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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442화 (441/508)

442. 풍전등화

파라라라라!

청풍이 입은 장삼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거친 소리를 냈다.

단숨에 남문각 안으로 날아든 청풍이 주변을 한 차례 스윽 둘러보았다.

고요하다.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함정이 아니라 남문을 버리고 달아난 게 분명했다.

청풍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적이 침입했는데, 방어하길 포기하고 달아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이런 무림맹은 있으나 마나지!”

차갑게 중얼거린 그의 곁으로 수하 한 명이 날렵하게 내려섰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할 줄 아는 모양입니다. 장문인에게 감히 칼을 겨눠봐야 승산이 없다는 걸 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니 지금껏 강호에서 살아남은 것일 테지.”

청풍이 싸늘한 조소를 머금고는 물었다.

“우 원주가 뚫기 까다로울 것이라고 말한 곳이 서문이었던가?”

“예, 장문인. 물론 정혜 사태가 밀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나마 삼문 중에서는 가장 치열할 것이라 했지요.”

“그럼 서문각으로 가지.”

“존명!”

말을 마친 청풍이 다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흑의인들이 새떼처럼 따랐다.

* * *

그 시각 남궁검은 빠른 걸음으로 내원의 문을 열고 외원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무림맹 내원은 부채꼴로 펼쳐진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는데, 배후에는 암벽이 버티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요새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내원에서 무려 백 개가 넘는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외원이 펼쳐지는데, 곧바로 동쪽으로 가면 동문, 서쪽으로 가면 서문, 남쪽으로 가면 남문이 나타나는 구조였다.

마침 남문 쪽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달려왔는데, 바로 남문각주 유백랑과 남문을 지키는 수문 무사들이었다.

유백랑이 계단 중간에서 남궁검을 발견하고는 급히 멈춰 서면서 포권했다.

“맹주님, 죄송합니다! 현 병력으로는 무림칠성을 상대하기에 무리란 생각이 들어 작전상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흐음.”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유백랑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그러고는 그의 뒤를 따라 온 남문각 무인들도 가만히 훑어보았다.

남문각 무인들은 저마다 맡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마침내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자네들은 남문을 포기하는 대신 맹을 지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니 위축될 것 없다. 유 각주.”

“예, 맹주님!”

“마음을 정했다면 확실히 해야 할 걸세.”

다시 말해 이쪽에 줄을 서기로 했다면 다신 변심이 없어야 할 것이란 엄중한 경고였다.

그 속뜻을 알아들은 유백랑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맹주님!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다른 쪽 상황은 어떤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남문으로 들어온 자는 곤륜의 청풍진인으로 파악됩니다. 현재 서문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알았네. 내원으로 들어가서 병력을 정비하도록 하게.”

“맹주님은…….”

하지만 남궁검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청풍이 서문으로 향했다면 우선 그쪽부터 거들어야겠군.’

그렇게 계단을 완전히 내려선 남궁검이 서문을 향해 달리려고 할 때였다.

쒸에에에엑!

어두운 허공을 가르면서 암기 세 자루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 순간 검은 바람이 휙 부는가 싶더니 그림자 하나가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재빨리 암기를 쳐냈다.

땅! 따다앙!

퍼퍼퍽!

튕겨 나간 암기가 인근 전각으로 날아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처박혔다.

촤츠츠츳!

미끄러지다시피 자세를 다잡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백무극.

그가 새파란 안광을 빛내면서 등 뒤의 남궁검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조심하거라.”

대수롭지 않은 걱정 한마디가 백무극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백무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곧이어,

쉬쉬쉬쉬쉬이익!

다시 시퍼런 대못 같은 암기가 달빛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청봉정(靑蜂釘)!’

청봉정은 청성파에서 사용하는 암기였다.

파밧!

백무극이 바닥을 차는 것과 동시에 어지러이 검을 휘둘렀다.

따다당! 따당! 따앙!

화려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날아드는 십여 개의 암기를 모두 막아냈다.

퍼퍼퍼퍽! 퍼퍼퍼퍽!

튕겨 나간 암기가 이번에도 인근의 전각과 바닥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울려댔다.

촤츠츠츠츳!

이번에도 반원을 그리듯 멈춰 선 백무극.

짝짝짝……!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달빛 아래로 한 노인이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눈매만큼은 뱀처럼 날카로운 노인. 남색 도복에는 청(靑)이라는 글자가 궁서체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가 바로 청성파 장문인 정극 진인이었다.

“과연 대단하군. 그새 호신위가 생긴 겁니까? 든든하시겠습니다, 맹주.”

“정극. 이게 무슨 짓이오?”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묻자, 정극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검을 슬쩍 들어 보였다.

백무극이 반사적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자, 남궁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신 정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정극이 입매를 비틀고는 말했다.

“서로 다 아는 사이에 무슨 그런 새삼스러운 질문을 하시는지. 어차피 뜻이 달라 가는 길도 다를 터. 괜한 시간 낭비는 하지 맙시다, 맹주.”

“정극, 이것이 그대의 뜻이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것 같습니까?”

“그도 그렇군. 하면 각오는 되어 있겠지.”

후우우우웅!

순간 남궁검의 전신에서 매서운 살기가 사방으로 훅 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다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정극도 살짝 긴장한 얼굴로 검파를 고쳐 쥐었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군.’

원래도 매서운 눈빛을 지닌 남궁검이었다. 한데 살기를 품은 남궁검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훨씬 살벌한 인상이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다고나 할까?

어지간히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정극도 남궁검의 눈빛을 마주하니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흥, 그래 봐야 최후의 발악일 터.’

정극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예전부터 남궁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나 남궁가가 기울고 나서부터는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든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붙어보고 싶었던 상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궁금하군.’

여차하면 문도들이 가세하면서 자신을 돕긴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전에 한 번 파악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을 마친 정극이 수신호를 내리자, 청성파 문도들 중 정예 다섯 명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파바바밧!

그러자 이번엔 백무극이 다시 바닥을 차고는 날아올랐다.

남궁검을 노리고 날아간 것이지만, 웬 새파란 젊은 무인이 마주쳐 오자 청성파 무인들이 내심 가소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천의 동기인가? 손자의 친구라는 이유로 호신위로 삼다니. 이런 인사 비리 때문에 맹이 썩어가는 거겠지!’

그런데 백무극의 검첨이 살짝 흔들리는 순간,

스스슷!

“어엇?”

“뭐지?”

마주쳐 가던 청성파 문도들이 잠시 당황하며 멈칫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 백무극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이다.

그 찰나의 틈을 타서 백무극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쉬이이잇, 쉬컥!

“크억!”

“뭐, 뭐얏!”

깜짝 놀란 문도 하나가 백무극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러갔다. 청성파의 검법인 청풍검이었다.

그렇게 날카롭게 뻗은 검이 그대로 백무극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스슷.

다시 한번 백무극의 신형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한 치 정도의 차이였지만, 그 한 치 때문에 허공을 내질렀다간 되레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는 백무극이 환술을 사용한 것이었지만, 백무극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청성파 문도들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적들이 잠시 멈칫거린 틈이 백무극에게는 회심의 기회였다.

쉬쉬쉭!

촤촤촤아악!

빛 줄기가 춤을 추면서 팔 하나가 날아가고, 옆구리가 베이고, 허벅지에 검이 깊숙이 박혔다.

“크아아악!”

“아악!”

“끄으으윽!”

청성파 문도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자, 지켜보던 정극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저, 저……! 어디서 돼먹지도 않은 사술을 써서는……!”

한데 더 놀라운 것은 지금껏 과묵하기만 하던 백무극이 턱을 치켜들더니 혀를 길게 빼물고는 히죽 웃는 게 아닌가?

“어이, 영감탱이! 우리 맹주님과 검을 겨루려면 정당하게 덤비라고. 어딜 애새끼들 내보내서 간 보려고 하시나? 그러다가 나한테 먼저 뒈지는 수가 있어.”

정말이지 조금 전 그 호신위가 맞나 싶을 정도로 파락호 같은 태도였다.

정극이 멍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백무극이 주변을 휘이 둘러보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다들 잘 들어라. 누구라도 맹주님을 방해한다면 내 손에 먼저 뒈질 줄 알아. 카아아악, 퉷!”

보면 볼수록 호신위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행동.

일부러 저런 설정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게 다들 얼어붙은 가운데 남궁검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백무극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다. 물러나 있어라.”

“예, 맹주님.”

백무극은 언제 파락호처럼 굴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얌전히 돌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정극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남궁검을 보았다.

“맹주, 독특한 호위를 두셨소. 뭐, 사파 나부랭이들을 곁에 두는 맹주와 썩 어울리는 조합이기도 하지만.”

“정극. 긴말 할 것 없다. 와라.”

“맹주……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오?”

“…….”

“흥! 좋소. 어디 한 번 그 잘난 남궁가의 검법을 견식해 보지!”

파아앙!

순간 정극이 청성파의 대표적인 신법인 세류표(細柳飄)를 펼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어찌나 빠른지 그의 몸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면서 남궁검을 향해 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남궁검이 반사적으로 내지른 검과 정극의 검이 서로 맞닿았다.

쩌어어어어엉!

순간 정극이 눈을 부릅떴다.

콰콰콰콰콰콰!

믿을 수 없게도 남궁검의 검이 자신의 검을 검첨에서부터 조각조각 부수면서 파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콰콰콰콰콰콰!

마침내 검파까지 파고든 검봉이 그대로 손을 보호하는 검동(劍銅)을 때렸다.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정극의 전신을 훑으면서 지나갔다. 마치 뇌전이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크으으읍!”

촤촤촤촤촤아아악!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며 핏줄기가 튄다.

“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정극이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런데…….

“헉, 헉, 헉…….”

멀쩡하게 서서 눈을 부릅뜬 정극이 마주 서 검을 내밀고 있는 남궁검을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남궁검과 자신은 서로 검봉을 정확히 맞댄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환영……?’

검과 검이 맞닿는 순간부터 검신이 부서지고 온몸이 찢어지는 것까지 모두 환영이었단 말인가?

때론 고수의 싸움에서 지독한 살기 때문에 죽음의 환영을 겪기도 한다.

한데 자신과 남궁검의 무위가 그 정도로 차이 난단 말인가?

게다가 전신을 훑었던 그 기운은?

그것마저 환영이란 말인가?

마치 그 대답을 해주듯, 다음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정극의 옷이 갈가리 찢어지며 날아갔다.

촤촤촤촤아악!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부릅 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곧바로 깨우치지 못한 정극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으응?”

뒤늦게 자신이 알몸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정극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으허어억!”

그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남궁검을 올려다보았다.

‘이, 이자가 정말 남궁검이란 말인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정극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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