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 고로 존재한다
여신우는 기분이 좋았다.
한 번쯤 무림맹 복판에서 득실대는 정도인들을 사정없이 베어넘기는 게 꿈이긴 했다.
그런데 그 꿈을 오늘 이룬 것이다.
물론 모든 정도인들을 베어버리면 곤란하다.
그중에는 아군도 있으니까.
그래, 그게 조금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하나 이렇게 무림맹 복판에서 마음껏 설쳐댈 수 있다니.
이런 날이 언제 또 있을까?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즐겨야 하지 않겠나?
애초에 무림맹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반발심이 극심했다.
이 고리타분한 영감들 틈에서 비위나 맞춰주며 지낼 자신이 없었기에.
그런데 이 영감탱이들이 이런 신박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덕분에 지금 실컷 살풀이를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환경이라면 천년만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다.
쉬콱! 촤아악! 쉬걱! 차아악!
“크아악!”
“아악!”
“끄어어억!”
파육음에 이어 비명이 연신 터져 나온다.
일검일살이다.
모든 검로에서 피가 뿌려지고 비명이 흩어진다.
그렇게 한참이나 정신을 놓고 싸우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노호성과 함께 검신이 떨어져 내렸다.
“노오오오옴!”
따아아앙!
촤츠츠츠츳!
뒤로 서너 장이나 물러난 여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영감탱이군.”
“감히 사파 나부랭이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설치느냐!”
“영감, 늙어서 욕심이 과하면 추해지는 법이야. 그러게 이젠 좀 젊은 세대에게 맡기지 그랬나?”
“갈!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그럼 우릴 여기로 불러들이지 말았어야지! 돈 받을 때는 좋았나?”
“시끄럽다! 네놈들과 맹주 세력은 본 맹을 어지럽힌 잡것들이다! 전부 응징해야 마땅하다!”
파바밧!
카랑카랑 소리치며 달려드는 자는 바로 장로원주 우위광이었다.
그가 여신우를 향해 검을 빠르게 휘둘러 왔다.
타닷!
땅을 박차며 물러난 여신우가 얼른 검을 휘둘렀다.
까강!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두 사람의 검신이 부딪쳤다.
따다다다다당!
마치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울리면서 둘 사이에서 불꽃이 마구 터져 나왔다.
“과연! 세월만 축내면서 주름만 채운 건 아닌 모양이로군!”
“네놈 정도는 아직 거뜬하다!”
“몇 수 받아줬다고 자신감이 지나치면 노망 난 것 같잖소?”
“갈!”
카가가가가강!
두 사람 사이에서 정신없는 공방전이 일어났다.
확실히 우위광은 나이만 많은 욕심쟁이가 아니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던가?
우위광의 한 수, 한 수는 지난 수십 년간 수련을 거듭하며 쌓아 올린 실력이 단단히 녹아 있었다.
하나 여신우 역시 흑무련 부련주로서 상당한 무위를 지닌 자.
두 사람의 싸움은 초박빙으로 누가 우위에 있는지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금속성이 터질 때마다 새하얀 빛이 번쩍인다. 하얀빛은 우위광의 기운이 폭발하면서 터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백의 기운 속에서 검은 사기가 까마귀 깃털처럼 퍼져 나온다.
그것은 여신우가 익힌 오비심공(烏飛心功)의 영향이었다. 오비심공은 차양검 이휘명이 직접 여신우에게 전수한 독자무공이었는데, 오비검법과 한 쌍을 이루는 내공심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여신우는 지금 오비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까아앙!
까아아악! 콰앙!
여신우가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것만 같은 파공성이 울리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소리는 싸우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굉장히 거슬리지만, 우위광 역시 강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기에 쉬이 심력이 흐트러지진 않았다.
다만 손을 섞으면 섞을수록 조금씩 우위광이 밀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뀌아아아아악!
마침 여신우가 자세를 낮게 숙이면서 검을 매섭게 올려 쳐갔다.
오비검법 중에서도 야익운격(夜翼雲擊)이라는 검초였다.
촤아아아악!
마침내 여신우의 검이 우위광의 앞섶을 찢어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장삼 자락이 펄럭이며 풀어헤쳐지자, 우위광의 탄탄한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고령의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근육질 몸이었다. 하나 곧이어 선혈이 생기더니 피가 터져 나왔다.
촤아아아아!
“크읍!”
우위광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여신우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짓쳐들었다.
까아아아아악!
까마귀가 운다.
동시에 검은 강기가 파생하면서 그대로 우위광에게 번개처럼 날아가 꽂힌다.
꽈아아아앙!
순간 요란한 폭음이 터졌다.
하지만 검은 기운이 흩어지는 곳에는 우위광을 비롯한 두 명의 장로가 더 있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두 장로가 등장하면서 우위광에게 날아드는 강기를 막아낸 것이다.
“크읍!”
“쿨럭!”
두 장로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각각 피를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우위광을 부축하며 충성심을 보였다.
“원주님, 괜찮으십니까?”
“끄음. 나는 괜찮소.”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우선은 몸을 빼내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지금 와서 물러난다니! 겨우 내원까지 들어온 상황에서!”
“하나 지금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우선은 후일을 도모하시지요!”
“제길!”
우위광이 욕지거리를 뱉어내고는 여신우를 노려보았다.
여신우도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로서는 사실 우위광과 이렇게까지 열을 내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전히 남의 집안 싸움에 불과했으니까.
한데 장로 둘이 더 달라붙었으니, 우선은 무리를 하며 싸울 생각이 없었다.
여신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장로 둘은 우위광을 데리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바로 그때!
“어딜 가시려고!”
귀에 익숙한 우렁찬 고함이 들리더니,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날아드는 게 아닌가?
장로 두 명이 동시에 돌아서면서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쒸쒸아아앙!
하지만 부딪쳐오는 기운이 훨씬 막강했다.
검붉은 마기와 푸른 천뢰기가 두 마리 용처럼 뒤엉키며 그대로 뻗어왔다.
쩌어어어어엉!
“크아악!”
“으아악!”
장로 두 명이 속절없이 튕겨 나가자, 우위광이 눈을 부릅뜨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노오오옴!”
우위광이 노호성을 터뜨리면서 검을 휘두르녀는 순간!
쉬이이이잇, 서걱!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든 검붉은 용이 그대로 오른팔을 스치며 지나갔다. 곧이어 서늘한 감각이 어깨에서 전해져 왔다.
“큽! 끄아아아아악!”
마침내 우위광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허공으로 솟아오른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손에는 검신을 꽉 틀어쥔 채였다.
털썩! 댕그랑!
오른팔과 함께 쥐고 있던 검이 바닥을 굴렀다.
우위광은 몸을 비틀면서 울부짖었다.
“내 팔이……!”
남궁천이 지체 없이 다시 검을 휘둘러 가려는데, 주변에 있던 장로들이 일제히 달려와 우위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칫거린 남궁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늙은이들의 우정에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원주님의 팔을 자르다니! 게다가 방금 그건 마공이 아닌가! 네놈이 그러고도 무림맹의 적랑단주라고 할 수 있는가!”
“시끄럽소. 영감들은 감히 맹주에게 벽력탄을 쏟아부었으면서 뭐가 그리 잘났다고 조잘거리며 떠드는 거요? 내가 마공으로 선량한 사람을 죽였나? 반역자를 처리했을 뿐이지.”
“갈! 사악한 무공을 익히면 본디 심상도 사악해지게 마련이거늘. 언젠간 선량한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닥치시오.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건 그때 가서 말하라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주둥이 놀리지 마시고!”
파아앙!
남궁천이 바닥을 차며 튀어나가자, 장로들이 얼른 소리쳤다.
“막, 막아랏!”
“노오옴!”
몇몇 장로들이 남궁천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고, 나머지 장로들은 팔을 잃은 우위광을 부축한 채로 외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남궁천은 두 자루의 검을 마구 휘두르며 장로들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박빙의 싸움이 이어졌다.
옆구리를 관통한 검상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로들은 남궁천을 저지하면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 * *
쩌어어어엉!
촤츠츠츠츳!
철시 한 자루를 막아낸 청풍이 한참이나 미끄러지다가 가까스로 멈춰 섰다.
그 틈을 타서 만취개가 타구봉과 박 바가지를 마구 휘둘러 왔다.
깡! 탕! 투까앙! 쩌엉!
청풍이 연신 검을 휘두르며 타구봉과 바가지를 막아냈다.
어느 순간 바가지에 금이 쩌억 가더니 청풍의 주먹과 맞부딪치는 순간 산산조각 깨지고 말았다.
투카아앙!
파편이 조각조각 흩어질 때, 청풍이 얼른 검을 내질렀다.
따다다닥!
파편 조각을 뚫으며 그대로 날아간 검봉이 만취개의 심장을 노렸다.
하나 만취개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허리를 휘청 젖히면서 검을 피해냈다.
청풍은 바로 이 순간을 노린 듯 그대로 바닥을 차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파아아앙!
그가 바람처럼 날아가자 그제야 만취개가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얼른 뒤를 쫓았다.
“서랏!”
쉭쉭쉭!
만취개가 허리춤에 매고 있는 술병을 마구 던졌다.
평범한 술병에 불과했지만 절대고수의 손에 들리는 순간 매서운 암기로 변하는 법.
쒸쒸에에엑!
술 호리병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자, 청풍이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허리를 숙여 피했다.
꽈차앙! 꽈아앙!
공교롭게도 날아간 술병이 그대로 마주 날아오는 화살과 부딪치면서 산산조각 났다.
청풍이 새처럼 날아가는 곳은 바로 패력궁 천무류가 있는 전각 지붕!
‘이번 반역에 실패하더라도 당신만은 내가 처리하겠소!’
정말이지 이번 싸움에서 가장 성가셨던 사람이 바로 패력궁이었다.
일대일의 싸움이라면 사실 어려울 것도 없다.
상대가 제아무리 무림칠성이라고는 하나, 근접전이나 일대일의 싸움에서는 궁술로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데 이런 떼싸움에서는 확실히 활처럼 까다로운 게 없다.
청풍은 신묘한 경신법으로 빛살처럼 달리면서도 빠르게 날아드는 화살을 연거푸 피했다.
촤촤아아악!
일순 화살 두 자루가 그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자, 장삼이 풀어헤쳐지면서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천무류를 확실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쒸쒸에에엑!
투깡! 푸욱!
결국은 화살 한 자루를 쳐낸 직후, 또 다른 화살이 청풍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칫!”
탁탁!
하지만 청풍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뻗어 지혈을 한 다음에 그대로 천무류를 향해 허공답보를 펼쳐갔다.
운룡대구식에 기반한 그의 독자 경신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쒸쒸에에엑!
따다아앙!
날아든 두 자루의 화살을 허공에서 피했다. 두 발이 뜬 상황에서 몸을 이동할 수 있는 경신법은 역시 운룡대구식과 그의 독자 경신법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비켜 간 화살이 되레 만취개를 위협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만취개가 화살을 쳐내며 주춤거리는 사이, 청풍은 그대로 전각 지붕 위로 올라서서는 활시위를 당기는 천무류를 덮쳐갔다.
“패력구우웅!”
그가 사자후를 외치며 혜성처럼 떨어져내렸다.
패애애애앵!
동시에 천무류의 손에서도 화살이 떠나갔다.
꽈아아아아아앙!
한 줄기 빛이 터지면서 청풍의 검신이 그대로 화살을 쪼개 버렸다. 그리고 정확히 천무류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지긋지긋한 영감! 이걸로 끝이다!’
쒸에에에에엑!
청풍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