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담배 냄새를 잔뜩 묻혀온 호수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호수는 들어오자마자 호은의 가이딩을 재측정하는 척했다. 결과지조차 출력하지 않고 안타깝다는 태도로 호은에게 18%라고 말했다.
자신의 퍼센트가 낮다는 걸 들은 호은은 아무렇지 않았으나, 가증스러운 태도로 낮게 나와서 어떡하냐 걱정하는 호수의 모습에는 저 양반이 미쳤냐며 경멸했다.
호은에게는 1차 결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2차가 문제지.
호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김세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호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알려 준 거다.
자신이 골절시킨 안오혁이 현재 인천 지사에 있는 에스퍼들에게 경고하고 다녔단다. 권호은이라는 가이드의 실습 상대가 되는 에스퍼는 안오혁 패거리에게 찍히게 될 거라며 말이다.
도인호를 실습 상대로 데려가는 것이 무산됐기에 에스퍼를 구해야 했는데, 이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에스퍼를 데려와서 하는 2차 측정을 못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상대 에스퍼가 없으니 0%인 걸까? 안오혁 그놈 입을 때려 줘야 했는데! 그랬으면 음식 먹을 때마다 불편해지고 아주 인생이 지옥이었을 텐데 말이다.
‘안오혁 마주치기만 해 봐…….’
혼자 무엇과 싸우려는지 활활 타오르는 호은의 사념을 깨우듯 호수가 입을 열었다.
“자.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한다. 뭐 별거 안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일 체력 검정이 있을 예정이니 오늘 하루 푹 쉬고 내일 좋은 실력 보여 줄 수 있게 다들 체력 잘 보충하고 와라.”
호수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A4용지 두 장을 세 사람에게 건넸다. 첫 번째 장은 체력 검정이 어떤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적혀 있는 것이었고 두 번째 장은 가이딩 실습 신청서로 에스퍼가 작성하는 거로 보이는 용지였다.
“금요일에 있을 실습 상대 고른 사람도 있고 못 고른 사람도 있겠지? 시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빨리 결정하도록. 아직 못 고른 사람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 이능력자 명단 줄 테니까 필요한 녀석은 남아서 받아 가라.”
마치 구원의 밧줄이라도 내려온 것처럼 호은은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실습을 도와줄 수 있는 에스퍼 명단.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지사 내부를 돌아다니며 에스퍼들에게 제발 도와 달라고 입 아프게 말하고 다닐 필요 없이 명단에 있는 에스퍼만 골라서 부탁하면 된다.
밧줄을 잡기로 결정한 호은은 모두가 훈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남아 호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단 주세요.”
“흐음. 세 명 중에 너만 상대를 못 구했나 보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뭐. 그 사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이 녀석은 내 말에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놈이라 꼭 해 줄 거야.”
“정말인가요? 지금 저랑 하는 건 다들 안 내켜 할 텐데.”
“아. 상관없어. 어차피 자기 편도 하나 없는 놈이라 너랑 딱 맞거든.”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일단은 참았다. 2차 실습을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호수는 말아쥔 주먹이 부들거리는 호은을 슬쩍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얼른 주세요.”
이를 악물고 호은이 말하자 호수는 지휘봉을 들어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호은의 앞에 나타났다. 손을 뻗어 종이를 잡고 이름을 확인하자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인호……?”
도인호의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를 멍하니 보던 호은은 철제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실습 상대는 못 해 준다며 두 번이나 거절을 한 도인호가 호은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지금 내가 지어야 하는 표정이거든?’
호은의 썩어 가는 표정을 보며 호수가 재미있다는 어깨를 들썩였다.
“크흠. 자 서로 인사해야지?”
어딘가 얄미운 표정의 호수가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누가 봐도 웃고 있는 모습이다. 당황한 호은이 호수에게 따지려고 하자 눈앞에 위협적으로 휘둘러지는 지휘봉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자 먼저. 이것부터 치우고.”
호수는 지휘봉을 들어 호은의 가이드 워치를 터치했다. 왼쪽 손목에 있던 가이드 워치가 사라졌다.
“지금부터 은밀한 대화를 해야 해서 말이야. 도청 장치 기능이 들어 있는 가이드 워치는 방해라고.”
호수의 말은 이상했다. 은밀한 이야기라니. 지금부터 가이딩 실습 상대를 소개해 주려고 도인호를 부른 게 아니었단 말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호은만이 아닌지 도인호도 당황한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을 소파에 앉힌 호수는 그들의 앞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지휘봉을 들어 도인호를 가리켰다.
“우선 도인호. 내가 폭주 날짜까지 얌전히 있으라 했지.”
“…….”
“가이드와 다퉜던 일이 징계 위원회에 접수되어 징계가 내려졌다. 처벌은 공식적인 가이딩 금지 및 약물 처방 금지.”
처음 듣는 도인호의 징계 소식에 호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인호가 가이드와 다투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지난번만 해도 가이드 무리가 괴롭히는 걸 당하고만 있어 자신이 도와줬을 정도인데 말이다. 그런 도인호가 가이드와 다퉜다고?
호은의 앞으로 호수가 섰다.
“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찔리는 거라든가.”
“찔리는 게 아니라 이상해서요.”
“안 찔려? 기억 좀 잘해 봐. 예를 들어 가이드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는 이능력자에게 괜한 참견을 했다든가.”
비꼬듯 말꼬리를 잡는 호수를 보는 호은의 머릿속으로 의심이 피어올랐다. 설마 징계를 걸었다는 가이드 무리가 안오혁네 무리인 건가? 가이드끼리의 상해죄는 성립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몸소 보여 주다니.
처벌을 받는 건 가이드인 권호은이 아니라 아무런 상관없는 에스퍼 도인호였다.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흘긋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지만, 도인호는 그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이다. 질책하는 눈초리조차 없었다. 여전히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인호. 나는 너의 결정체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런데 이런 징계를 받으면 예정 날짜 전에 폭주할 확률이 높아. 공식적인 가이딩을 못 하는 이상 내가 나설 수는 없어. 여기서 임무라도 나가게 된다면 지금 남아 있는 약으로는 못 버티겠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리던 호수는 지휘봉을 들어 호은을 가리켰다.
“하지만. 정직원이 아닌 인턴 권호은의 가이딩은 징계와 상관없이 받을 수 있어. 아직 인턴이라 가이딩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무의식중에 풀고 있는 방사 가이딩까진 거기서도 뭐라 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권호은, 너는 도인호를 가이딩할 이유가 있잖아?”
“……!!”
“실습 가이딩 상대로 도인호를 올려 주면 연습 목적으로 직접 가이딩도 가능해.”
“저기 잠시만요. 지금 폭주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가이딩을 해 주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응. 그 뜻인데?”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로 뭐가 문제냐는 듯 굴었다. 호수는 호은이 들고 있던 신청서를 가져와 도인호에게 내밀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계속 던진 호은과 다르게 도인호는 지금까지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신청서를 내밀자 역시나 별말 없이 서명한다. 가이드의 서명도 필요했는지 도인호가 신청서를 호은에게 건넸다.
호은의 손에 들린 신청서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내가 가이딩 실습 상대가 되어 달라고 할 때는 거절하더니……. 정해진 날짜에 죽으려고 이번에는 허락한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했다.
“만약에 폭주 예정일보다 빨리 폭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흐음? 뭐 일단 우리가 준비한 스테이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폭주하게 되면 일반인들도 휘말리게 될 거고. 다른 녀석이 결정체를 훔쳤을 경우 정부 소속인지 아닌지에 따라 사후 처리도 달라지겠지.”
“…….”
“그러니 여러 사람 귀찮게 만들기 전에 깔끔하게 예정일에 폭주하는 게 베스트지.”
“하.”
호은은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어디에도 도인호와 관련된 부분은 없었다. 폭주가 빨라지면 도인호의 몸은 어떻게 되는 건지. 해당 부분은 자연스럽게 배제시킨다.
그들은 도인호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결정체를 가지고 있는 도구로만 생각한다고 했으니 당연한 걸까.
하지만 여기서 호은이 화나는 부분은 도인호에게 있다. 왜 그 취급을 당하면서 가만히 있지? 정말 폭주로 삶을 마감하는 거에 아주 작은 미련도 없는 건가.
호은은 도인호가 어떤 에스퍼인지 모른다. 그리고 에스퍼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살아있는 에스퍼로서도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는 왜 죽어서 도움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걸까.
“왜 설마 못 하겠어?”
호은의 마음속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호수가 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못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 안오혁만 아니었다면 도인호가 아닌 다른 실습 상대를 구했을 거다.
이건 마치……. 도인호 결정체 회수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럽다.
내가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가이드와 에스퍼에 대해 잘 알았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처럼 S등급이었다면. 조금 더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렇게 바보같이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능력자의 목숨은 가이드가 정하는 거거든.’
순간 지난번 호수가 호은에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호은은 가이드로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호수가 말한 것처럼 에스퍼의 목숨을 정할 수 있는 가이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바보같이 호수에게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거겠지만.
하지만 지난번처럼 도인호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도인호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잘못된 죽음은 용납할 수 없다.
“징계 사유는 저 때문인데, 왜 도인호 씨가 피해를 받는지 모르겠네요.”
호은은 신청서에 서명했다. 구겨진 자국이 남은 신청서를 호수에게 내밀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신청서를 받았다.
볼일을 끝내자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듯 호수는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단둘이 남겨진 이곳은 이제 어색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호은이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도인호 씨. 아직도 죽고 싶어요?”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훈련장. 도인호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이었다.
“네. 그게 제가 사는 이유니까요.”
“그 이유 누가 정했는데요? 남이 심어 놓은 이유 말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본 적 없어요?”
“제 생각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생각을 안 하면 나로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랑 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면 안 될까요?”
호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인호를 생각도 못 하는 바보로 만든 인간들을 앞으로 데려와 한 대씩 주먹을 날려도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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