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 피어나는 혈향
짜르르르르릉!
하늘이 쪼개질 듯한 소리가 울리면서 냉이겸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아갔다.
‘빠르다!’
한기풍의 눈빛이 번뜩였다.
피할 수 있을까?
극히 찰나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조차도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다.
그는 본능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려 발바닥의 용천혈로 내공을 발출했다.
파앙!
파공성에 이어 설야의 늑대가 몸을 날린다. 그러는 사이 하늘에서 떨어진 뇌격이 빙산을 때리듯 빈자리로 강기가 날아든다.
꽈아아아앙!
폭음과 같은 소리가 울린다.
하나 뇌격빙산 초식의 진짜는 지금부터다. 하늘에서 떨어진 낙뢰가 빙산을 때린 후 떨어져 나간 파편이 목숨을 위협한다.
파아아아아!
피한 줄만 알았던 강기가 한기풍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진다.
‘이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데!’
한기풍은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는 강기를 보면서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지금 죽을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한기풍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떨어지는 낙뢰를 노려보고 있을 때,
지이이이잉!
악사들의 연주가 점차 고조되면서 절정으로 치달을 때!
삐리리리리!
궁주를 포함한 모든 이의 집중이 최고조에 이른 그 순간!
파아아아아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와아아!”
“이여어업!”
“하아아앗!”
지금껏 절정의 기예를 보이며 악기를 연주하던 악사들이 일순간 만개하는 꽃처럼 퍼져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광경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낙뢰를 떨어뜨리던 냉이겸은 찰나지간 흠칫거리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주 짧은 사이에 흐트러진 집중력이었지만, 초절정을 넘어선 한기풍에게는 천우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한기풍은 이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왼손에 공력을 집중하면서 빠르게 뻗어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아뿔싸!’
잠시 흔들렸던 집중을 되찾은 냉이겸은 재빨리 방어 태세로 전환했지만, 근거리에서 뻗어낸 한기풍의 일장이 훨씬 빨랐다.
꽈아아아앙!
“크억!”
일순간의 방심으로 복부에 일장을 얻어맞은 냉이겸이 피를 울컥 토하면서 포탄처럼 날아갔다.
슈우우우욱, 퍼퍽!
“으악!”
“으억!”
콰당탕!
관람하던 사람들과 마구 부딪친 냉이겸은 탁자까지 부수면서 나뒹굴었다.
“쿨럭! 쿠웨에엑!”
내상을 입은 것인지 한기풍이 얼른 허리를 숙이고는 탁혈을 토해냈다.
고개를 든 냉이겸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뭔……!”
놀랍게도 악사들과 한기풍이 궁주를 향해 덮쳐가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상황이 눈 깜빡할 사이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관람자들 누구도 나설 생각조차 못 했다.
“빙파위사단의 이름으로!”
“폭군 빙궁주에게 죽음을!”
“명예로운 빙궁을 위하여!”
저마다 일갈을 터뜨리는 이들.
절체절명의 순간인 그 순간에도 빙하운은 자리에 앉아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살짝 치뜨는 그 순간!
퍼퍼퍼퍼퍽!
“크억!”
“헉!”
어디선가 혜성처럼 날아든 그림자가 악사들에게 일장을 날리는 게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에게 일장을 날려서 다른 이들이 서로 부딪쳐 날아가게 만들었다.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던 이들의 대열이 무너지면서 우당탕탕 쓰러졌다.
“어엇!”
“저자는!”
뒤늦게 그림자가 누군지 알아본 사람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갑자기 끼어들어 악사들을 일장에 날려 보낸 사람은 바로 남궁천이었다.
남궁천이 이 자리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견파공안 덕분이었다.
조금 전, 주변을 둘러보던 남궁천은 악사들의 단전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공력을 확인한 것이었다.
단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뿐인데, 단전에 쌓여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공력은 분명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던 것.
이에 남궁천이 자리를 옮겨서 악사들이 움직일 때까지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남궁천은 마지막으로 궁주를 향해 날아드는 한기풍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끼어든 남궁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한기풍의 손발이 일순간 어지러워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남궁천이 재빨리 한기풍의 손목을 꺾어 잡으면서 금나술을 펼쳤다.
우둑!
콰다아아아앙!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힌 한기풍이 입에 거품을 물고는 의식을 잃었다.
워낙 무방비였던 탓도 있지만, 금나술과 함께 남궁천이 상극인 화계의 기운을 불어넣은 이유도 있었다.
정말이지 호흡 한 번 내쉴 틈도 없는 순간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니, 지켜보는 이들은 그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냉이겸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장로님, 정신 차리세요.”
“고, 고맙네.”
냉이겸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게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냉이겸은 다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자, 자네는……?”
“해독제 좀 주시겠어요?”
빙마옥에 있어야 할 백묘가 생글 웃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자네가 여기에 있는 건가?”
“그보단 해독제부터 좀…….”
“아? 어, 그래…….”
냉이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품에서 해독제를 꺼냈다. 남궁천 일행을 탈옥시키면서 전해줄 해독제였는데, 여기서 백묘에게 전해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해독제를 받아 든 백묘가 냉큼 입에 털어 넣더니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섰다.
“고마워요.”
“그,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가나?”
하지만 백묘는 대답 대신 사람들 사이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렇게 그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당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총관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궁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제야 모두의 시선이 빙궁주에게 향했다.
빙하운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한기풍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히 내게…….”
어금니를 꽉 깨문 빙하운의 표정에서 형용하기도 힘든 분노가 느껴진다.
후우우우웅!
주변으로 한기가 훅 풍겨져 나가자,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눈치껏 아뢰었다.
“부디 고정하십시오, 궁주님.”
빙하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쓰러진 한기풍의 명줄을 끊어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앞으로 남궁천이 척 나서며 포권했다.
“빙궁주, 괜찮으십니까?”
“……남궁천.”
“멋대로 끼어들긴 했습니다만, 역시나 궁주께서 위험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내가 그 정도로 위험에 빠졌을 거라고 보는가?”
“물론 아니겠죠. 저런 어설픈 공격은 가볍게 물리쳤을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궁주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니, 혹시나 해서 나서게 됐습니다.”
“그렇군. 한데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나?”
“탈옥했어요.”
남궁천이 해맑게 웃으며 답한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럴까?
사람들이 입을 척 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들 머릿속에는 하나같이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저건…… 미친놈인가?’
탈옥을 한 놈이 어째서 제 발로 호랑이 소굴에 기어들어 온단 말인가? 그것도 빙파위사단을 방해하면서까지.
사실 이곳 연회장에 있는 무인들 다수는 은근히 빙궁주의 죽음을 바라고 있기도 했다.
차라리 저 폭군이 이 기회에 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삼키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남궁천이 나타나서 그걸 다 망친 것이다. 그러니 더욱 남궁천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물론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아니야. 남궁천은 오히려 궁주로부터 빙파위사단을 지켜준 셈이야. 만약 남궁천이 나서지 않았다면…….’
냉이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한기풍에게 향했다.
‘한 대주는 궁주에게 죽었겠지.’
궁주는 강하다.
한기풍 역시 강하지만, 이번 기습 작전은 아마도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남궁천이 한기풍을 살려준 셈이나 마찬가지다.
‘고맙군.’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냉이겸이 빙하운과 남궁천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빙하운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빙옥에서 어떻게 탈옥한 건가?”
“빙설을 인질로 삼았죠. 아,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진 않았으니까. 뭐, 별로 걱정 안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남궁천이 이죽거리듯 말하자, 빙하운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후 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네는 재미있는 인간이군. 죽을지도 모를 이 자리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그 바람에 궁주님을 구했죠. 그러니 이제는 셈이 같아진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제가 설규를 죽인 이유로 이곳에 끌려왔습니다만, 빙 궁주님을 한 번 구해드렸으니 그 죄는 덮어두도록 하죠. 대신 무림맹 적랑단주로서 손님 대접을 받고 싶습니다만.”
“맹랑하군.”
“어차피 절 죽여봐야 득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절 손님으로 대해주시면, 추후에 무림맹에서도 빙궁의 환대에 보답할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일종의 동맹 같은 관계죠. 강호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본 맹이 귀 궁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손해 볼 장사는 아닐 겁니다.”
“말은 잘하는군.”
빙하운이 차갑게 웃더니 총관을 슬쩍 돌아보았다.
“총관은 어찌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빙파위사단이 극성이니 우선은 무림맹의 관계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빙하운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좋다. 지금부터 자네들을 본 궁의 귀빈으로 대우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포권하자, 빙하운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남궁천 일행은 무림맹 적랑단으로서 본 궁의 손님이다. 그들을 모두 석방하고 지객당으로 안내하도록. 대신 배신자 한기풍과 악사로 위장한 빙파위사단원들은 빙옥에 가두고 처분을 기다리도록 하라.”
“존명!”
말을 마친 무인 몇몇이 얼른 달려와 쓰러진 한기풍과 악사들을 질질 끌고 갔다.
“자네는 제멋대로 탈옥했지만, 결국 나를 구했으니 이번에는 넘어가지. 하나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걸세.”
“명심하지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총관이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궁주님, 술을 더 올려 드릴까요?”
“입맛이 없군.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말을 마친 빙하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 뒤를 총관이 총총걸음으로 따라갔다.
그제야 남은 무인들이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다간 연회장에 때아닌 피바람이 불 뻔하지 않았나?
마침 무인 하나가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역시나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그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지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고맙소.”
“저야말로.”
“……?”
얼음 같은 남자가 걸음을 옮기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기풍 대주님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궁천이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 * *
낭하를 따라 걷는 빙하운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그 뒤를 총관이 잰걸음을 바짝 쫓아갔다.
마침내 궁주실로 들어선 빙하운이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총관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 일은…….”
짜아아아악!
순간 빙하운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가 퀭해진 눈으로 총관을 돌아보았다.
총관의 표정이 전에 없이 독사처럼 매서워졌다.
“궁주, 왜 이리 기고만장하시오?”
“총관. 나는…….”
짜아아악!
다시 한번 빙하운의 뺨이 휙 돌아갔다.
총관의 표정이 더없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한낱 총관이 북해빙궁주의 뺨을 올려붙이다니.
“변명 따윈 필요 없소.”
총관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