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 내 것 내놔라
불과 일곱 살에 불과한 아룡은 사내의 몸에 올라탄 채 정신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퍽! 퍽! 퍼억……!
사내는 이가 부러져 나가고 코피가 터져서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룡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대경실색할 광경이었다. 고작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성인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기절을 할 정도로 구타를 한 것이니.
아룡은 구타를 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얻어맞았을 때가 떠올랐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걸핏하면 아룡을 때렸다.
하루는 학대를 견디지 못한 아룡이 주먹을 쥐고 반항을 했다.
하지만 차마 휘두르진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아룡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가소로운 새끼. 네놈이 감히 내게 주먹을 들이밀어? 남자는 주먹을 한 번 쥐었으면 그걸로 끝을 봐야 하는 거야. 그러지 못할 거면 주먹을 쥐지 말아야지!”
그날 아룡은 너무 많이 얻어맞아서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날 밤 아룡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부족 중에 아룡 같은 아이들은 많았으니까.
걸핏하면 폭력을 쓰는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는 확실히 배워둔 터였다.
한번 쥔 주먹은 절대로 풀지 말라는 것.
그날 이후 그 말은 아룡의 생존 지침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 아룡이 가슴팍에 올라타서 때리고 있는 상대는 말 도둑이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 혼자 말을 돌보는 것을 보고는 만만히 여기고 접근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룡은 만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퍽! 퍽! 철퍽! 철퍽……!
피범벅이 된 얼굴에서 이젠 질척한 소리가 들릴 지경.
뒤늦게 아룡을 발견한 부족들이 얼른 달려와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됐다!”
“어서 와서 좀 말려봐! 이러다가 죽이겠어!”
“쳇! 죽으라지, 왜? 감히 그딴 짓을 하고도 저는 살고 싶은가 보지? 그딴 녀석은 죽어도 싸!”
“그래도 이 어린 녀석에게 죽이도록 하는 건 가혹하잖은가!”
“가혹하긴! 아룡은 영웅이 되는 거지!”
“그래, 최연소 영웅이다!”
부족들은 아룡을 둘러싸고 말을 쏟아냈다.
불과 일곱 살에 불과했지만, 아룡은 부족들이 자신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자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누군가 아룡의 손목을 낚아챘다.
돌아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만하면 됐다는 뜻.
그제야 아룡은 씨근거리면서 주먹질을 멈췄다.
말 도둑의 얼굴은 두 눈 뜨고 봐주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죽지 않은 게 용하다 싶었다.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찬사가 터져 나왔다.
“아룡이 말 도둑을 잡았다!”
“아룡은 확실히 남다르군!”
“이 어린아이가 도둑을 잡을 줄이야!”
“정말 대단해! 역시 떡잎부터가 달라!”
아버지는 아룡을 번쩍 들어 올려 마을 사람들 앞에 내세웠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아룡의 이름을 연호했다.
왕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떡잎부터 다른 그 모습을 번번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다부진 체구에 민첩성이 남달랐으니까.
그렇게 소년이 되었을 때, 아룡은 일찌감치 광풍사에 들어가서 칸의 눈에 들었다.
광풍사의 절기를 모두 전수받으면서 빠르게 성장했고, 이후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때려도 될 만한 이들을 일부러 찾아다녔다.
폭력은 아룡에게 있어서 삶의 지침과 같은 것이었다.
일곱 살 때 한 번 쥔 주먹은 죽을 때까지 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때릴 만한 사람을 다 때린 후에는 때릴 명분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더 이상 때릴 명분도 없어지자, 보다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복원(復元)!
명을 무너뜨리고 대원제국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은 모든 몽골인의 꿈이었다.
놓쳐 버린 영광을 되찾는 것!
사람들은 열광했고, 아룡은 복원을 빌미로 걸핏하면 만리장성을 넘어 약탈을 일삼기 시작했다.
사실 아룡은 복원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렇게 계속해서 폭력을 이어갈 수 있는 명분만 있으면 되었다.
그 명분이 유지되는 한 아룡은 계속해서 폭력을 쓸 수 있고, 그럼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복원이라는 원대한 꿈에 동화된 이들이 광풍사에 들어왔고 그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적어도 광풍사에 들어온 이들은 아룡을 테무친처럼 여겼다.
그렇게 아룡은 모든 이의 꿈을 떠안고 대원제국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 야 하는데…….
퍽! 퍽!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카, 칸이…….”
“말,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누가? 어떻게? 저걸?”
“이,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아룡은 생각했다.
‘아, 내가 또 이성을 잃고 폭력에 심취해 있었구나. 그래서 부하들이 날 차마 말리지 못하는 중이구나.’
속으로 마음 약한 부하들을 나무라면서 눈을 천천히 떴다.
‘말리긴 뭘 말려. 사내가 주먹을 쥐었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데, 내가 맞고 있어……?’
퍼억!
뺨이 휙 돌아간 아룡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절했던 걸까?
순간 어린 시절부터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끄음…….”
아룡이 희미한 신음을 흘리자 뿌연 시야 너머로 부하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칸, 칸이 깨어나셨다!”
“칸! 정신 차리십시오!”
“칸!”
귀도 다친 것인지 물을 먹은 것처럼 먹먹하다. 눈도 퉁퉁 부어서 온전히 보이지도 않는다.
희뿌연 시야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궁천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보고는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때려눕히는 쪽이었는데, 그 반대의 입장이 되니 무척이나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너…… 어떻게 날…….”
퍼억!
“끄윽!”
검집이 떨어지면서 그대로 아룡의 머리를 때렸다.
정말이지 기절을 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손발이 마비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래전 말 도둑을 잡을 때 아버지가 떠올랐던 것처럼, 이 순간 바닥에 드러누우니 또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아룡의 손에 죽었다.
그날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아버지는 아룡을 보며 말했다.
“네놈은…… 천하가 네 아래로 보이지? 클클. 하나 강호는 넓고, 언젠간 네놈의 심장을 가를 놈이 나타날 거다.”
빌어먹을, 아버지 말 하나 틀린 게 없구나.
새삼 처량한 생각에 젖어 있는데, 비로소 구타를 멈춘 남궁천이 어깨를 들먹이며 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귀가 먹먹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철썩!
뺨이 휙 돌아갔다.
화끈거리는 고통이 전해진다.
오래전 아버지에게 맞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남궁천이 아버지처럼 자신의 멱살을 쥐더니 바짝 끌어 올렸다.
“장보도 기억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 순간 아룡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공포는 아버지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세상에 유일한 두려움이 아버지였는데.
그 아버지보다 더한 놈이 나타날 줄이야.
“어떨 것…… 같나?”
목소리를 쥐어짰더니 다시 손찌검이 날아든다.
철썩!
뺨이 휙 돌아가고.
“새끼, 기억하고 있구나. 하긴. 내가 그렇게 찾는데 아무 대책도 없이 지도를 태워 버리는 건 너무 멍청한 짓이지. 뭔가 있으니까 찾는다고 생각할 거고. 그럼에도 태웠다는 건 이미 다 외웠다는 뜻이겠지?”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따져오자 아룡도 할 말이 없어졌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기에.
남궁천이 아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새끼야. 그거 안 외우고 있었으면 넌 지금쯤 모래 바닥 아래에 묻혔어.”
“아버지…….”
“미친 새끼, 내가 왜 네 아버지야?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철썩!
다시 뺨이 휙 돌아간다.
이번엔 공력이 실린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든다.
일순 남궁천의 행동이 아버지와 겹쳐 보였다.
그렇다고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최악이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부하 몇몇이 자신을 에워싼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적을 앞에 두고 쫄았냐고 다그쳤겠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자신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이놈은 완전히 미친놈이니까.
마침 남궁천이 툭 던지듯 말한다.
“다들 그만 미쳐 날뛰라고 해야지?”
아룡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만…… 싸움을 멈춰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을 에워싼 무인 중 몇 명이 다시 싸움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광분한 전사들은 쉬이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이대로 싸움이 진행되면 살아남는 자는 냉이겸밖에 없으리라.
대주들과 백묘가 제아무리 출중한 무예를 지녔다고 해도 천 명에 달하는 적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애새끼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말을 안 들어 처먹네.”
결국 남궁천이 아룡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일어섰다.
“야 이 새끼들아! 당장 안 멈춰? 네놈들 대가리가 대가리 날아가는 거 보고 싶어?”
사자후로 외치니 주변의 모래가 풀썩 일어나더니 노을빛을 받아 황금 알갱이처럼 빛나며 장관을 이룬다.
그제야 뒤엉켜 싸우던 무인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천하무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룡이 남궁천의 손에 머리채가 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칸의 굴복은 광풍사 전사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연실색하자, 냉이겸을 비롯한 일행들이 몸을 날려 남궁천 곁으로 날아왔다.
다만 여전히 부채춤을 추며 전의를 상실한 전사들의 목을 베어가는 여인이 있었으니…….
“하아…… 백묘! 그만하고 너도 이리 와!”
“닥쳐라! 네놈이 그딴 식으로 말한다고 내가 당장 가겠습니다!”
휘리리리릭!
백묘까지 옆으로 다가오자, 남궁천이 아룡에게 물었다.
“다시 묻는다. 장보도 기억하고 있지?”
“어떨 것…… 같…….”
휙!
“기, 기억한다!”
남궁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아룡이 얼른 대꾸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고통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진작 그럴 것이지. 괜히 개기다가 처맞고 그래.”
“…….”
“그럼 이제 네가 앞장서서 안내해라. 그 장보도를 잘 기억해서. 만약 날 속이고 엉뚱한 곳으로 가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면 또 처맞는 거야.”
“그런! 장보도가 가짜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장보도가 진짜이길 바라야지.”
“그게 무슨……!”
아룡이 따지려고 하는데, 냉이겸이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지금 그럼 자네는 빙궁으로 가는 게 아니란 말인가?”
“예, 장보도가 없어졌으니, 이 녀석을 끌고 태양궁부터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되네! 빙궁부터 가야 하네. 더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빙궁에서 우리 행적을 수상히 여길 수도 있네!”
냉이겸이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궁천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쩌죠? 이 새끼가 장보도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자네 말은 이해하지만 빙궁으로 가는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네. 이왕 자네가 우릴 돕기로 했으니 약조는 지켜주게.”
자못 애원하는 투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남궁천이 생각을 달리 먹으면 냉이겸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이 녀석도 같이 빙궁으로 가죠.”
“광풍사 문주를?”
“예, 어차피 광풍사도 빙궁에 원한이 있는 것 같으니까 이참에 영감님이 두드려 패서 잡았다고 하죠. 그럼 빙궁에 공을 하나 더 세우는 셈이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흐음.”
“빙옥에 이 녀석을 가둬두고, 제가 빙 궁주를 치료한 후 다시 데려가는 걸로.”
잠시 생각을 잠긴 채 만신창이가 된 아룡을 바라보던 냉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뭐, 광풍사 문주는 본 궁에 원한을 가진 게 사실이니 따로 연기를 시킬 필요도 없을 테고. 그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