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아무것도…….”
“그럼. 주말에 나랑 놀아요.”
호은은 분노를 삼키며 애써 밝게 웃었다. 솔직히 웃음이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인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이 죽어야 할 날을 알고 죽고 나서야 존재 의미가 완성된다는 소리를 들은 도인호에게 자신의 몇 마디로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호은은 여전히 도인호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줄 수는 없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호은이 심어 주는 게 아닌 도인호 스스로가 해야 한다.
조금 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타인과 공유하다 보면 그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 관문인 가이딩 실습 상대로 도인호를 끌어들인 건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다. 두 번째는 우물 안에 갇힌 도인호를 우물 밖으로 꺼내는 거다.
“호, 호은 씨는 원래 그, 그렇게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신가요?”
제안을 가만히 듣던 도인호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카로운 인상과 무표정을 짓고 있으니 험악한 분위기가 자동 생성되었지만 더듬는 말투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니. 그. 뭐냐. 징계받은 게 저 때문이잖아요. 저 이렇게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 보답도 할 겸 해서요.”
“징계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네? 잠깐만요. 아니, 사람이 그렇게 손해 보면서 살면 안 됩니다? 여기 인적 사항 보니까 이제 스무 살이네. 한창 재미있을 나이인데. 밖에서 그 나이대 사람들이 뭐 하고 사는지 좀 보고 그래요. 아무튼, 주말에 저랑 노는 겁니다!”
지난주에 먹은 딸기 같다. 도인호는 호은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딸기를 떠올렸다. 저러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도인호는 느리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호은이 하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와 같이 있는 건 싫지 않다. 나중에 호은이 자신과 같이 있던 시간이 아까웠다며 후회한다면 모를까.
“오케이 약속 무르기 없기!”
도인호는 웃으며 좋아하는 호은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누군가를 저렇게 미소 짓게 만들 수 있구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있으면 화난 표정을 짓는다. 불쾌함, 경멸. 이것보다 취급이 나은 건 권태로운 무표정이다. 그런데 눈앞에 남자는 자꾸만 웃는다.
권호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손바닥이 간지럽다.
“원래 그렇게…….”
-삐빅
자신을 부르는 호출 신호에 도인호는 말하려던 걸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다. 호은이 누구의 앞에서 웃던 그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일 텐데. 도인호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닫혔다.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는 도인호는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이상한 사람이네.’
호은은 사라진 도인호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숙소로 돌아갔다.
***
현관문을 열자 여름 특유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집안이 평소와 다른 느낌이다.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누워 있는 호수가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든다.
“뭐 하세요?”
“보면 몰라? 누워 있잖아.”
“아니…….”
호은은 뭐가 문제인지 설명하려다 멈췄다. 저 남자는 애초에 말이 안 통했지. 여기서 말해봤자 자신의 입만 아플 뿐이다.
호수는 시시각각 바뀌는 호은의 표정에 코웃음을 쳤다.
“넌 포커페이스 좀 배워야겠다.”
“네?”
“가이드 워치 업데이트시키느라 잠깐 왔어.”
“업데이트요?”
“인턴 가이드 워치는 이능력자의 가이딩 퍼센트를 볼 수 없으니까 특별히 네 워치에만 기능을 업데이트했지. 앞으로 도인호 가이딩 퍼센트가 보일 수 있게 말이야.”
“아…….”
“평소에 방사 가이딩으로 20%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따로 임무가 있다고 하면 그땐 직접 가이딩으로 50% 이상은 채워서 보내고. 폭주를 앞당기려고 하는 걸 보니 임무도 조작할 가능성이 커서 말이지.”
“제가 직접 가이딩으로 50%까지 할 수 있을까요?”
“최대치로 잡아서 50%이긴 한데.”
호수는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호은은 자신이 1차 측정 결과에서 108%라는 수치가 나왔다는 걸 모른다. 가이드 워치는 호은의 방에 있어 사실을 말해 줘도 상관없었으나 호수는 구태여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보통 일반적인 가이드라면 도인호를 감당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지난번에 봤던 호은의 가이딩과 이번 1차 측정 퍼센트를 생각한다면 이론상 가능했다. 호은의 가이딩 양은 도인호를 감당할 수 있다.
이제는 그 가이딩 양을 본체가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는가인데.
옷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제법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진 호은이다. 자세한 건 벗겨 봐야 알겠지만 제법 오래전부터 관리된 몸이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것 같다.
어렸을 때 운동을 했나? 옷을 벗기면 탄탄한 근육이 호수를 반겨 줄 것 같다. 호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호은의 앞에 섰다.
호은의 가슴과 팔 허벅지를 거리낌 없이 만지자 감탄하자 호은이 뒷걸음질 친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응. 몸 만지고 있는데.”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뭐 내일 체력 검정을 치게 되면 알게 되겠지.”
호수는 호은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외관상으로는 선한 미소지만 호수의 괴팍한 성격을 알고 있는 호은이 보기에는 악마의 웃음일 뿐이다.
호수는 호은의 방을 가리키며 가이드 워치는 저쪽에 있다며 알려 줬다. 다시 말없이 사라지려는 것을 눈치챈 호은이 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요. 이거 하나 대답해 주고 가세요.”
“뭐?”
“당신은 도인호의 결정체를 회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하셨죠.”
“응.”
“그럼……. 만약 제가 도인호의 폭주를 막게 된다면. 도인호를 살게 만든다면……. 그땐 결정체 회수는 어떻게 되는 거죠?”
“폭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결정체를 회수하는 건 불가능해. 그런데 너. 평생 도인호의 폭주를 막아 줄 자신 있어?”
“평생?”
“이능력자와 폭주는 항상 붙어 있는 거야. 너 도인호 살려서 그놈의 인생을 죽을 때까지 책임질 수 있어? 내가 말했을 텐데. 결정체 이식한 몸은 가이딩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다고.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녀석의 옆에서 평생을 책임질 수 있겠어?”
“그건…….”
“그러니까 함부로 이능력자를 동정하면 안 돼.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직 너는 모를 거다.”
그렇게 대답한 호수는 어딘가 지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방 가면이라도 쓰듯 입꼬리를 올리며 호은에게 잡힌 팔을 내쳤다.
“자, 이 작은 머리통으로 열심히 고민해 보라고.”
혀를 내밀며 놀리는 표정을 지은 호수는 날개 귀걸이를 매만지더니 바람만 남기고 사라졌다.
“평생을 책임질 수 있냐고……?”
차가 다니는 도로에 자각 없이 건너려는 아이를 붙잡아 멈추게 한다. 비 내리는 날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 준다. 물건을 떨어트린 사람을 도와 같이 주워 준다.
호은이 여태까지 해 왔던 선의는 무게가 가벼웠고 일회성이었다.
선의는 쉽다. 베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집과 학교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호은이 도인호를 살리려는 마음도 이런 작은 선의다. 호수의 말처럼 무거운 무게 따윈 없다. 지금은 눈앞에 죽을 사람이 있다고 하니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든 거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놓인 가이드 워치를 들어 바뀐 걸 확인하자 방패 모양의 애플리케이션이 새로 생겼다. 해당 앱을 누르자 도인호의 이름과 숫자가 떴다.
가이딩 수치 21%.
이건 게임이 아니다. 저 퍼센트를 100으로 만든다고 클리어되는 게임이 아니란 소리다. 왼쪽 손목에 가이드 워치를 찼다. 익숙해진 탓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던 워치였는데. 오늘만큼은 족쇄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
실전 교육 2일 차가 됐다.
건물 앞에서 운 좋게 만난 인턴 세 사람은 같이 훈련 건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의 인턴 사원증을 확인한 안내원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체력 검정으로 인하여 훈련복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한다.
1층 오른쪽 복도에 탈의실이 여자 남자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여 세 사람은 각자 쇼핑백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훈련복은 평범했다. 검은색 반 팔 티셔츠와 허리를 잘 잡아 주는 밴딩의 긴 바지. 윗도리와 아랫도리 모두 알파벳 G가 새겨져 있다. 운동화는 화이트 톤에 포인트로 하늘색이 섞여 있었다. 발 사이즈에 딱 맞아서인지 착용감이 편했다.
로커에 입었던 옷을 잘 정리하고 나오자 여성 탈의실에서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김세희가 두 사람과 같은 차림새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세 사람은 인공 잔디가 깔린 건물 뒤쪽 운동장으로 갔다. 스트레칭 및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호수가 느린 걸음으로 세 사람 앞에 섰다.
“몸은 알아서 푼 것 같고. 체력 검정 안내문에 나간 순서대로 진행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호수는 자신이 할 말만 내뱉었다. 호은은 혹시 몰라 들고 온 체력 안내장을 꺼냈다.
[1.5km 달리기 - 윗몸 일으키기 – 팔 굽혀 펴기 - 턱걸이]
가장 먼저 1.5km 달리기가 시작됐다. 얼굴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쓴 호수가 스톱워치를 누르며 시작 신호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출발 소리가 들리자마자 호은은 뛰었다. 순식간에 류윤재를 제치고 선두로 달렸다.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뛰는데 그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뒤에서 호은의 뒷모습을 보며 뛰던 두 사람은 전혀 생각도 못 한 호은의 달리기 실력에 놀랐다.
“권호은 3분, 류윤재 6분 15초, 김세희 7분 30초.”
1.5km 달리기가 끝나고 순서대로 윗몸 일으키기, 팔 굽혀 펴기, 턱걸이 테스트를 이어서 했다. 적당한 휴식 시간을 주긴 했지만 뜨거운 햇빛 아래 인턴들은 지쳐 가기 시작했다. 하필 옷은 왜 검은색인지. 빛이 그대로 통과해 몸이 금방 뜨거워지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간다.
그들 중 상태가 좋은 건 호은 혼자였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맞는지 땀도 덜 흘리고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1분 윗몸 일으키기에서도 빠르게 100개를 채우더니 같은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류윤재는 자신 또한 농사를 지으며 체력에서 밀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호은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체력이 괴물 같았다.
드디어 길고 긴 체력 검정이 끝나고 한여름에 고생한 인턴 세 사람에게 호수는 시원한 냉수를 하나씩 건넸다.
“이걸로 오전 체력 검정은 끝났다. 2시간 휴식 시간 줄 테니 각자 몸 정리하고 훈련장으로 와.”
호수는 그 말을 끝으로 돌연히 세 사람 앞에서 사라졌다.
호은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저 사람 자기 발로 제대로 걷기는 하는 건가? 속으로 혀를 차며 류윤재와 같이 탈의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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