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 좀 뒈져라! 좀!
“끄으음.”
안천길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차가운 바람이 뺨에 부딪혀 왔다.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별빛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는 잠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서 눈만 몇 차례 끔뻑였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다가 돌연 명치에서부터 솟구치는 통증과 구역질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크웁! 쿠웨에엑! 우웨에엑!”
한참이나 토악질을 하던 안천길이 바닥을 짚고 헐떡이다가 순간 균형을 잃고 기우뚱 쓰러졌다.
“어어?”
털썩 쓰러진 안천길이 얼른 바닥을 붙들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세상이 기울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기왓장이 얹힌 전각 지붕 위였다.
“이, 이게……?”
머리를 흔들고는 겨우 정신을 차린 안천길이 뒤늦게 기척을 눈치채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부곡주……!”
“정신이 좀 드셨소?”
“끄으으. 머리가 아프오.”
“그러게 맹독이 든 술을 대책 없이 벌컥벌컥 마시니 그 모양이지 않소? 쯧쯧.”
“끄으윽.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소?”
“한 시진쯤 됐소.”
“본 사람은 없고?”
“그나마 초저녁이어서 본 사람은 없소.”
“하아.”
안천길이 털썩 주저앉아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낯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남궁천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건만, 오히려 자신이 황천길을 건널 뻔하지 않았나?
천운을 타고 태어난 것 같다더니, 정말 남궁천은 하늘이 지켜주는 자란 말인가?
‘젠장! 무슨 말도 안 되는!’
안천길이 눈을 질끈 감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끝이 없는 법이다.
더구나 자신은 운을 믿지 않는 사내였다.
‘운이 좋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겸손을 가장하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 ‘운’으로 보이는 현상 이면에 처절한 희생이 따른다.
자신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 호법당주가 된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던가?
온갖 더러운 짓을 대신해 주고, 구린내를 풍기는 돈을 갖다 바치고, 두 손이 발바닥이 되도록 비벼가며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그렇게 호법당주가 된 후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세상은 그런 곳이다.
그런데 뭐? 천운?
‘그런 게 어디 있어!’
까드득!
안천길이 어금니를 가는데, 마침 옆으로 묵직한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안천길이 눈살을 찌푸리고 주머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자, 부곡주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환불 금액이오. 오백만 냥.”
무심코 돈주머니를 들던 안천길이 흠칫거리고는 부곡주를 노려보았다.
“오백만? 어째서 오백만 냥이오? 나는 분명히 의뢰금으로 천만 냥을 지불한 것 같은데!”
“설마 시치미 떼는 거요? 황천길로 다시 보내 드릴까?”
“뭣이? 어디서 건방진……!”
“이보시오, 당주 나리.”
“……?”
“정말 기억 안 나시오? 당신이 지금 여기서 깨어난 것도 천운 같소?”
“대체 뭔 소리를 하려는 거요?”
“허참, 맹독을 처먹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해독제를 썼다는 것 아니겠소?”
“아……!”
“일살이 분명히 알아듣도록 말했다던데. 오백만 냥이라고.”
그제야 안천길은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다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던 고통.
정말이지 지독한 맹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독제 하나가 오백만 냥씩이나 한다고?”
안천길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부곡주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단도를 꺼내 들고는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사람이 이렇다니까. 죽어갈 때는 세상 못할 짓이 없는 것처럼 굴다가 기껏 살려주면 맘이 싹 바뀌지. 우리 이러지 맙시다. 이왕 살아났으면 남은 생도 기분 좋게 출발하셔야지.”
“아무리 그래도……!”
“뭐 비싼 게 사실이긴 하오. 하지만 독보다 구하기 어려운 게 해독제요. 독을 열 개 만들면 해독제는 하나 만들 정도지. 특히나 우리 같은 살수들은 해독제를 쓸 일이 극히 드물고. 그러다 보니 도매가가 아니라 소매가로 책정한 거요. 아시겠소? 거, 죽어가는 목숨 건져 올려 주었으면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빈정 상하게 하지 맙시다.”
“끄음…….”
“그 해독제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것이었소. 근데 그걸 홀딱 처드셨으니 그 정도 값은 내셔야겠소. 아니, 도통 당주 나리 목숨이 오백만 냥보다도 못한 푼돈 값이오? 그건 아니잖소?”
안천길이 눈에 힘을 주고는 부곡주를 노려보았다.
이놈의 혀에 기름칠이 된 것인지 말발이 기가 막힌다.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안천길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곡주가 말했다.
“거, 성질 좀 죽이시오. 괜히 독주를 벌컥벌컥 처드셔가지고 순식간에 저승길 건널 뻔하지 않았소이까? 강호에서는 이슬방울도 조심하라는데, 그걸 그렇게 마셔댔으니…… 쯧쯧.”
“잔소리도 길면 지겹네.”
안천길이 딱딱한 표정으로 받아치고는 오백만 냥을 품에 갈무리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니까.
엄밀히 따져 오백만 냥은 해독제 값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구한 값으로 봐야 하리라.
‘제기랄!’
안천길이 욕지거리를 삼키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독기가 몸에 남아 있는 탓인지 머리가 어질해 순간 균형을 잃을 뻔했다.
부곡주가 얼른 부축하며 말했다.
“거,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일세.”
“흥! 놓으시오!”
안천길이 부곡주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도 머릿속에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안천길을 물끄러미 보던 부곡주가 물었다.
“이제 의뢰는 포기할 거요?”
“흥! 더 이상 살곡에는 맡기지 않을 생각이오!”
“흐음. 이 바닥에서 우리보다 나은 전문가는 없을 텐데.”
“정 없으면 내가 직접 하지.”
“결국 포기하시는 거군.”
“이익! 누가 포기를……!”
“아아, 괜찮소. 포기할 수도 있지. 사실 남궁천은 하늘이 보호하는 자니까.”
“시끄럽소! 누가 하늘이 보호해? 세상에 그런 자가 어디에 있소? 그저 운이 나빴던 거지.”
“정말 그리 생각하시오?”
“그렇소.”
“그럼 역시 의뢰를 포기할 필요가 없지 않소?”
“글쎄, 포기가 아니라니까!”
“그럼 다시 의뢰하시는 걸로?”
“당신들한테는 안 할 거요!”
“역시 포기군.”
“거, 사람 말을 좀!”
다시 발끈하던 안천길이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느끼고는 숨을 삼켰다.
이상하게 화가 치밀고 정신이 몽롱했다.
독기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부곡주가 혀를 차며 말했다.
“지금 독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것 같소. 그 잔기운이 다 사라지려면 하루는 걸릴 거요.”
“후우우. 아무튼 의뢰는 여기까지요.”
“그렇구려. 하긴 천운을 타고난 자를 죽이는 게 쉽진 않지. 어쨌거나 미안하게 됐소. 그렇지만 조금 아쉽긴 하군.”
“뭐가 아쉽다는 거요?”
“실은 당주께서 다시 의뢰를 맡긴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를 해보려고 했거든.”
“마지막으로?”
“그렇소.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서려고 했소.”
“부곡주가 직접?”
“그렇소. 물론 내가 나선다고 해도 천운을 타고난 녀석을 제거할 수 있으리란 확신은 없소.”
“한데?”
“그 운이 통하지 않을 환경으로 밀어 넣는 게 중요하지.”
“그게 뭐요?”
“녀석의 운이 통하지 않을 상극인 환경에 남궁천을 밀어넣는 거요. 그 후에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었소. 그럼 십중팔구는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소.”
“상극인 환경이라.”
“어쨌거나 의뢰를 포기하신다니 그만 됐소. 우리도 괜한 위험을 감수해 가며 굳이 끝까지 맡을 필요는 없지. 사실 이번 의뢰는 득보단 실이 많은 편이었으니까.”
“흐음.”
“그럼 살펴 가시오. 나도 이만 가보겠소.”
부곡주가 손을 흔들고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지붕을 박차고 날아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안천길이 묵직한 목소리로 부곡주를 붙들었다.
부곡주가 흘깃 돌아보았다.
“뭐요?”
“정말 이번에는 그 남궁천을 죽일 수 있소?”
“에이, 됐소. 의뢰자가 이미 의심으로 가득하면 될 일도 안 되오. 그냥 포기합시다. 깔끔하게. 남궁천은 이대로 승승장구할 거요. 천운을 타고 태어났으니까. 그 운이 더 커지기 전에 막는 게 좋긴 한데, 우리도 고생이고, 당주도 고생이니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이왕이면 남궁천과 사이좋게 지내보시오.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누가 알겠소? 그럼 이만 가겠소.”
“기다려 보시오.”
“어허, 욕심이 과하면 일을 그르치는…….”
“얼마요?”
“으음?”
“이번엔 얼마요?”
이쯤 되자 부곡주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곧 태연한 척 표정을 다스리며 대꾸했다.
“뭐, 똑같소. 곱절이니까 이번엔 이천만 냥이오.”
“이천만 냥…….”
안천길이 신음처럼 말을 곱씹었다.
부곡주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좀 많을 거요. 돈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이번에 시도하면 확실히 남궁천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여기까지 합시다. 그럼 이만.”
“잠깐 기다려 보시오!”
안천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부곡주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거참, 미련은 그만…….”
“정말 죽일 수 있소?”
“흐음?”
안천길이 칼날 같은 눈빛으로 부곡주를 노려보며 재차 물었다.
“다시 묻겠소. 정말 남궁천 그놈을 죽일 수 있소? 만독불침이더라도?”
“만독불침이지만 금강불괴는 아니지 않소?”
“…….”
“호법당주.”
“……?”
“나, 살곡 부곡주요. 밥 먹다가도 사람 모가지 따고, 똥 싸다가도 독침 쏘는 사내가 나요. 그런 내가 직접 나선다는 거요. 이천만 냥 값어치는 해야지.”
안천길이 흔들리는 눈으로 부곡주를 보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었다.
독기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사고하고 있는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남궁천을 미치도록 죽이고 싶다는 점.
남궁천만 없다면 자신이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을 거라는 점!
안천길이 어금니를 뿌드득 갈고는 입을 열었다.
“의뢰하겠소.”
“흐음.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이번엔 부곡주가 직접 나선다고 하지 않았소? 의뢰하겠소.”
“자금이 되시겠소?”
“어떻게든 마련해 주지. 닷새 안으로 해결하겠소.”
“호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보시오. 상극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 무슨 뜻이오?”
“남궁천에게 지금 가장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 누구겠소?”
말을 꺼낸 부곡주의 삭막한 눈빛이 안천길을 물끄러미 본다.
안천길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말이오?”
“그렇소. 조만간 집에서 연회를 열도록 하시오. 그곳으로 남궁천을 초대하시오. 그럼 내가 직접 살수들을 이끌고 남궁천을 제거하도록 하겠소.”
“내 집에서?”
“그렇소. 혹여나 걱정 마시오. 당주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입어서 의심받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처리해 줄 테니. 남궁천과 상극의 환경. 그건 바로 당주의 집 안마당이오. 그곳에서만큼은 당신이 가진 기운이 천운도 밀어낼 거요.”
확실히 자신의 집안이라면 여러 변수를 최소화할 수는 있으리라.
안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마지막으로 살곡을 한 번 믿어보지.”
“돈부터 구하시오. 적지 않은 돈이니까 꽤 힘들 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요.”
안천길이 툭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의 핏발 서린 눈동자가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이젠 제발 좀 뒈져라! 남궁천!’
* * *
시커먼 바위로 뒤덮인 이 협곡을 사람들은 현암곡(玄暗谷)이라 불렀다.
풀포기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삼간 땅.
그곳에 옷가지가 온통 찢어지고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소년이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년은 저만치 성처럼 우뚝 솟은 바위를 보더니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띠웠다.
십만대산의 현암곡.
마침내 긴 여정 끝에 여기까지 도착한 소공마가 지친 몸을 털썩 주저앉히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돌아왔네, 니미럴.”
아마도 교주한테 잔소리깨나 들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