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만찬을 즐겨라
사양현 저잣거리로 내려온 백묘는 주변을 둘러보며 찬찬히 걷다가 어느 다루로 성큼 들어섰다.
“어서 옵쇼!”
점소이가 흔쾌히 인사하며 맞이했다.
백묘는 본능적으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는 보이차와 다과를 주문했다.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은 이유는 여차하면 달아날 수 있도록 대비한 것이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보이차와 다과를 내어왔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요?”
점소이의 말에 백묘가 젓가락을 들더니 보이차를 찍어서 탁자에 뭔가 글씨를 적었다.
명(明).
바로 불명회와 접선하기 위한 암어였다.
순간 눈살을 슬쩍 구긴 점소이가 허리를 숙이고는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소이가 돌아가고 나서 백묘는 계속 창밖을 주시하면서 반응이 오길 기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남궁천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이제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도망자가 흔히 겪는 착시 현상일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백묘는 자신의 머리가 점점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이미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면서 그녀는 조금씩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래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켜니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우선은 무림맹 사정을 파악해야겠지. 그러고 나서 적서와 만날 방법을 찾고.’
사파에서 신뢰하는 불명회라면 맹의 사정은 훤하게 꿰뚫고 있으리라.
그러라고 만든 조직이니까.
애초에 불명회는 다른 정보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무림맹에 관한 정보에만 밝은 자들이다.
이들이라면 적서와 만날 방법 정도는 충분히 찾아낼 것이다.
마침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백묘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명차’를 구입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백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일어섰다.
사내는 다루의 후문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서 나와 보니 사방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장원이 나타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간이었기에 백묘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적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보안이 허술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내가 이번에는 측간으로 들어섰다. 측간 푯말에는 관계자 외 사용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백묘가 잠시 머뭇거리자, 사내가 힐끔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가실 겁니까?”
“측간으로?”
사내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빙그레 짓는다.
백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측간이 그냥 측간은 아니겠지.
그런데 들어서고 보니 정말로 냄새나는 측간이다.
잠깐 당황하는데, 사내가 측간의 벽에 난 작은 구멍으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더니 지풍을 날리는 것 같았다.
툭!
둔탁한 소리에 이어,
그그그긍……!
놀랍게도 측간 뒷벽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열렸다.
‘굳이 꼭 이런 냄새나는 곳에다가…….’
무심코 생각을 떠올리다가 이내 백묘는 인정했다.
이 정도로 치밀하니까 그간 불명회가 발각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이리라.
누가 측간 뒷벽에 기관 장치가 되어 있을 거라고 의심이나 하겠는가?
어두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나니 좁은 복도가 한참 이어졌다.
왠지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았지만 꾹 눌러참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오니 이번에도 측간 뒷벽으로 나왔다.
아마 양쪽의 측간은 실제로 오물통을 놔두고 쓰긴 하지만, 실사용은 하지 않는 것이리라.
혹시라도 누가 볼일이라도 보고 있을 때 나타나면…….
‘더 생각하지 말자.’
괜히 주화입마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백묘는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이런 식으로 장소를 옮기는 이유는 이곳이 어딘지 알아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테니까.
행랑을 따라 잠깐 이동한 후에 사내가 안쪽을 향해 보고했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모셔라.”
안에서 착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내의 안내를 받으면서 백묘가 들어서자 주렴이 쳐진 곳 너머로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내의 그림자가 보였다.
“무슨 용무로 오셨소?”
“맹의 현재 사정을 알고 싶어서.”
백묘가 짧게 용건을 말하자, 그림자가 대꾸했다.
“현재 사정이라면 어느 정도나?”
“최대한 자세히.”
“광범위한 질문일수록 대답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 상관없는데.”
피식.
그림자가 웃더니 다시 입을 연다.
“좋소. 보수는?”
툭!
백묘가 두둑한 돈주머니를 던져두었다.
그 안에서 은자가 촤르륵 쏟아져 나왔다.
“충분하군.”
“그럼 정보를.”
“현재 맹은 반맹 백도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오. 이 정도는 알고 계실 터.”
이미 여기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난 상황이다.
하나 백묘는 금시초문이었다.
모든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남궁천이 자신을 쫓아오는지만 신경 썼기에 소문을 들을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계속.”
백묘의 말에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반맹 세력이 총공세를 펼친 상황이지만 아직까지는 무림맹이 버티고 있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야…… 천마가 보호하시니까.”
“뭐?”
이젠 천마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백묘였다.
한데 그림자가 다시 천마라는 말을 들먹이니 전신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그게 무슨……!”
“천마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 백묘여, 천마를 거부하지 마라. 진정한 천마가 맹을 비호하신다. 이는 맹을 삼키기 위함이라.”
“이런 미친! 너 뭐야?”
백묘가 벌떡 일어나서는 쥘부채를 활짝 펼쳤다.
그림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잣거리에서 산 싸구려 부채로 본좌를 상대할 것인가? 백묘여.”
“노오오옴!”
파밧!
순간 백묘가 바닥을 차면서 주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촤라라라라락!
활짝 펼쳐진 부채가 주렴을 가닥가닥 끊어내면서 그대로 그림자의 목을 베었다.
하나 그림자는 이내 허물어지듯이 사라지더니 형체를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촤르르르르르르!
끈 떨어진 주렴의 구슬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때마침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본좌는 어디에나 있다. 네가 숨 쉬는 곳 어디에나. 그것이 본좌다.”
파밧!
백묘가 얼른 돌아서며 부채를 휘둘렀지만 바닥에 떨어진 구슬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몸이 붕 떠올랐다.
“헉!”
퍼어엉!
순간 그림자가 내뻗은 일장에 백묘의 신형이 튕기듯 날아갔다.
콰장창창!
문짝까지 부수며 날아간 백묘가 안마당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저벅저벅……!
백묘가 얼른 몸을 일으켰지만, 상대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안마당에 있던 불명회원들이 가면인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엎드리더니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천마지존! 마존불패! 마도천하! 만세, 만세, 만만세!”
백묘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닥쳐! 뭔 개소리야! 내가 마교도인데 누가 누굴 보고 천마지존이라는 거야!”
“백묘여,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겠느냐? 본좌가 천마다.”
“이런 미친 새끼!”
타다닷!
티티티팅!
부채와 단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마구 터져 나왔다.
‘뭐야? 이 녀석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잖아! 정말 천마라도 되는 거야? 게다가 이건 분명한 마기!’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도 모르는 마교도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상대는 본인을 천마라고 칭하지 않았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인당혈에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점점 생각이 복잡해져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안 돼! 심력이 흔들려!’
백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동자가 흔들리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부채가 기운을 머금은 채로 하늘로 솟구쳤을 때!
슈칵!
새하얀 가면에 세로로 금이 가더니 이내 또각 부러져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너, 너, 넌……!”
백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남궁천……!”
“그래, 본좌가 바로 천마다. 백묘여. 이제는 받아들이거라.”
“말도 안……!”
그 순간 남궁천이 천마신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리자, 등 뒤로 천마혼의 형상이 솟구치듯 나타났다.
파아아아아아!
“허억!”
백묘가 이내 입에 거품을 물더니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잠시 후 남궁천이 천마혼의 기운을 갈무리하자, 사방에서 흩어져서 절을 올렸던 불명회원들이 다가왔다.
“저어…… 주군. 천마혼은 진짭니까?”
“나도 몰라. 그냥 천마신기를 운용하면 나오는 거라서.”
“그럼…… 주군은 정말 천마입니까?”
불명회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천마면 어떻고, 남궁천이면 어떤가? 나야, 나. 내가 나면 된 것 아니냐?”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닥치고 일이나 해라.”
“예, 우선 침상으로 옮겨두겠습니다. 죽진 않겠죠? 기혈이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것 같은데.”
“죽진 않아. 주화입마에 살짝 걸친 상태가 되겠지만. 자, 이거 먹이도록 하고.”
남궁천이 품에서 단환을 하나 꺼내서 던져주었다.
“이게 뭡니까?”
“당가에서 만든 청명단(聽命丹)이야.”
“아……!”
청명단은 이름 그대로 사람을 고분고분 잘 따르게 만드는 영단이었다.
보통 정신을 무기력하거나 멍청하게 만들어서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만드는 셈인데, 심지가 굳거나 내공이 심후한 자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궁천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 극에 달한 백묘에게는 이제 통할 가능성이 높았다.
‘뭐, 안 되면 죽이면 되고. 아…… 나 또 천마 같은 생각을…….’
그런데 따지고 보면 대살성 같은 것보단 천마 같은 게 낫지 않나? 뭔가 더 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참 별걸 다 해본다.
대살성이었다가 강호신룡이었다가 천마였다가.
‘그나저나 좀 더 멋져 보이는 구령은 없으려나?’
불명회에서 외친 ‘마존불패’라는 문구는 남궁천이 직접 삽입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뭔가 다 함께 외치는 구령을 듣고 있노라면 어깨에 뽕이 차오른달까?
‘은근히 중독이 된단 말이야.’
이제 백묘를 놀리며 귀신 놀음을 못하는 건 아쉽지만…….
‘천마 놀이는 계속된다.’
혼자 헤실헤실 웃고 있는데, 마침 불명회원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신 거죠?”
“왜?”
“혼자 묘한 표정으로 웃으시길래.”
“미친놈 같았냐?”
“예, 뭐. 좀…… 약간은?”
“뒈지고 싶어?”
“죄송합니다.”
이래서 천마가 웃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랫것들이 선을 넘는다.
남궁천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전서로 보낸 건?”
“아, 지금 모셔두었습니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고생했다.”
“그런데…….”
“뭐지?”
“그게 저어…… 엄청 처먹습니다!”
“엄청 처먹어?”
“예, 이러다가 지부가 거덜 날 지경입니다. 진짜 미친 듯이 처먹어요.”
“일단 방에 들어가면 백묘가 상납한 돈이 있을 거다. 그걸로 급한 대로 채워. 나머지 부족한 자금은 맹으로 돌아가는 대로 회주에게 따로 일러둘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야? 그 처먹기만 하는 거지 새끼들 모인 곳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불명회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앞장섰다.
* * *
“이 녀석들아! 뱃가죽 찢어지게 먹어라! 살면서 우리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리겠느냐? 킬킬킬! 부어라! 마셔라!”
“장로님! 대박입니다요! 이런 진수성찬은 정말 처음입니다요!”
“처음은 지랄! 지난달에도 서문세가에 생일잔치할 때 들러서 포식을 해놓고선!”
“킬킬킬! 원래 먹은 기억은 사흘 지나면 까먹는 게 거지의 참된 도리죠!”
“오호! 그건 옳구나! 킬킬!”
대청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거지들.
그들 중 가장 상석에 앉아서 가장 지저분하게 먹는 자는 다름 아닌 개방 장로 취걸개였다.
끼이이이익……!
대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누군가 들어서며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거지 선배들!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