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 내 것 내놔라
“저 암벽만 끼고 돌면 북해빙궁이 나타난다네.”
냉이겸이 저만치 보이는 암벽을 가리켰다.
남궁천 일행은 저마다 고개를 들고는 얼음으로 뒤덮인 암벽을 보았다. 암벽을 뒤덮은 얼음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서 그냥 지상에 거대한 얼음이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휘이이이잉!
세찬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일행들은 얼른 어깨를 움츠리면서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춥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지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군요.”
팽수혁과 윤종승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긴 여정이었다.
몽골의 초원도 지나왔고, 금빛 모래가 펼쳐진 사막도 지나쳤다.
사막을 지나는 일은 특히나 힘들었는데, 낮에는 불볕더위에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고,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에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직 강호 경험이 적은 대주들은 사막의 밤이 그토록 춥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점점 북쪽으로 올라오니 이제는 종일 추웠다. 때문에 공력을 쉬지 않고 운기해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야만 했다.
좋은 점은 저절로 내공 수련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 계속해서 공력을 소모하게 되니 체력적으로 지친다는 게 큰 문제였다.
어쨌거나 긴 여정 끝에 일행은 마침내 빙궁에 도착한 것이다.
냉이겸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얘기했던 대로 자네들을 포박해서 끌고 가야 하네. 이해해 주게나.”
“그러시죠.”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수혁이 제 가슴을 팡팡 치며 빙설을 보고 눈을 찡긋했다.
“빙 소저. 걱정하지 마시오. 내 완벽한 연기로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볼 테니! 나만 믿으시오!”
“팽 소협이 있어서 정말 든든해요!”
“훗. 소저도 사실 연기에 제법 소질이 있었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냉이겸이 입매를 파르르 떨었다.
“가장 훌륭한 연기는 대사 없이 표정과 행동만으로 느껴지는 것이라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군. 걱정하지 마시오, 영감. 나만 믿으시오.”
‘네가 제일 불안해!’
냉이겸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그냥 가슴으로 삼키고는 돌아섰다. 더 길게 말해봐야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일행들을 모두 포박한 냉이겸과 빙설은 포승줄을 쥐고는 앞장섰다.
빙벽을 돌아가니 마침내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얼음 궁전이 한눈에 드러났다.
“아아…….”
“엄청나군.”
“상상 이상이야.”
대주들이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자, 냉이겸과 빙설이 내심 흐뭇한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라도 북해빙궁을 처음 본다면 저런 반응이 당연하리라.
백옥처럼 반짝이는 빙궁.
극한의 냉기에 얼어붙은 그 거대한 구조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품고 있었다.
호수 끝에서 시작된 천연의 빙벽이 하늘까지 뻗어 있으니 그 크기가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빙궁은 그 천연의 빙벽을 깎아서 만들어진 듯했다.
투명하면서도 푸른빛을 뿜는 얼음은 빙궁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고, 또한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거기에 햇살이 떨어지면서 반사되니 주변으로 청아한 빛이 가득 채워졌다.
대낮에도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울 정도니, 달이 뜬 밤에는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낼 것이 틀림없었다.
‘훗, 어떤가? 남궁천 단주. 아무리 자네라도 이 빙궁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 으응?’
“뭘 그렇게 놀라나? 빙궁 처음 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고는 저벅저벅 걸어간다.
“빙궁 처음 보잖아. 단주도.”
포승줄에 엮인 윤종승이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말하자,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다.
“아…… 책에서 하도 많이 봐서 와본 곳인 줄.”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책을 읽고 다니는 것이야!
냉이겸이 멋쩍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남궁천은 빙궁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이네. 하긴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별천지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일행이 북해빙궁으로 다가가니 얼음이 잔뜩 끼어 있는 성문이 나타났다.
“멈춰라!”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대주들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빙궁은 문지기도 상당한 내력을 소유하고 있군.’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분을 밝혀라!”
“장로 냉이겸이다. 빙설 아가씨를 모시고 중원에 다녀오는 길이다.”
냉이겸이 대꾸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 순간.
그그그그그긍……!
얼어붙은 줄만 알았던 거대한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스르르 미끄러진다.
타다다닷!
곧이어 성문 안에서 두터운 옷을 껴입은 무인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오더니 일행들을 에워쌌다.
처처처처척!
그들 모두 시퍼런 창을 앞세우자 서늘한 한기가 휘몰아치면서 일행들을 위협했다.
정말이지 문지기에 불과한 이들의 내공이 어지간한 중원인 절정고수 급에 달하는 듯했다.
칼날 같은 기운을 받으면서도 남궁천과 일행들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저벅저벅……!
마침내 성문 안에서 수문장으로 보이는 무인이 걸어왔다.
덩치가 웬만한 성인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얹어야 할 만큼 컸다.
“냉이겸 장로님을 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동굴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목소리를 꺼낸 무인이 냉이겸을 향해 포권했다.
냉이겸이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대꾸했다.
“잘 지내고 있었나? 장과.”
장과라 불린 무인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만 빙궁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그건 차차 듣기로 하지.”
“아가씨는 무탈하신지요?”
그러자 빙설이 생글 웃으며 한 걸음 나섰다.
“전 아주 멀쩡해요. 모처럼 즐거운 여정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데 동행자가 많군요.”
장과의 시선이 남궁천을 비롯한 대주들과 백묘, 그리고 아룡에게 향했다.
그는 아룡의 행색을 보고는 바로 알아차렸다.
“저자는…… 광풍사?”
“잘 알아보았네. 빙궁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광풍사 문주와 조우했네. 본 궁에 원한이 많더군. 다짜고짜 우리를 공격하기에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았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위험했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광풍사 문주도 장로님께는 한 수 접어야 하는군요.”
장과의 시선을 받은 아룡이 눈알을 부라리면서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남궁천이 조용히 노려보는 시선을 깨닫고 있었기에.
“궁주님은 좀 어떠신가?”
“최근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장로님이 남궁천을 생포해 오셨으니 좀 좋아지실 것 같습니다.”
“그렇군. 거기에 광풍사 문주까지 사로잡았으니 더욱 기뻐하셨으면 좋겠군.”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럼 먼저 궁주전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
장과가 수하들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창을 거둔 이들이 양옆으로 나란히 섰다.
장과가 돌아섰다.
“그럼 따라오시지요.”
그렇게 일행들이 성안으로 들어섰다.
성 내부는 바깥보다도 더욱 화려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궁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지경이었다.
워낙 풍광이 화려하다 보니 추위마저 잊을 정도였다.
“정말 대단하군요. 규모만큼은 무림맹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규모도 규모지만 굉장히 아름답군.”
유현과 당우기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살폈다.
빙설이 자부심을 느끼는 듯 씨익 웃었다.
“본 궁은 시간에 따라 빛깔도 바뀌죠. 아침은 푸른빛으로, 점심은 황금빛으로, 저녁은 붉은빛으로, 그리고 달밤엔 옥빛과 은빛으로.”
빙설의 설명을 들으며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는데, 마침 성 한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똑바로 안 걸엇!”
차아악!
“아악!”
일행들이 무심코 시선을 돌려 보니 이 엄동한설의 추위에 누더기 하나만 겨우 걸친 소년이 쓰러진 채로 채찍을 맞고 있었다.
마침 소년의 누이로 보이는 아이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애원했다.
“무사님! 용서해 주세요! 제 동생이 기력이 없어서 그래요!”
“흥! 그렇게 기력이 약한 주제에 빙파위사단(氷破衛士團)의 전달책 노릇을 했단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를…….”
차아악!
“꺄악!”
여지없이 날아든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자 누이 역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살갗이 터져 시뻘건 피가 흐르는 게 여실히 보였다.
자세한 영문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소녀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팽수혁이 어금니를 씹으며 나서려는데, 냉이겸이 손을 뻗어 제지하더니 자연스럽게 한 걸음 나섰다.
“무슨 일인가?”
“인근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본 궁의 횡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요.”
“주민들이? 무슨 힘으로?”
“뭐,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중원에서 온 무인을 고용해서 빙파위사단을 조직했습니다.”
“빙파위사단이라니. 본 궁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일단 아이들이 어리니 더 이상 험한 꼴 보이지 말고 압송하라고 하게.”
“예, 장로님.”
장과가 무뚝뚝하게 대꾸하더니 채찍을 든 무인에게 걸어갔다.
남궁천은 이 과정을 보면서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빙궁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군.’
성내를 오가는 무인들 하나하나가 잔뜩 경직된 상태로 보인다. 주변을 눈치 보면서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나 할까?
‘당시에는 꽤나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삭막하기 짝이 없네.’
뭔가 잔뜩 억압된 분위기.
생동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마치 죽은 자들의 성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겨 마침내 일행이 궁주전 앞에 멈췄다.
장과가 냉이겸을 돌아보았다.
“내전에서 회의 중이니 보고를 올리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덩치와 달리 날랜 동작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장과가 돌아왔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수고했네.”
냉이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구구구궁……!
궁주전 정문이 열리면서 냉이겸을 비롯한 일행들이 줄줄이 내전으로 들어섰다.
후우우우웅!
싸늘한 한기가 내전을 휩쓴다. 거기에 묘한 경계심까지 섞여서 차가운 눈초리를 던지는 수뇌인사들.
푸른빛의 융단을 밟으며 걸음을 옮긴 냉이겸이 마침내 태사의 아래에 멈춰 서서 포권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냉 장로.”
태사의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궁주.
그가 바로 빙궁의 주인인 빙하운이었다.
한편 남궁천은 이제 초로인이 된 빙하운을 물끄러미 보았다.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 어딘지 쾌활해 보였던 인상은 이제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세월의 흐름만으로 따지기에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빙하운은 남궁천을 비롯한 일행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빙설이 냉이겸 곁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포권을 하며 보고했다.
“궁주님의 명을 받들어 남궁천 단주를 생포해 왔습니다! 절대로 무림맹과 사전에 협의…….”
“남궁천을 지키려던 대주들이 있었으나, 격전 끝에 그들 역시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냉이겸이 얼른 빙설의 말을 가로막으며 보고했다.
다행히 빙하운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역시나 아룡에게 시선을 던졌다.
“광풍사인가?”
“예, 광풍사 문주 아룡이라는 자입니다. 복귀하는 길에 마주쳐서 사로잡아왔습니다.”
“하하. 과연 냉 장로요. 대단하군. 광풍사 문주까지 사로잡다니. 그대의 공이 크오.”
“감사합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룡은 빙하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결국 아룡이 분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빙 궁주! 광풍사는 지금까지 빙궁과 돈독한 사이를 유지해 왔다! 한데 어째서 내 수하들을 죽인 것이냐! 항간의 소문대로 미쳐 돌아버린 것인가!”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빙하운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아룡을 보더니 나른한 음성을 흘렸다.
“아무라도 저 개가 짖지 못하도록 만들라.”
“예, 궁주님!”
순간 수뇌인사 중 한 명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더니 포승줄에 묶인 아룡의 복부에 일장을 날렸다.
퍼억!
“커읍!”
눈을 부릅뜬 아룡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온몸이 그대로 얼어 버리는 듯했다.
북해빙궁의 비전절기인 빙백신장이었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추위에 아룡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는 사이 빙하운이 남궁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진천랑의 아들인가?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이어받았다지? 어떤가? 내 공력도 보이는가?”
빙하운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