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41화 (440/508)

441. 풍전등화

마침 남문각 수문장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각주님! 어서 명령을……!”

“침착해라. 섣불리 나서서 막아봐야 전부 궤멸할 수도 있다.”

유백랑의 말에 수문장이 흠칫거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로서는 유백랑의 이런 행동을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패력궁 천무류를 남문각주로 모시던 그였다.

비록 남문각이 한직 중에서도 한직이라지만, 천무류는 맹에 충성스러운 무인이었다.

때문에 전시 상황이 아님에도 남문각의 무인들은 항시 기강이 다잡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적이 처들어오는 상황에서 맞서 싸우지 말라니?

애초에 남문각주로 유백랑이 발령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수문장이었다.

한데 지금 유백랑의 태도를 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설마 적을 앞에 두고 쫄아버린 건가? 그렇다면 내 정말이지……!’

수문장이 슬금슬금 손을 옆구리로 가져갔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버릴 기세였다.

그나마 단지 쫄아버린 거라면 인간적인 연민이라도 품어줄 수 있다.

하지만 적에게 투항하거나 협조할 생각까지 품는 거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수문장의 왼손이 엄지로 검파를 슬쩍 밀어 올렸다. 동시에 싸늘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유백랑에게 물었다.

“하면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이대로 두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네는 적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글쎄요. 흑무련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사실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당장 정체불명의 적이 나타난 상황에서 여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짐작도 안 간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감히 무림맹을 친단 말인가?

유백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마교도 아닐 것이다.”

“하면 각주님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교도, 사파도 아니라면 어디겠나? 현 무림맹주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곳이?”

“끄음…… 설마……?”

“그래, 우 원주님의 계략일 수도 있다고 보네.”

“장로원에서!”

수문장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유백랑의 말을 듣자마자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유 각주님은 애초에 당주 시절부터 장로원과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아는데…… 도대체 뭐지? 지금 봐서는 장로원과 한패가 아닌 것 같고…….’

수문장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물었다.

“하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만약 이 난이 정말 우 원주님의 계략이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일 걸세. 우 원주님은 철두철미한 분이기 때문에 어중이떠중이를 모아서 치는 것이 아닐 게야. 최소한 저기에는 무림칠성급 절대고수가 포함되어 있을 걸세.”

“……!”

“알겠나? 어쩌면 지난번에 본 맹을 방문했던 구파일방의 명숙들일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 섣불리 싸우다간 전멸하고 말 걸세. 그러니 우선 자네는 수문 무사들을 이끌고 당장 내원으로 가게!”

“하지만 적들이…….”

“지금 당장 나서서 싸워봐야 개죽음이 될 뿐이야. 여기 있는 무인들로 무림칠성을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차라리 내원으로 가서 이후 힘을 보태는 것이 낫네.”

수문장은 유백랑의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여겼다.

확실히 자신들만으로 무림칠성을 막을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 유백랑의 판단은 실리적으로 옳았다.

그는 잠시 우위광의 편에 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엇보다 우위광이 한 번 배신을 한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 것 같지도 않았기에.

“참, 맹주님께 급보는 보냈는가?”

“비상종이 울린 순간 이미 조치가 취해졌을 겁니다.”

“알겠네. 그럼 우선 병력을 내원으로 물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각주님!”

대답을 마친 수문장이 곧장 달려갔다.

무림맹 내원은 사실 내성(內城)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견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외부 침입이 발생했을 때는 내성에서 농성전을 치르는 게 훨씬 유리했다.

‘만약 우 원주가 실권을 잡으면 나는 그날로 끝이다. 남궁천, 그놈이 얄밉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돌이킬 수가 없으니…….’

마음을 굳힌 유백랑이 내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맹주실에서 차를 마시던 남궁검과 천무류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남궁검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구려.”

“맹주께서도 들으셨군요.”

천무류의 말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먼 곳에서 아스라이 들리는 비상종 소리.

하나 상당한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은 비상종이 울리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총관이 문을 벌컥 열고 달려 들어왔다.

“맹주님! 비상입니다! 적이 침입했습니다!”

“적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외원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남문각은 곧장 내원으로 후퇴한 것으로 압니다. 동문과 서문은 맞서 싸우는 중이나 곧 뚫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군. 남문각주가 제법 눈치가 있었어.”

“그래도 당주 자리까지 오른 자였지 않습니까? 눈치 하나는 빠를 만도 하지요.”

천무류의 말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천이가 말한 대로 되었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하나 우 원주의 발악은 이미 맹주께서도 예견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시도할 줄은 몰랐소.”

“저도 그렇습니다. 우선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쪽에서도 대책을 세워야겠지요. 바로 일어나겠습니다.”

유백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주 일어섰다.

“천 장로, 장로원을 부탁드리겠소. 완전히 봉쇄해야 할 거요.”

“장로원 쪽은 염려 마십시오. 제게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고맙소. 든든하구려. 현재까지 포섭한 장로는 몇 명 정도나 되오?”

“제가 재주가 얕아서 많은 인원은 아닙니다. 현재까지 믿을 수 있는 장로는 여덟입니다.”

“그 정도며 일단 팔방으로 봉쇄할 수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맹주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그럼 갑시다.”

말을 마친 남궁검이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 * *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우위광이 어느 순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방금 그 소리는……!’

분명 희미하지만 비상종 소리였다. 만약 전신의 감각을 깨워두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

하나 이날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우위광은 비상종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됐다! 거사가 시작됐다!’

마침 장로원 안마당으로 달려온 시종 하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장로님들! 큰일 났습니다요! 지금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맹을 침입했습니다요!”

우위광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박차고 안마당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각자의 방에 머물고 있던 다른 장로들까지 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들 모두 이미 우위광과 입을 맞춘 자들이었다. 장로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우위광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말했다.

“여러분, 드디어 거사가 시작된 모양이오. 우리도 도우러 갑시다.”

“좋습니다. 우리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야지요. 맹주는 오늘부로 골방 늙은이들이라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겁니다.”

“자자, 갑시다! 늙은 생강이 맵다는 걸 깨닫게 해줍시다!”

그렇게 장로들이 안마당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바깥으로 빠져 있던 여덟 명의 장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더니 다른 장로들에게 겨누는 게 아닌가?

채채챙!

“다들 멈추시오!”

“이곳을 벗어나려는 자는 내 검을 받아야 할 거요.”

“다 늙어서 오랜만에 검을 뽑아보는구려.”

느닷없는 상황에 우위광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자네들은…….”

“미안하게 됐소, 원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짓인가! 뜻을 모으기로 진작 약조하지 않았던가!”

“말하지 않았소? 우린 권력에 욕심이 없소. 다만 협의를 좇을 뿐이외다. 당신들, 정말 스스로에게 떳떳하오?”

검을 뽑은 장로 중 한 명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우위광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내게 반기를 들기로…….”

말을 꺼내던 우위광이 흠칫거리고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 자네들을 구슬린 것은 분명 패력궁일 테지. 그러고 보니 패력궁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자 하늘에서 목소리가 떨어지듯 사방에서 웅혼한 음성이 울렸다.

[나를 찾으셨소? 원주.]

“……!”

목소리의 향방을 알 수 없는 육합전성이었다.

게다가 꽤나 먼 곳에서 말하는 것인지, 천리전음의 기술이 섞여 있는 듯했다.

“패력궁…….”

우위광이 신음처럼 말하자, 패력궁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다들 전각으로 들어가시오. 이후로 한 발짝이라도 나오는 자는 머리에 구멍이 뚫릴 것이오.]

“천 장로. 당신은 현 무림맹이 정상으로 보이시오? 사파 나부랭이가 맹 내에 들어와서 설쳐대는 이 상황이?”

우위광이 은근한 노기까지 담으며 말하자, 다시금 천무류의 차분한 음성이 이어졌다.

[두 번 말하지 않겠소. 맹의 문제는 추후에 논의해 봅시다. 들어가시오, 원주.]

“천 장로!”

쒸에에에에에에엑! 콰자악!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도 모를 화살이 전각 기둥을 완전히 관통한 채로 틀어박혔다.

그 무시무시한 힘을 보고 나니 장로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원, 원주님. 우선 들어갑시다. 이후에 대책을 세우심이…….”

“천 장로가 저렇게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선은 몸을 사리고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끄음.”

우위광이 무거운 침음을 흘리고는 몸을 휙 돌렸다.

확실히 천무류의 화살은 얕볼 수 없다. 언제 어디에서 날아들지 알 수 없다.

천무류의 화살은 직선으로 날지 않는다. 곡선으로 휘는 것은 기본이다.

‘젠장!’

우위광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남궁검은 분명 내원을 잠그려고 할 텐데, 그때 문을 점령하여 열어줄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장로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리라.

‘어쩔 수 없이 무림칠성의 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건가?’

* * *

흑무련 혈검단주 백시랑이 여신우를 불쑥 찾아왔다.

“부련주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

“무림맹이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격을? 누구한테?”

여신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백시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본 련은 아니고, 마교 놈들도 아닌 것 같으니…… 아무래도 정파 놈들이 아닐까 싶은데.”

“흐음. 그런데 그게 왜 큰일이야? 자기들끼리 밥그릇 싸움한다는데.”

“어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안 그래도 지루하던 차에 오히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여기 며칠 지내면서 소속감이라도 가진 모양입니다.”

백시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큰일 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교와 싸우는 순간을 대비해서 화친을 맺었지만, 정파 놈들의 밥그릇 싸움까지 끼어들 이유가 없지 않나?

여신우가 피식 웃었다.

“가자.”

“어딜 말입니까?”

“구경하러. 자고로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고, 남의 집 밥그릇 싸움이 제일 흥미로운 법이지. 어디 전망 좋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제대로 구경해 보자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백시랑이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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