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95화 (456/508)

194. 태풍에 맞설 용기

용천관 인근에서 잘나가던 귀왕반장은 그 특유의 산적 설정으로 단숨에 유명세에 올랐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음식이 맛있다는 게 한몫 단단히 한 셈이다.

수련의 일환으로 식재료를 다듬고 검기를 이용해서 고기를 써니 신선함마저 더해져 사람들의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그마한 식당에 불과했던 반장은 이제 제법 커져서 사 층까지 증축했고, 객잔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분점을 더 낼지 말지에 대해 고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 귀왕객잔 이 층 창가에 앉은 손우곤은 마냥 즐거운 고민만 하고 있진 않았다.

“하아. 어쩐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마침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 층으로 부대주 차무진이 헐레벌떡 올라왔다.

“대주님! 대주님!”

“여기다. 왜 이리 호들갑이냐?”

“기쁜 소식입니다! 마침내 주군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무림맹 승천각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그래? 그렇구나.”

어딘지 힘이 쭉 빠진 듯한 반응에 차무진이 미간을 모았다.

“왜 그러세요?”

“뭐가?”

“어째 반응이 영 시원찮으신데요?”

“아닌데. 좋은데.”

“아닌데요?”

“그럼 뭐 춤이라도 출까?”

“허어, 무슨 고민 있으세요?”

“인생이란 고민의 연속이지.”

“흐음. 기운 좀 내시라고요. 소가주님이 도착하셨으니, 오늘 저녁에는 가주님을 만나서…….”

차무진이 괜히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마단곡의 영단을 인계해 드릴 수 있잖아요. 그럼 소가주님과 본 대의 공을 크게 생각해 주실 것 아닙니까? 금정각주님도 무한에 계시던데 아주 좋아하실 거라고요.”

“그래, 좋은 일이지…….”

“허얼. 무슨 반응이 이래요?”

차무진이 손우곤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손우곤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

차무진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큰소리쳤다.

“자, 말해보십쇼. 제가 해결해 드리지요.”

“뭘 말이냐?”

“지금 하고 계신 고민이 뭔지 말입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 아우가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지요.”

“아니, 넌 해결 못 해.”

“그러니까 뭔데요?”

“하아.”

손우곤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차무진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조만간 칠대세가회가 열린다. 거기에 본 가도 초청을 받았다더구나.”

“아…….”

그제야 차무진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칠대세가가 또 본 가를 얼마나 깔볼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주님이 그런 걸로 눈썹 하나 까딱하실 분이 아니…….”

“소가주도 함께 참석하는 자리라는구나.”

“아…….”

이번에야말로 차무진이 입을 딱 벌린 채 심각한 표정이 됐다.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손우곤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큰일이군요.”

그 성질머리 지랄 같은 남궁천이 과연 칠대세가의 염장질을 잘 넘길 수 있을까?

뭐라도 하나 깨지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손우곤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당연히 우리는 호위로 동행을 해야 할 것이야. 너희들은 밖에서 대기하겠지만 나는 황학루 안까지 들어가게 되겠지.”

“어…… 음…… 힘내십쇼.”

“무진아.”

“안 됩니다.”

“야, 뭐든 해결해 준다며? 이번에만 네가 나 대신…….”

“저는 대주가 아니잖아요? 맡은 바 역할이 다릅니다.”

“젠장, 인정머리 없는 놈.”

손우곤이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침 이 층으로 귀왕이 음식을 들고 올라왔다.

“왜들 이러고 계십니까? 오늘 주군이 돌아오셨다면서요?”

“고민거리가 있네.”

“고민이라니요? 대 창응대주님께 고민이라니. 뭡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자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세.”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칠대세가회에 소가주님이 가셔야 하네.”

그 순간 귀왕이 본분도 잊은 채 자리에 앉아 침음을 흘렸다.

“그거 큰일이군요.”

그렇게 귀왕객잔 이 층에서는 세 사람이 무거운 침묵에 잠긴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승천각 연무장의 단상에 오른 비량이 여덟 명의 생도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다들 장거리 여정으로 여독이 좀 쌓였을 텐데도 눈빛만큼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이번 임무가 생각보다 힘들었을 텐데도 잘 해주었구나. 당분간 휴식기를 가진 후에 재소집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 다들 푹 쉬도록 해.”

“수고하셨습니다!”

생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자 비량이 생글 웃었다.

“그럼 이만 해산.”

그렇게 기나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자 남은 생도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모용강과 백무극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한편 운경이 남궁천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번 여정을 통해 남궁 소협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소. 많은 것을 배웠소.”

“별말을. 운경 도장도 나름 훌륭했어.”

“하하, 고맙소. 하나 방심하지 마시오. 내 언젠가는 남궁 소협을 넘어설 테니.”

그러자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이봐, 남궁천을 넘어서기 전에 나부터 넘어서지 그래?”

“팽 소협?”

운경이 돌아서자 팽수혁이 씨근거리면서 저벅저벅 걸어왔다.

운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팽 소협도 넘어설 거요.”

의외로 운경이 순순히 인정하자, 팽수혁이 흠칫거리고는 노려보았다.

하지만 운경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분명 무연회 때만 해도 팽수혁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거의 동수를 이루거나 오히려 팽수혁이 한 수 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나저나…….

“속은 이제 괜찮소?”

“응? 뭐가?”

“아니, 왜 그, 또 배탈이 나진 않았는지…….”

“뭐라는 거야? 내가 말했지! 그때 그런 게 아니었다고! 아니,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네놈 일부러 그러는 거냐?”

“하하! 괜찮으면 됐소.”

운경이 웃어넘기면서 걸음을 옮겼다.

“저, 저 새끼!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다! 놔! 죽여버린다, 저놈!!”

팽수혁이 뒤따라가서 칼부림이라도 할 기세로 으르렁댔지만, 뒤늦게 온 유현이 겨우 말렸다.

“하하, 팽 소협이 참으세요. 운경 도장으로서는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었으니.”

“그래서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나름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유현이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자, 팽수혁이 겨우 분을 삭이며 돌아섰다.

그러다가 문득 저만치 걸어가는 남궁천을 보고는 얼른 달려갔다.

“야! 남궁천!”

“왜?”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팽수혁이 잠깐 멈칫거리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툭 던졌다.

“하나만 더 내놔라.”

“뭘?”

“그거 있잖아! 원래 내 건데 잉어 새끼가 꿀꺽한 거! 그런 거!”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팽수혁이 애써 돌려 말하자,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맡겨놨냐?”

“야! 솔직히 거길 네 덕에 가긴 했지만, 나도 돕긴 도왔잖아!”

“글쎄. 난 딱히 도움받은 기억이 없어서. 아, 살려준 기억은 난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내가 너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니 하나만 더 내놔라.”

“오오, 기적의 논리다.”

“커흠! 내가 좀 논리적이긴 하지.”

“캬아,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이 단순함. 살면서 고민은 없겠어. 도망자로서는 딱 좋은 자질인데.”

“뭐라는 거야, 도대체? 그래서 줄 거야? 말 거야?”

“부탁하는 놈이 태도하고는. 어차피 지금 나한테 없는 것 알잖아?”

“그럼 나중에 찾으면 줄 거냐?”

“글쎄. 너 하는 것 봐서.”

“이 자식이 정말……!”

“……?”

“뭘…… 해야 되는데? 어려운 일 있으면 이 형님에게 부탁하든지. 해결해 주마.”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차차 생각해 보자고.”

“야! 말을 해보라니까!”

팽수혁이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따라가려는데 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수혁아.”

“교관님?”

어쩐 일인지 비량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이따가 나 좀 보자.”

생글 웃으며 걸어가는 비량을 보며 팽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예, 뭐…… 알겠습니다.”

* * *

“교관님, 팽수혁입니다.”

문밖에서 들린 소리에 비량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팽수혁이 집무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늘 해맑은 웃음을 짓는 비량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팽수혁도 은근히 긴장했다.

‘왜 따로 부르신 거지? 설마 마단곡에 대해 물어보시려고 그러나?’

한동안 자리를 비웠을 테니 자신의 부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으리라. 만약 그렇다면 뭐라고 둘러대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비량이 서신을 하나 꺼내 보더니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팽 가주님이 부르시는구나.”

“예? 아버지가요?”

전혀 뜻밖의 말에 팽수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흑도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북쪽에서부터 세를 넓히면서 접근하는 중이라는 첩보가 있었거든. 적랑단이 하북으로 가겠지만, 현재는 사천 끝자락에 임무를 나가 있는 상태야.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위험한 상황입니까?”

팽수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들일 정도라면 분명 가벼운 상황은 아니리라.

비량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몰라. 가봐야 알겠지. 이왕이면 나도 동행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맹에 묶인 몸이라 운신이 자유롭지 않구나.”

“오늘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팽수혁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비량이 말렸다.

“이제 도착했으니 쌓인 여독 좀 풀고 출발해. 만약을 대비한 호출일 테니까.”

“아뇨, 제가 아버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저를 부르시지 않을 겁니다.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죠.”

비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조심해서 귀환해라. 무리하지 말고.”

“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팽수혁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휙 돌아섰다.

* * *

귀왕객잔 최상층의 귀빈실.

그곳에 남궁검과 남궁화, 그리고 금정각주 남궁효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남궁검 맞은편에는 남궁천이 앉아 있었고, 바로 뒤에는 손우곤이 뿌듯한 표정으로 시립해 있었다.

남궁검이 식탁에 차려진 산해진미를 한 차례 훑어보고는 무뚝뚝한 음성을 흘려냈다.

“식사나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예, 그래도 우선 드시지요. 제게 하실 말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조만간 무한에서 칠대세가회가 있을 것이다. 그 일로 잠시 무한에 들렀다. 너도 참여해야 한다.”

“그렇군요.”

“한데 창응대가 따로 떨어져 있더구나.”

“예, 제가 명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남궁천이 히죽 입매를 치켜 올린다.

거참, 영감 성격 급하시긴.

이왕 배 좀 채우고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했더니, 이래서야 먼저 놀라게 해드려야 하나?

‘이거, 감당하기 힘들 텐데. 흐흐!’

남궁천이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서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말씀을 드리면 식사를 못 하실지도 모릅니다.”

“사고라도 친 것이냐?”

“아뇨, 그 반대죠.”

그러자 이번엔 남궁화가 끼어들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식사를 못 한다는 거니?”

“그야…… 기분이 너무 좋아서요.”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