아내렸다. 눈앞에서 마주한 진실은 알고 있던 사실이다.
도인호의 푸른 불은 호은을 위협하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다. 훈련장을 가득 채운 불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은이 구하고 싶은 건 괴물이 아니다.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누군가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는 도인호 그 자체를 도와주고 싶은 거다. 그리고 도인호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다.
호은이 왼손에 쥐고 있던 꽃이 활짝 피었다.
“왜 어제 방사 가이딩 받으러 안 왔어요?”
호은의 물음에 도인호는 의아한 얼굴로 두 눈만 깜빡였다. 마치 정말 가이딩해 주려고 했던 거냐 묻는 것 같아 따지려던 것을 멈췄다.
도인호의 사정은 뻔히 알고 있다. 자존감은 바닥에다 자기 비하가 심한 남자. 그는 모든 가이드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호은은 조금 전 봤던 푸른 불꽃을 떠올렸다. 하기야 그런 이능력이 폭주한다고 생각하면 무섭긴 하다.
이능력만 위험한가 가이딩 또한 까다로운 에스퍼다. 그래서일까. 도인호는 어쩐지 거절당하는 게 익숙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호은은 도인호의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뒤에서 누군가 건들기라도 하면 바로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저녁에 도인호 씨 숙소 찾아가도 되죠?”
이번엔 꼭 방사 가이딩해 줄 테니까. 호은의 말에 도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 같은 거 호은이 귀찮다면 안 해 줘도 상관없는데. 거절은 그에게 익숙하다. 오히려 호은처럼 다가오는 사람이 드물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천성이 착한 사람. 호은은 도인호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선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 같은 녀석에게 친절한 거겠지.
찰박, 찰박.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눈을 맞추고 있던 두 사람은 훈련장에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물에 젖은 발소리인데, 훈련장 바닥은 메말라 있었다.
도인호가 폭죽을 터트리듯 사용한 이능력이 만든 자욱한 연기 사이로 보이던 인영이 점점 가까워진다.
“뭐야. 가이드?”
연기가 사라지고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노란색이다. 노란색 장화와 노란색 우비. 그리고 노란색 우산. 남자는 비에 젖은 듯한 모양새로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호은의 주위를 돌며 실실 웃었다. 마치 신기한 걸 봤다는 듯한 모양새다.
남자의 행동을 멈추게 하려는 듯 도인호는 호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어 자신의 뒤로 숨겼다.
“대리님 그만하시죠.”
“뭐야. 왜 숨겨? 나 각인한 가이드 있거든?!”
도인호의 행동에 남자는 소리를 빽 질렀다. 호은은 고개를 옆으로 빼 도인호의 어깨 사이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호은을 보고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안녕. 인턴사원이야? 내 이름은 레오야.”
레오는 인사를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활짝 펼친다. 우산에 묻어 있던 물방울이 뺨에 닿은 순간 쏴아아 하고 비 내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천장은 틀림없이 막혀 있다. 어떻게 훈련장에서 비가 내릴 수 있지? 호은이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빗줄기를 느꼈다.
“내 이능력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어.”
차갑다. 손바닥에 닿은 물방울이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는데 젖지 않았다.
천장으로 시선을 올리자 훈련장 전체에서 내리는 비는 호은과 도인호의 주변에만 내리지 않았다. 오른쪽에 열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도인호의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호은은 내렸던 시선을 위로 올렸다. 도인호에게 닿기 직전까지 비는 분명 내리고 있다. 하지만 빗방울은 두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도인호의 이능력으로 빠르게 증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난 그만 치시죠.”
“장난 아니고 자기소개. 그래서 우리 인턴 가이드님은 에스퍼 훈련장에는 왜 온 거야? 가이딩 수치가 부족한 애인 걱정됐나?”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레오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호은은 당황한 목소리로 애인 같은 건 아니라 해명했지만, 레오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은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듯 도인호의 앞으로 나오자 레오는 호은이 쥐고 있는 꽃을 발견했다.
“아아. 알겠다. 두 사람 실습 가이딩 파트너구나? 아 그립다. 나도 4년 전에 말이야.”
갑자기 옛 추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주저리 말을 꺼내려는 레오를 보며 도인호는 익숙하다는 듯 무시하고 호은을 훈련장 문 앞으로 데려갔다.
“한번 말 꺼내면 끝이 없어서요.”
도망가려면 지금 밖에 없습니다. 단호한 도인호의 목소리에 호은은 의외라 생각했다. 같은 에스퍼 앞에서는 평소의 움츠려 있는 도인호가 아닌가 보다.
레오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눈인사하며 호은은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레오는 호은이 나간 줄도 모르고 혼자만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말을 끝내고 웃느라 감았던 눈을 뜨니 무표정의 도인호만 레오 앞에 있었다.
“뭐야. 언제 갔어?”
“…….”
레오의 물음에 도인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 척했다. 레오가 아쉽다는 듯 펼쳤던 우산을 접자 사납게 내리던 비가 멈췄다.
“연습 이어서 하시죠.”
“아 됐어. 솔직히 너도 눈치 깠지? 이번 훈련 위에서 까라 하니까 진행한 거지. 무슨 목적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의미 없는 훈련은 나도 사절이야.”
“…….”
“뭐 너랑 하는 훈련은 재미있긴 한데. 같은 에스퍼 가이딩 퍼센트 떨어트리려고 하는 짓은 나도 찝찝하고. 하. 나 지금 좀 멋지다? 가정이 생기니까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 도인호 인마. 너도 애인한테 잘해 줘.”
“그런 거 아닙니다.”
도인호는 미안해하는 레오의 말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능력 훈련이라니. 목적이 뻔히 보이는 상부의 명령이라 예상하고 훈련장에 들어왔다. 호은이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비가 내려서 그런지 훈련장 안은 습했다.
“저 그럼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어어. 가.”
이능력을 쓰게 되면 가이딩 퍼센트가 떨어진다. 그럼 호은이 가이딩할 때 힘들 거다.
‘왜 어제 방사 가이딩 받으러 안 왔어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어보던 호은이 떠올랐다.
나한테 실망했으려나.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건 도인호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호은이 보여 줬던 표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분노와는 달랐다. 기분이 나빠 보이긴 했지만 슬퍼 보이기도 하고. 걱정한 건가.
‘아니, 나 같은 걸 걱정할 리 없지.’
오늘따라 유난히 훈련장이 습하고 더웠다. 숨쉬기 답답했다. 원래라면 상부에서 가이딩 소모를 원했으니 레오의 거절이 아니라도 혼자 이능력 훈련을 진행했을 거다.
도구는 생각을 가질 필요 없다. 바다에 떠다니는 주인 없는 튜브처럼 파도가 물결치는 대로 휩쓸리면 되는 거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대로 훈련을 진행하면 권호은이 걱정한다. 착하고 오지랖이 넓은 권호은이.
훈련장을 벗어난 도인호는 체력 단련장에 갔다. 훈련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능력이 아닌 몸을 쓸 수 있는 훈련으로 대체했다.
시간을 채우고 도인호는 숙소에 도착했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시간은 어느새 저녁 6시가 넘어가 있었다. 평소 일정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뿐인데 심장이 묘하게 빠르게 뛰는 것 같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수건으로 말리며 소파에 앉자 조용한 공간을 시계 초침 소리가 정적을 깨워 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 화면은 권호은으로 가득 찼다. 도인호의 발걸음이 훈련장을 벗어났을 때처럼 빠르게 움직여 문을 열었다.
“밥 먹었어요?”
“아, 아니요…….”
“잘 됐다. 그럼 도인호 씨 주방 좀 써도 되죠?”
호은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도인호는 쇼핑백을 대신 들어 주며 주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쇼핑백에는 음식 재료가 있었다. 양파, 당근, 감자, 고기 팩. 본인 주방에서 가져온 건지 도마와 칼 같은 주방용품도 같이 들어 있었다.
“도인호 씨랑 저녁 같이 만들어 먹으려고요. 재료 보니까 어떤 건지 감이 오시죠?”
예상 못한 카레 가루 팩의 등장에 도인호는 당황한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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