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부채질
서산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석양이 무한을 물들였다.
무림맹 남문각 난간에서는 무한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특히나 노을에 젖은 거리는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저만치 우뚝 치솟은 황학루까지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문각주 천무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노을 지는 무한의 전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침 인기척이 들리더니 난간으로 남궁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슬쩍 몸을 돌렸던 천무류가 다시 난간 너머의 전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왔는가?”
“예, 경치가 아름답군요.”
“이 시간에 여기서 무한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한다네.”
천무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짓으로 옆자리를 권했다.
남궁천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요?”
“맹 쇄신을 위해 힘쓰느라 바쁘신 적랑단주님을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고맙군.”
천무류가 희미하게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남궁천의 잔을 채워주었다.
“들게나.”
“감사합니다.”
“요즘 꽤나 바쁜 것 같더군.”
“아무래도 여러 조직이 기존의 체제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반발이 좀 있네요.”
“묵 맹주가 워낙 오래 다스렸으니. 원래 고인 물이 썩는 법이지. 물론 이렇게까지 썩어 있을 줄은 몰랐네. 늙으니 둔해진 모양일세.”
“패력궁이 둔해졌다고 하면 세상이 웃을 겁니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네. 참, 호법당주가 살곡에 의뢰를 했다지?”
“예.”
“그자가 살곡주를 모르는군. 후후.”
천무류가 너털웃음을 흘리자,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잖아도 모용강을 통해서 슬쩍 떠봤는데, 아직 모르더군요.”
“그럴 걸세. 전임 맹주는 자신에게 치부가 될 만한 것은 최측근이 아닌 이상 공유를 하지 않으려고 했을 테니까. 구린 게 많은 사람일수록 타인을 믿지 못하는 법이지.”
“하지만 천 각주님께는 알리지 않았습니까?”
남궁천이 짓궂은 표정을 짓자, 천무류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일 걸세. 아마 자네가 살곡주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날 이용하려고 했겠지. 난 잠시나마 묵천악의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셈이고.”
만약 묵천악이 살아 있었더라면 뜨끔할 이야기였다.
확실히 묵천악은 살곡을 이용하면서도 세세한 과정까지 다른 이들과 공유하진 않았으니까.
‘뭐, 그 덕분에 이번 일에 잘 이용할 수 있으니 나로선 좋은 거지만.’
천무류가 남궁천을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매사 조심하시게. 세상은 자네 생각보다 훨씬 비열할 테니까.”
“…….”
‘영감, 걱정 고맙소. 한데 그 비열한 세상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느낀 사람이 바로 나일 거요.’
남궁천이 속내를 삼키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마지막 인사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후후.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빠르군. 사실 오늘 자네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할 말이 있어서네.”
“안 됩니다.”
“으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천무류가 미간을 좁히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제게 반가운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아서요.”
“하하.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누가 보면 평생 다른 사람 눈치만 살피며 산 사람인 줄 알겠어.”
‘그게 사실이지. 영감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그리 살았소.’
남궁천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천무류가 시선을 들어 난간 너머의 전경을 보았다.
이제 타오르는 노을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예전엔 이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네. 겨울보다는 여름을 좋아했고, 해질 무렵보다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을 좋아했지.”
“…….”
“한데 요즘은 이렇게 하루가 정돈되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네.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답습니다.”
“자네라면 왠지 노을 지는 거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천무류의 말대로 남궁천은 노을 지는 거리를 아름답게 보았다. 실제로 그는 노을을 좋아했다.
전생에 노을을 볼 때면 늘 같은 생각을 떠올리곤 했다.
‘오늘 하루도 견뎌냈다.’
그렇게 노을을 볼 때마다 살아 있음을 실감하곤 했다.
도망자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벌건 대낮보다는 어두운 밤이 편하기도 했고.
잠깐의 상념에 빠진 남궁천의 귀에 천무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따라 이 노을이 좋은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 그리고 결론을 내렸네. 내 인생도 이제 황혼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 서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은퇴를 생각하시는군요.”
천무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긴 세월 남문각주로 지냈네. 이렇게 난간에서 무한의 전경을 보며 이 평화를 조용히 지켜보겠다고 생각했지. 한데 바로 등 뒤에서 일어나는 풍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명예로운 은퇴는 글러먹었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은퇴하지 마시죠.”
“자네가 날 높이 평하는 건 알고 있으나…….”
“세상 누가 무림칠성을 평가하겠습니까? 저는 천 각주님을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울림이 있었을까?
천무류가 조금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의지라. 자네가 누군가를 의지한다고 말할 줄은 몰랐군. 뭐든 자네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남궁천도 말을 뱉고 나서 조금은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다는 말을 순순히 할 줄은 몰랐기에.
‘하지만 나쁘지 않군.’
그만큼 상대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던가? 전생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다.
‘빌어먹을 노을이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젖게 만드네.’
괜히 애꿎은 노을 탓을 하면서 남궁천이 천무류를 물끄러미 보았다.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는 건 어떻습니까?”
“한 걸음씩 양보라? 허허, 내 은퇴를 두고도 지금 거래를 하자는 건가? 어찌 보면 참으로 자네답군.”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볼 때 아쉬움도 많고 회의감도 드실 겁니다. 각주님의 성품상 책임감도 느끼실 테고, 일선에서 물러나 유유자적 편히 지내고 싶다는 생각도 하실 것 같군요.”
“이젠 독심술인가?”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시기엔 너무 뛰어나시지 않습니까?”
“흐음. 그렇게까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나를 붙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붙들지 않습니다. 은퇴하시지요.”
“흐음?”
“대신.”
“대신?”
“장로원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남궁천이 씨익 웃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천무류가 곧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 제 발로 걸려든 셈이구먼. 설마 내가 은퇴할 것까지 자네는 예상을 한 것인가?”
“그럴 리가요. 저는 각주님이 지금 이대로 머무셔도 대찬성입니다. 하나 이왕 은퇴를 하시겠다면 장로원으로 들어가 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맹주님도 어쩌질 못하는 곳이 바로 장로원이니까요. 하지만 각주님이 장로원으로 들어가 주신다면 본 맹을 개혁하는 데 큰 힘이 될 겁니다.”
“흐음. 이거 왠지 혹을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인 기분이군.”
“등 뒤의 풍랑을 보지 못했던 실수를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허허, 역시 자네는 못 당하겠어. 하면 은퇴할 시기는?”
“곧 정해지실 겁니다.”
남궁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뭐? 천운을 타고 태어나?
같잖은 소리!
남궁천이 불사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곡주의 말은 변명일 뿐이다.
안천길은 방갓을 눌러쓰면서 내심 혀를 찼다.
‘살곡도 이젠 예전만 못한 게지.’
물론 살수들이 운에 예민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대체로 살행을 나가기 전에 접시가 깨진다거나, 젓가락이 짝짝이로 놓여 있을 때는 수개월 세워둔 계획도 변경한다고 할 정도니까.
하지만 남궁천이 무림칠성도 아니고. 겹겹이 호위를 받는 고관대작도 아닌데 그리 까다롭게 굴다니.
“뭐, 직접 보면 알 테지.”
마침내 오늘이다.
살곡이 약조한 날이다.
오늘 하루 내내 살행을 시도한다고 했으니 두고 보면 알 터다.
동경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한 안천길이 다부진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그는 맹을 벗어나서 인근의 객잔으로 향했다. 무림맹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사전 조사에 의하면 남궁천은 항시 이곳을 지나친다고 하니 오늘 여기서 기다릴 참이었다.
야외 탁자에 앉아서 국수를 주문하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말로 남궁천이 무림맹 정문에서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국수 나왔습니다요!”
마침 점소이가 뜨끈한 국수 한 그릇을 내려두었지만, 안천길은 방갓을 깊이 눌러쓰고는 은자 한 냥을 탁자에 올려두었다.
“국수는 자네가 먹게. 갑자기 일이 생겼군.”
“에……?”
영문을 몰라 눈을 멀뚱멀뚱 뜬 점소이를 뒤로한 채 안천길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남궁천의 뒤를 천천히 밟아갔다.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한 채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서 걸었다.
남궁천이 아무리 기감이 예민하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뭐, 사실 눈치챈다고 해도 문제 될 것도 없다.
자신은 그저 살행을 지켜보려고 할 뿐이지, 직접 남궁천을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나마 인사를 나누면 그만이지 않겠나?
어쨌거나 남궁천은 안천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태연히 저잣거리로 향했다.
곧 행인들로 북적거리고 호객 행위 하는 장사꾼의 목청이 귀를 따갑도록 때리는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안천길이 방갓 아래의 눈을 빛내며 우측 전각을 힐끔 보았다.
‘우선은……!’
포목점 전각 이 층.
비스듬히 열린 창문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인다.
잠시 후 남궁천이 다루 입구를 지나칠 때 저곳에서 독침 수십 발이 발사되리라.
‘남궁천, 넌 이제 뒈진 거야!’
안천길이 주먹을 콱 말아 쥐는데, 마침 남궁천이 다루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가라!’
안천길이 눈에 힘을 주는 그 순간!
“엇!”
남궁천이 돌연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으응? 왜 하필 저 순간에……!’
아니나 다를까, 하필이면 허리 숙인 남궁천의 머리 위로 독침 수십 발이 지나쳤다.
투두두둑!
눈으로 보기도 힘든 미세 침이 다루 기둥에 일렬로 나란히 박혀들었다. 이미 독침이 날아들 것을 알고 있던 안천길은 그 독침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저, 저, 저……!’
안천길이 입을 딱 벌린 가운데, 허리를 숙였던 남궁천이 철전 한 닢을 주워 들며 히죽 웃는 게 아닌가?
“호오, 이런 곳에 돈이 떨어져 있다니. 횡재했네?”
헤벌쭉 웃고 있는 남궁천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고작 철전 한 닢 때문에! 네놈이 뭐가 아쉬워서 땅에 떨어진 철전 한 닢을 보고 줍는단 말이냐!’
어이없이 암살에 실패하자 화가 난 안천길은 당장에라도 달려가 남궁천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안천길의 뇌리에 부곡주가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남궁천 그놈은 천운을 타고난 녀석 같았소.”
안천길의 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에이, 설마…….
아직 하루는 길다.
한 번은 성공할 테지!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어딘지 불안해지는 안천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