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피어나는 혈향
총관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더니 침대에 척 걸터앉았다.
빙하운은 총관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총관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빙하운을 힐끔거리고는 퉁명스레 불렀다.
“이리 오시오.”
“예.”
빙하운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총관 곁으로 가서 다소곳이 섰다.
정말이지 제삼자가 이 광경을 봤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 일이 아닌가?
총관이 다그치듯 물었다.
“대체 왜 그랬소?”
“무엇을…….”
휙!
총관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빙하운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총관이 손동작을 멈추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야 내가 버릇이 되겠군. 후우, 관둡시다.”
“죄송합니다.”
“뭘?”
“그것이…….”
빙하운이 눈치를 살피자 총관이 냉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이젠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고 습관처럼 내뱉는군.”
“죄송합니다.”
“그게 잘못한 자의 태도인가?”
총관의 눈매가 사뭇 날카로워지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빙하운이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죽을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은 잘 하는군.”
“…….”
“궁주.”
입을 연 총관이 발을 들어 올리더니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있는 빙하운의 뒤통수를 지그시 밟았다.
그럼에도 빙하운은 그대로 얼음 조각이 되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총관이 발을 비벼 밟으면서 말을 이었다.
“어째서 그 둘을 비무시켰나? 궁주 놀이도 적당히 해야 할 것 아닌가? 냉이겸과 한기풍은 둘 다 인지도가 높은 자들이야. 그런데 생사결을 벌이게 하다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인데, 하물며 빙궁의 무인들이야 오죽하겠냐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악사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그리고 백묘와 광풍사 문주는?”
“광풍사 문주와 악사들은 참수시키고, 백묘는 빙마옥에 가둔 상태로 더 지켜보겠습니다.”
“하아. 이래서야 학습 효과가 없군. 내가 말했잖은가? 지렁이도.”
쿵!
총관이 발을 들더니 뒤꿈치로 빙하운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밟으면.”
쿵!
다시 뒤꿈치로 내려찍자, 빙하운이 움찔거렸다.
“꿈틀거린다고.”
쿠웅!
빙하운의 이마가 깨진 것인지 바닥에 피가 살짝 고였다. 빙하운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본 총관이 입매를 비틀었다.
“이봐. 꿈틀거리잖아.”
“명, 명심하겠습니다.”
“우선 남궁천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으니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놈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당분간은 지켜보면서 기회를 보자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남궁천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잘했어. 안 그랬다가 만약 그놈이 홀로 달아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이나 쳐다봤어야 할 테니까.”
“덕분입니다.”
“알면 됐고. 앞으로 남궁천의 요구 사항이 있을 때마다 어지간하면 들어주는 쪽으로 하라고. 물론 내가 옆에서 지시를 내리긴 하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멋대로 설쳐대면 용서는 없을 거요, 궁주.”
“새기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오.”
“감사합니다.”
빙하운이 그제야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머리를 마구 짓밟혔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총관이 벽에 걸린 동경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품위를 지키시오.”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벽으로 걸어가 빗질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종의 인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침상에 앉아 있던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소. 궁주가 그리 풀어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되겠지.”
“…….”
빙하운은 동경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최대한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엎드리고 짓밟히면서 옷이 말려 올라가서 아예 바지부터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다.
하지만 이마에 난 상처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직접 수납장을 열어 금창약을 꺼내 발랐지만 당장 상처가 지워지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거참, 괜찮대도. 내가 은인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궁주님께서 다른 일로…….”
“에헤이. 지금 궁주가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라고 욕한 거야?”
“예? 제, 제가 언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는 겁니까?”
“지금 하는 말이 그렇잖아. 목숨을 구한 은인이 찾아왔는데도, 궁주는 날 만나지 않을 거라고 한 거잖아.”
“아니,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됩니까? 정말 대체 왜 이러십니까?”
“괜찮대도. 설마하니 빙궁주가 제 목숨을 구한 은인마저 박대하는 천하의 개새끼일까? 난 그럴 리가 없다고 믿어. 너도 그렇지?”
“어쨌든 안 됩니다! 절대로…… 아앗!”
마지막 시종의 목소리를 끝으로 궁주실 문이 벌컥 열리는 게 아닌가?
다행히 총관은 조금 전의 소란 때문에 일찌감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다만 다짜고짜 시종의 만류를 무시하고 들이닥친 저 인간이 기가 찬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여긴 또 왜……?’
총관은 눈자위를 파르르 떨면서 남궁천을 차분히 노려보았다.
한편 빙하운은 이제 바지춤을 추스르다가 멈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보는데, 시종이 사색이 되어서는 황급히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필사적으로 말렸으나 손님이 막무가내로…….”
“필사적으로 말렸다면 목숨을 걸었다는 건데, 자네는 아직 살아 있군.”
얼음장보다 차갑게 말을 뱉은 빙하운이 시종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피웅!
지풍 한 줄기가 날아가면서 그대로 시종의 이마를 뚫으려고 할 때!
타쾅!
남궁천이 호신강기를 두른 손을 뻗었다. 그 바람에 튕겨 나간 지풍이 그대로 측벽의 선반 하나를 박살 내버렸다.
순식간에 가루가 된 선반은 서리가 낀 것처럼 새하얗게 얼어 있었다.
“흐익!”
시종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남궁천이 그런 시종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에이, 뭐 그런 걸로 또 사람을 죽이시려고.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사람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아…… 그게 아닌가? 아무튼 내가 고집을 부린 것이니, 궁주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이번엔 총관이 한 걸음 나서며 조용조용 말을 꺼냈다.
“남궁천 단주님. 이 야심한 시각에 기별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는 것은 명백한 결례인…….”
“아, 알고 있어요.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고요. 그래도 내 덕에 목숨을 구했잖아요?”
“단주께서 나서지 않았어도 궁주님은 충분히…….”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안 그래요?”
남궁천이 총관을 무시하고는 빙하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총관의 이마에 핏대가 살짝 섰다.
한편 빙하운은 총관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표정을 굳히고는 물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가?”
“우선 저 불쌍한 시종부터 내보내고 말합시다.”
“그만 나가 보아라.”
“흐익,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종이 연신 허리를 숙여대며 인사를 하고는 물러갔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창가의 탁자를 두고 앉았다.
“앉으세요. 궁주님도.”
아니, 뭐 저런……!
총관은 약이 바짝 올랐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데, 마치 제집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나?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총관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궁천 단주! 무례하오! 어찌 궁주님 앞에서 이리도 안하무인하게…….”
“은인이잖아요.”
“글쎄, 그건 궁주님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그건 모를 일이고. 어쨌든 내가 나서서 구한 건 맞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익……!”
“그리고 여기 궁주님은 벙어립니까? 왜 아까부터 총관이 자꾸 나서는 겁니까? 사실은 총관이 궁주예요?”
“아,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총관이 황망한 표정으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리자, 남궁천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님 말고.”
“이익……! 도대체가…….”
“아, 그러니까 당신은 찌그러져 있으라고. 나는 궁주하고 대화를 하려고 왔으니까.”
“……!”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이야.
총관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빙하운이 천천히 걸어와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차라도 마시겠나?”
“주면 좋죠.”
“총관,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전하게.”
“예, 궁주님.”
총관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궁주의 머리를 짓밟던 자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남궁천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말했다.
“혹시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흠칫.
움찔.
총관과 궁주가 동시에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매우 찰나에 지나지 않아서 범인이라면 조금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남궁천은 범인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오, 역시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남궁천이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침상 아래쪽의 핏자국을 가리켰다.
“혈흔이 보여서 말입니다.”
“……!”
이제는 총관이 아예 걸음을 멈추고는 나갈 생각도 잊은 채 이쪽을 돌아보았다.
빙하운은 여차하면 일수를 뻗겠다는 심정으로 남궁천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래서?”
“시종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데다, 막상 들어와 보니 두 분이 함께 계시고, 궁주께서는 바지를 추스르고, 침상 아래에는 혈흔이 보이고. 흐흐흐.”
남궁천이 어딘지 기분 나쁘게 웃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속삭이듯 말을 잇는 남궁천.
“이게 그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거라면…….”
“에이, 왜 이러십니까?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합니다. 저는 은인이니까요. 그런데 피까지 난 걸 보면…… 굉장히 오랜만인……?”
그제야 남궁천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빙하운이 대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가! 감히 내게 남색……!”
“궁주님. 이왕 이리된 것 인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총, 총관?”
갑자기 끼어든 총관의 목소리에 빙하운이 황망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총관이 의미심장한 눈짓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남궁천 단주는 궁주님의 은인이시니, 그런 비밀을 함부로 남에게 발설하지 않으실 겁니다.”
“흐음. 알겠네.”
그제야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총관은 뒤늦게 걸음을 옮기며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남색이라니. 미친…… 클클. 그래도 병신 같은 추측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군.’
만약 그걸 부정했다간 궁주의 헝클어진 자태와 바닥의 혈흔을 설명할 방법이 애매하다.
차라리 저렇게 제멋대로 오해하는 게 나으리라.
‘어차피 목숨을 유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눈빛이 차갑게 식은 총관이 밖으로 나와서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 지시했다.
그렇게 그가 다시 궁주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무인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했다.
“궁주님! 빙마옥에 사로잡혔던 백묘와 혈마불이 탈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