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57화 (457/508)

457. 금선탈각(金蝉脱殻)

만 하루가 꼬박 흘렀다.

휘이이잉!

맹주전 앞 너른 공간에 메마른 바람이 가득 찼다.

맹주전 앞이 이토록 삭막한 공간이던가?

평소 분위기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그저 살벌한 투기와 긴장감만이 휘몰아치면서 이상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벅저벅.

청풍과 덕양, 그리고 우위광이 앞장서서 걸어왔다. 그 뒤로 능허자와 정혜, 정극이 따라 걸었다.

척!

마침내 멈춰 선 무인들이 맹주전을 올려다보았다.

맹주전은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비량이 천응대원들을 뒤로하고서는 맹주전 밖에서 창궁혈화검진을 이루고 있었고, 담벼락 위에는 여신우를 비롯한 흑무련 무인들이, 그리고 맹주전 안쪽에는 청랑단을 비롯한 맹원들이 결집해 있었다.

맹주전 자체도 여러 전각으로 이루어져서 꽤나 넓은 장원이었기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도 딱히 비좁은 느낌은 없었다.

다만 무림맹 전체에 비한다면 역시 맹주전은 극히 일부 구역에 불과했다. 벽력탄을 쏟아붓는다면 맹주전은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고 말리라.

“어떨 것 같소?”

청풍이 덕양을 힐끔거리고는 넌지시 물었다.

덕양은 청풍의 말뜻을 알아듣고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그 남궁검 가주가 순순히 투항할 것 같진 않소이다.”

“역시. 나도 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이왕이면 순순히 나오길 바라지만.”

그러자 듣고만 있던 우위광이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도 맹주가 맹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강짜를 부렸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거요. 어차피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게 마련이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도 벽력탄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겠지만, 결국 이기면 되는 것. 그 이후에는 비난의 화살을 맹주에게 돌리면 될 터.”

“남궁가는 성급했소. 그래도 아직은 맹에 묵 맹주의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간과했지. 세상은 아직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오.”

“후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지요. 너무 앞서간 사람들. 진정성이 어떻든 세상의 수준이 아직 그 정신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거지요. 여전히 맹의 많은 수뇌들이 원주님을 따르고 있고, 세상은 원주님의 입김을 무시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바로 그렇소. 기득권이 그래서 무서운 것 아니겠소? 묵 맹주가 괜히 장로원에 예를 갖췄겠소?”

대수롭지 않은 대화처럼 보였지만, 실은 언중유골이었다.

훗날 청풍이 실권을 잡게 되면 장로원에 제대로 예를 갖추라는 언질을 돌려 말한 것이다.

청풍 역시 그 속뜻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원주.”

“역시 청풍 장문인은 시류를 읽을 줄 아는 분이오. 애초에 장문인 같은 분이 맹을 이끌었어야 하는 것을.”

“허허허. 과찬이십니다.”

우위광과 청풍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조금씩 초조한 기분이 든다.

이제 반각도 남지 않은 상황.

벽력탄 사용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이쪽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필요하다면 무엇인들 못하랴.

청풍이 손을 척 들어 올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소형 투석기가 ‘끼릭끼릭’ 소리를 내면서 굴러온다.

벽력탄을 발사할 장치다.

총 스무 대.

투석기는 전각 뒤에 배치한다.

이렇게 배치하는 이유는 하나다.

혹시나 패력궁이 화살을 쏘면 벽력탄이 이쪽에서 먼저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패력궁 역시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만큼 먼저 활을 쏴서 벽력탄을 터뜨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투석기의 특성상 벽력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것이니 바로 앞에 전각이 버티고 있어도 상관없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우위광이 한 걸음 나서서 공력을 실어 외쳤다.

“비 대주! 곧 약속한 시간이네. 이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을 것이네. 맹주께서는 결단을 내리셨는가? 수많은 목숨을 구할 기회를 주었네만.”

“곧 답이 있으실 겁니다.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까?”

비량이 어딘지 느긋한 태도로 답한다.

원래 기분 나쁘게 미소 짓는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왠지 마음에 더 걸린다.

‘뭘 믿고 아직도 저런 여유를?’

우위광이 내심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은 없을 텐데. 다시 가서 맹주께 전하지 그러나? 만약 이쪽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지체 없이 벽력탄을 퍼부어…… 응?”

말을 이어가던 우위광이 어느 순간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맹주전 지붕 위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저 미친……!”

“엎드려랏!”

“모두 옆드렷!”

청풍에 이어 덕양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무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기가 무섭게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투타타타타타타타!

패력궁뿐만이 아니다.

궁수들이 맹주전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는 것이 아닌가?

청풍이 날아드는 화살을 마구 쳐내며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이게 맹주의 답인가! 기어이 맹원들을 사지로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좋다! 어리석은 결정의 최후를 보여주마!”

“갈! 반역자들 주제에 큰소리로구나!”

이번엔 패력궁이 사자후로 외치더니 폭시를 걸어 당겼다.

쒜에에에에엑!

꽈아아아아앙!

폭음이 터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크아악!”

“아아악!”

주변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파편에 맞아 나뒹굴었다.

주변으로 뽀얀 먼지가 일어났다.

청풍도 더 이상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소리쳤다.

“제기랄! 뭣들 하느냐! 벽력탄을 발사해라!”

“아직! 멈춰라! 지금은 안 돼!”

덕양이 빠르게 외쳤다.

청풍이 발끈해서 휙 돌아섰다.

“도대체 뭐가 안 된단 말이오? 덕양 장로도 설마 저놈들과 한통속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침착하시오, 장문인!”

“한데 왜!”

“생각해 보시오! 상대는 남궁검 맹주요. 지금껏 패력궁을 앞세워 계속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었소! 분명 패력궁에게 벽력탄이 모습을 보이는 순간 노리라고 했을 거란 말이오! 그러니 지금 벽력탄을 날리면? 그 패력궁이 눈 뜬 장님처럼 보고만 있겠소?”

“아……!”

청풍이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확실히 위험하다.

벽력탄을 쓸 때는 세 번을 고심하라고 했다.

이때 세 번을 생각하는 이유는 대량 살상에 대한 고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벽력탄으로 얼마나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

두 번째, 벽력탄의 상태는 양호한가? 불발탄이 아닌지 확인하라는 것.

세 번째, 벽력탄을 사용할 시에 아군 진영에서 폭발할 가능성은 없는가?

만약 지금 투석기로 쏜다면, 벽력탄이 전각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패력궁의 화살이 날아들 것이다.

그리되면 벽력탄이 아군의 머리 위에서 터지는 꼴이 아닌가?

연쇄 폭발로 이어진다면 오히려 이쪽이 먼저 전멸하리라.

청풍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이, 덕양은 재빨리 문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연막을 터뜨려라!”

“존명!”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에서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엉!

이제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

그 와중에도 패력궁의 화살은 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투투투투투……!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아무리 패력궁이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렇게 먼 거리를 오로지 기감만으로 쏠 수도 없고.

투투투……! 투투……!

날아드는 화살의 개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간 패력궁의 무위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방심은 금물이다.

어차피 적은 달아날 곳이 없다.

맹주전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으니 어디서 난전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기회를 엿보다가 벽력탄을 투척하면 끝이다.

‘맹주! 어디 마지막 발악을 해보시오! 그래 봐야 우리에게 명분만 더 줄 뿐이지!’

청풍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맹주전 쪽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 때, 마침내 화살이 더는 날아들지 않았다.

그러고도 청풍과 덕양은 한참을 기다렸다.

이 또한 패력궁의 노림수일 수도 있기에.

한참 동안 고요함이 이어지자 청풍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연막을 한 번 더 쓰도록 해라.”

“존명!”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굉음이 울리면서 연막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퍼퍼어엉!

푸쉬이이이이!

연기가 아까보다 더욱 자욱해졌다.

이 정도면 패력궁의 눈도 확실히 가릴 터!

청풍과 덕양이 서로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풍은 여전히 납작 엎드린 채로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검파로 바닥을 내려찍는 것과 동시에 옆으로 굴렀다.

따악!

휘리리릭!

조용하다. 또 한 번,

따악!

휘리리릭!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제 마지막 신호!

따아아악!

이번 소리는 벽력탄을 투척하라는 신호다.

역시나 전각 뒤쪽에서 투석기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투투투투우우웅!

슈슈슈슈우우우!

무려 스무 개의 벽력탄이 어둠을 뚫으며 날아간다.

패력궁이 벽력탄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할 때쯤이면 이미 맹주전의 허공에 이르렀을 때이리라.

그때는 대응을 해봐야 늦는다.

우위광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잘 가시오, 맹주.”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게 이런 기분일까?

벼르고 벼르던 순간이 오자 전율이 일어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에 입매가 벌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벽력탄이 터졌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꽈과과과과과아앙! 꽈아앙!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면서 천지가 격동했다.

맹주전이 통째로 터져 나가고 전각들이 그대로 무너지면서 주저앉았다.

연막 속에서도 저만치 보이는 불지옥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폭발음이 워낙 컸기에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쿠르르르르! 콰르르르르!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한참이나 어둠 너머를 쳐다보던 우위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끝났군요.”

그의 곁으로 청풍이 다가와서 섰다.

* * *

쿠구구구궁……!

바닥과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흔들렸다.

서둘러 이동하던 남궁검이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보았다.

“기어이 저들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군.”

“반역을 시작한 순간 이미 그 강을 건넌 셈입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천무류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검은 얼룩이 묻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대부분의 등하로가 숙수가 요리를 하는 주방 아궁이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맹주전도 마찬가지.

그러다 보니 맹주를 비롯한 모든 무인의 얼굴에 재가 묻어서 얼룩덜룩했다.

어쨌거나 남궁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마침 저만치 횃불이 보였는데, 그 곁에는 남궁천이 서 있었다.

남궁검이 오랜만에 손자를 보고는 반색했다.

“돌아왔느냐?”

“예, 할아버지.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말을 마친 남궁검은 손자 뒤에 선 만취개를 보고는 포권했다.

“개방이 본 맹에 힘을 실어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별말씀을. 이 녀석이 워낙 재미있어서 말이오. 그나저나 이제 등하로의 존재가 비밀도 아니게 됐구려.”

그러자 남궁천이 남궁검 뒤에 선 여신우를 힐끔거리고는 말했다.

“상관없어요. 오늘이 지나면 맹으로 통하는 등하로는 모두 차단해 버릴 거니까요.”

“그건 좀 아깝군. 쩝.”

“그래도 무한의 등하로는 공유할 테니 걱정 마시길.”

“물론 그래야지.”

만취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남궁천이 남궁검을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럼 이제 뒤통수치러 가볼까요?”

“그러자.”

남궁검이 냉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취개와 여신우 역시 싸늘한 웃음을 지으면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킬킬킬, 정말 재미있다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