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고로 존재한다
“아뇨, 저만 됩니다.”
남궁천이 히죽 웃으며 답한다.
남궁검이 피식 웃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천마신공을 익힌 적도 없고, 천마신기도 없는데 어찌 가능하겠나?
그저 손자가 기특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무인으로서는 부러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무공을 한 몸으로 구사하다니.
물론 세상이 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온갖 지랄을 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이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다른 어디도 아닌 남궁세가다.
더 이상 세상에 굴복하지 않겠다.
검이란 결국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살상 도구다.
하나 누가 그 검을 쥐느냐에 따라 정의가 바로 서고, 불의가 판을 치는 법이다.
마공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마공은 사람의 심성에 영향을 끼친다고. 그래서 아무리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도 마공을 익힌 순간 인륜을 저버리게 된다고.
하나 도검이라고 다를까?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면 무엇이든 베어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러니 애초에 도검을 손에 잡아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마공이든 도검이든 마찬가지가 아닌가?
‘도가 다른 곳에 있지 않으니. 결국 마음으로 다스리는 것이 도인 것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젠 하다 하다 말코도사처럼 도까지 깨우치다니.
하지만 기분 좋은 깨달음이다.
깨우치고 나면 별게 아니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깨우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자신을 한 번 깨뜨려야 한다는 뜻이니까.
남궁검은 어깨를 활짝 편 남궁천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언제든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라. 마공이든 사공이든 정공이든. 네가 가는 길에 뜻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의고 협의다. 나는 너를 믿으마.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고, 바람막이도 되어주마. 그 누가 너를 해코지하려 든다면 내가 먼저 검무를 출 것이다.’
후우우우우웅!
각오가 기운이 되어 사방으로 휘몰아쳐 갔다.
문득 딸 생각이 떠오른다.
남궁선보다 더 타고난 기재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한데 초견파공안을 가진 사위와 딸이 만나니 정말이지 괴물이 태어나 버렸다.
이런 기재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없으리라.
‘기재로다.’
마침 남궁천이 덕양이 쓰러진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으아아아아! 그만 좀 올라오라니까!”
멀찍이 떨어진 전각 지붕에서 절규에 가까운 고함이 고래고래 터져 나왔다.
남궁천과 남궁검이 동시에 시선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분, 아직 멀쩡히 살아 계시네요.”
“그렇구나. 그간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지.”
“그래도 투항하거나 그러진 않았군요.”
“그 정도로 막 되어먹진 않은 것 같더구나.”
“다행입니다.”
“네가 가서 도와주거라. 덕양은 내가 보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청껏 소리치는 사내를 향해 몸을 훌쩍 날렸다.
* * *
푹! 촤아아악!
상대의 옆구리를 관통한 검신이 횡으로 그어지면서 피를 흩뿌렸다.
“크아악!”
비명을 내지른 무인이 그대로 발을 헛디디며 지붕 아래로 우당탕 굴러 떨어졌다.
그 바람에 지붕 위로 막 올라섰던 다른 사내도 휩쓸리면서 지상으로 추락했다.
“으허억!”
쿠당탕탕!
아래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헉, 헉, 헉……!”
검을 쥔 채로 부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가누며 숨을 몰아쉬는 사내. 그는 바로 최근 호법당주로 임명된 윤첨산이었다.
벌겋게 충혈된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으이씨, 그러니까…… 그만 올라오라고…… 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윤첨산은 정말로 울고 싶었다.
이제 막 호법당주로 임명되면서 팔자가 펴는가 생각했다.
호법당주는 무림맹에서도 요직이 아니던가?
지난 수년간 무림맹에 진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갖은 애를 썼던가?
한데 마침내 자식 덕을 보면서 단박에 호법당주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런데…… 반역이라니!
‘하필이면 내가 호법당주로 임명되자마자 며칠도 지나지 않아 반역이라니!’
이 정도 되면 정말 자신의 팔자도 기구하지 않은가?
내원이 뚫렸을 때는 청랑단과 함께 맹주전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호법당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중요한 서류들을 서둘러 정리하고 나왔더니 이미 청랑단은 모두 맹주전으로 후퇴한 후였다.
결국 윤첨산은 어쩔 수 없이 호법당에 틀어박혀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역자들이 호법당 내부를 구석구석 수색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청랑단을 비롯한 무력 조직이 모두 맹주전에 집합했으니, 굳이 호법당을 수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호법당주의 기쁨은 며칠도 가지 못해 절망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남궁천이 등장하더니, 죽은 줄만 알았던 남궁검도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개방 방도까지!
그렇게 전세가 갑자기 역전된 상황.
그리고 지금…….
“헉, 헉……! 그만 좀 올라오라고. 이 징그러운 새끼들아!”
만만한 게 윤첨산이었던 것일까?
사실 반역자들의 입장에서는 윤첨산처럼 좋은 먹이도 없었으리라.
보아하니 무공이 그리 강하지도 않은데, 호법당주라는 요직에 앉은 자다.
누구라도 호법당주를 처리하게 되면 그 공을 인정받을 테니 이보다 좋은 먹잇감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 보니 수많은 무인이 윤첨산을 노리게 된 웃지 못할 상황.
정말이지 윤첨산 입장에서는 바퀴벌레가 따로 없었다.
베고, 또 베어도 끝이 없다.
오죽하면 호법당 지붕까지 올라왔을까?
그렇다고 포기할 반역자들이 아니었다.
무림칠성과 호각을 다룰 이들이 쟁쟁한 가운데, 윤첨산처럼 만만하면서도 수뇌인사라니!
타앗!
순간 지붕을 박차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윤첨산이 반사적으로 돌아오면서 일검을 후렸다.
까앙!
검신이 맞부딪치면서 튕겼다.
윤첨산이 휘청거리다가 경사진 지붕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얼른 팔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검신이 경로를 뒤틀면서 상대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촤아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머리를 잃은 무인이 지붕에서 굴러떨어졌다.
“허어?”
운이 좋으면 소가 뒷걸음질을 쳐도 쥐를 잡는다더니.
하나 방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타다다다다다!
지붕의 기왓장을 밟으면서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으! 이 징글징글한 것들아! 제발 좀 그만!”
윤첨산은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치면서 되는 대로 검을 휘둘러갔다.
이제는 초식이고, 뭐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그저 닥치는 대로 본능대로 휘둘렀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익힌 무공이 있기 때문인지 혁련검법과 혁련장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까앙! 촤악! 카강! 촤촤촤악!
무아지경 속에서 휘두른 검이 운 좋게 상대를 계속 베어갔다.
비명을 지르면서 굴러떨어지는 자들이 속출한다.
‘어어? 이게 왜 되지?’
검을 마구 휘두르면서도 뭔가 이상하다.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느낌.
처음으로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일어난다.
이 싸움이 어디까지 통할까?
가슴이 뛴다.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이실직고하자면 무공을 처음 배웠던 삼 개월 차에 느껴본 것 같다. 하나하나의 깨달음에 쾌재를 부르던 시절.
지금 딱 그 느낌이다.
깡! 촤아악! 투깡, 촤아악!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이 마구 튕겨 나가거나 검신에 베여 쓰러진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긴 윤첨산은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원래 그가 있던 자리는 처마 모서리 끝.
궁지에 몰린 쥐가 따로 없었는데, 이젠 그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조금씩 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개새끼들! 감히 나를 우습게 본 것이렷다! 드루와, 이 새끼들아! 내가 여기 있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윤첨산이 검을 마구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기와지붕의 용마루까지 뛰어오른 윤첨산이 검을 휘저으며 우뚝 섰다.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챙! 까앙!
“헉!”
자칫 균형을 잃을 뻔했던 윤첨산이 헛바람을 삼키며 기우뚱 넘어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역자들이 마구 도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까강! 깡! 촤아악!
마침내 파육음에 이어 윤첨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촤악! 촤아악!
먹잇감이 몸부림치는 걸 본 반역자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죽어랏!”
“가랏!”
촤악!
“크아아악! 그, 그만! 아파!”
윤첨산이 울부짖으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으면서 발을 헛디뎌 지붕을 마구 굴렀다.
구당탕탕!
가까스로 지붕 끝에 멈춰 선 그가 얼른 몸을 일으켰지만, 정면에서는 빛살 같은 속도로 검첨이 날아들었다.
쉬이이이잇!
“허억!”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쳤다.
다음 순간!
슈카아아앙!
푸른 광휘가 날아오더니 윤첨산의 품을 파고들던 무인을 그대로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끄아아아악!”
기다란 비명을 울리면서 날아간 무인은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사, 사일검법이다!”
“장문인을 죽인……!”
“감히 사일검법을 훔치다니!”
반역자들이 주춤거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남궁천이 어딘지 광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싸늘한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지붕으로 올라온 반역자들 중에는 점창파 문도들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남궁천이 기를 쏘아내는 사일검법을 사용했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그들의 눈에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문파의 비전절기를 초견파공안에 빼앗겼다는 울분. 그리고 장문인마저 죽인 괴물을 마주 보는 두려움.
그들이 주춤거리자 다른 문파의 무인들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윤첨산을 힐끔 보았다.
“괜찮으세요?”
“어? 아…… 어…… 덕분에 괜찮네.”
윤첨산은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뭔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내가 알던 그 남궁천인가?’
강한 건 알고 있다.
한데 지금 풍겨 나오는 기운은 어딘지 묘하다.
그런데 그 묘함이 점점 짙어지더니 어딘지 익숙한 기분이 들게 한다.
‘아……!’
마침내 남궁천의 기운이 완전히 짙어졌을 때, 윤첨산은 물론 반역자들도 그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이건 마기다!”
“이놈! 마공을 익혔구나!”
무인 하나가 고래고래 소리치자, 남궁천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왜? 사일검법을 흉내 내면 너희들 거라서 안 된다며? 그럼 마공을 훔쳤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냐?”
“닥쳐라! 마공을 익혔다는 것 자체로……!”
“됐다. 말이 안 통하니, 일단 처맞자.”
남궁천이 침을 탁 뱉더니 바닥을 차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타다다다다닷!
“막, 막아랏!”
“죽여엇!”
뒤늦게 무인들이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그들 모두 비명과 함께 밤하늘 높이 튕겨 날아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윤첨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들아…… 우리 줄 제대로 선 거겠지?”
어쨌거나 지붕 위에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니 치열했던 전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분위기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