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똥줄이 탄다
삐이이익!
‘푸른 매……?’
묵천악이 눈살을 찌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푸른 매가 창공을 한 바퀴 휘돌더니 무림맹을 상징하는 깃발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몇몇 이들이 맹주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꺾어 들고는 푸른 매를 보며 감탄했다.
“오오, 저것 좀 봐. 푸른 매다!”
“색깔이 영롱하네. 아무래도 무림맹의 좋은 징조인가 봐!”
“저렇게 신기하게 생긴 매가 나타났으니 무림맹이 승승장구하겠구나!”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소리치며 반응했지만, 묵천악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매를 보며 생각했다.
‘저건…… 당가의 추향응이 아닌가?’
평소 제 주인을 따르며 인근을 배회하다가 신호를 주면 만리향을 쫓아 날아가는 영물이다.
한마디로 추향응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만리향이 묻은 자가 여기에 있거나, 저 푸른 매의 주인이 이곳에 있거나.
‘혹시 당 가주가 이곳에 온 것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당예설이 남궁천을 돕기 위해 천중산으로 갔다고 들었으니.
그러고 보니 당예설에 대한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다.
묵천악이 당우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부단주. 자네 본 가에서 지원군을 보냈다고 들었네. 그들은 무사한가?”
“말씀하신 대로 본 가에서 제 누이가 지원 인력을 끌고 천중산에 왔습니다. 하나 남궁천 단주의 배신으로 인해 제 누이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묵천악이 짐짓 충격받은 척하며 휘청거렸다.
사람들이 더욱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수록 묵천악의 기분은 점점 들떴다.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차곡차곡 진행되지 않는가?
이대로면 당가의 기세도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감히 자신을 배신하고 남궁천과 손을 잡았던 당가다.
지금은 당우기의 충성심을 이용해서 봐주고 있지만, 때가 되면 사천당가도 정리해 버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정대로 보고를 올리던 당우기가 갑자기 허리를 펴더니 천천히 일어나는 게 아닌가?
분명 조금 전까지 엎드려 절망하던 자의 태도가 아니었기에 묵천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부단주.”
“이 정도면 됐습니까?”
“뭐라?”
“지금까지 맹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보고를 올렸으니, 이 정도면 된 것 아닙니까?”
순간 묵천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새끼가 지금껏 잘하다가 갑자기 왜……?
당우기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맹주님께서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흑무련에 기습 정보를 흘릴 테니, 남궁천을 죽이고 배신자로 낙인찍으라고.”
“갈! 부단주!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인가!”
순간 묵천악의 노호성이 터져 나오자 대연무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으윽. 방금 저게 무슨 소리야?”
“부단주가 왜 저러지? 그럼 맹주님이 강호신룡을 제거하려고 했단 거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맹주님은 강호 평화를 위해서 누구보다 애쓰시는 분이잖나?”
“그렇긴 한데…… 그럼 저 부단주가 거짓말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마구 술렁이는데, 맹주가 얼른 비선향주를 불렀다.
“향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부단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
“그것은……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적랑단주가 본 맹을 배신하고 적랑단을 위험에 빠트린 것을 속하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역시 그렇군. 부단주가 아무래도 말실수를…….”
“부단주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뭐라?”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적랑단주가 본 맹을 배신하고 적랑단을 위험에 빠트린 것을 속하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단주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향주……?”
“맹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적랑단주가 본 맹을 배신하고 적랑단을 위험에 빠트린 것을 속하가 똑똑히…….”
이쯤 되자 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왜 같은 말을……?”
“지금 뭐 하는 거지?”
묵천악의 표정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확실히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향주! 그만하게!”
“맹주님께 보고드립……!”
“향주!”
“예, 맹주님.”
그제야 비선향주가 고개를 숙이고는 답했다.
그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묵천악이 미간을 좁히고는 비선향주에게 다가갔다.
“향주, 나 좀 보지.”
“예?”
비선향주가 고개를 들자 묵천악이 가만히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가쁜 호흡, 떨리는 눈동자,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눈동자가 점점 심하게 흔들리는군.’
뭔가 싸늘한 기분이 든다.
보통 저렇듯 눈동자가 떨리는 경우는 본심과 사술이 충돌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설마 향주가 사파의 사술에 당한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묵천악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부분이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향주.”
“…….”
“향주!”
“예, 맹주님.”
“잠시 진맥을 하겠네.”
비선향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묵천악이 손목을 낚아챘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는 집중하자 손끝에서 미묘한 사기가 느껴졌다.
‘확실하군!’
묵천악의 눈빛이 예리해지는 찰나, 비선향주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갔다.
“……!”
순간 묵천악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혈맥을 따라 숨은 듯이 흐르고 있던 사기가 갑자기 폭주하듯 질주하는 게 아닌가?
동시에 비선향주의 얼굴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크으으읍!”
비선향주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묵천악이 반사적으로 손목을 놓고는 물러났다.
‘방금 그건 폭기!’
틀림없다.
그토록 빠르게 질주하면서 모든 혈맥을 뒤흔드는 기운이라면…….
‘이놈들, 또 폭멸고를 쓴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기가 무섭게 비선향주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맹주님…… 끄읍!”
그것은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하나 묵천악은 비선향주의 움직임을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말았다.
“어딜!”
일갈을 터뜨린 묵천악이 반사적으로 일장을 빠르게 내뻗었다.
쉬이이이잇, 퍼어엉!
“크어억!”
그대로 명치를 얻어맞은 비선향주가 비명을 터뜨리고는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슈우우우욱, 콰다앙!
푸스스스스!
벽에 부딪친 비선향주가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즉사였다.
일순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몇몇 이들이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저 향주라는 자를 왜 맹주님이 죽인 거지?”
“그 전에 당우기 부단주의 말도 이상했잖아?”
“향주도 죽기 전엔 좀 이상했었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편 묵천악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비선향주의 시체를 보았다.
지금쯤 폭멸고가 터졌어야 했다.
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내가…… 과민했던 것인가?’
하지만 분명 손끝에서 느낀 감각은 사기였다.
어쨌거나 사람들이 더 술렁거리기 전에 진화를 해야 한다.
“여러분. 비선향주는 나를 위협…….”
그때였다.
콰다앙!
대연무장 정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존재감이 어찌나 큰지 대연무장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문 채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았다.
가장 먼저 상대를 확인한 묵천악이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너, 너는……! 네놈이…… 어떻게?”
대연무장 복판으로 거침없이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천이었다.
이쯤 되자 남궁세가를 포위했던 염라단원들도 입을 쩍 벌리고는 저마다 엉거주춤 서서 무기를 내려 버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어엇! 강호신룡이잖아?”
“남궁천 단주다! 아니, 죽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나타난 거야?”
“지금 내가 아까부터 뭘 보고 있는 거야?”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와중에 남궁천이 포권을 척 취하더니 소리쳤다.
“적랑단주, 남궁천.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하였습니다.”
“……!”
묵천악은 그야말로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지독한 인간이 아닌가?
묵천악의 뺨이 부들부들 떨렸다. 뻣뻣해진 목을 애써 돌려서 당우기를 보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그러자 이번엔 당우기가 씨익 웃더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남궁천을 죽이고 배신자로 낙인찍으라 하신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이쯤 되자 사람들도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는지, 성난 얼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상황을 설명해 주세요!”
“강호신룡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번엔 남궁천이 공력을 실어 사자후로 외쳤다.
“나는 보다시피 죽지 않았소! 모든 것은 여기 있는 맹주가 꾸민 짓이오! 날 독침으로 죽이고 배신자로 낙인찍으려고 했지!”
웅성웅성.
맹주가 뻣뻣해진 얼굴로 다그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이곳에 있었는데 어떻게 자네를 독침으로 죽인단 말인가?”
그러자 남궁천이 시선을 돌려 당우기를 보았다.
당우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남궁천. 너는 나에게 여기까지 바란 거구나.’
아직 당예설이 안전한지 알 수가 없다.
당예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해야 하리라.
당우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바로 비선향주, 저자의 짓이었소. 저자가 맹주로부터 사주를 받아 내게 독침을 쏘려고 했소. 하나 실패하고 오히려 당예설 소저가 중독되고 말았소!”
마침 남궁천이 당우기의 말을 가로질렀다.
당우기가 움찔거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자신을 제외해 준 건가?
한편 묵천악은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왜 같은 편인 수하를 죽인단 말인가!”
“그야 살인멸구죠.”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저, 저……!”
묵천악은 이미 눈앞에 남궁천이 나타났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데 만인이 보는 앞에 서서 자신이 차려둔 밥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니 마지막 남은 이성도 잃기 직전이었다.
남궁천이 그런 묵천악을 빤히 보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적랑단에게 천중산 분타를 기습하라고 지시해 놓고, 뒤로는 정보를 빼돌려 흑무련에게 흘리시고, 그 와중에 비선향주를 몰래 붙여서 절 독침으로 쏴서 죽이려고 하시고. 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단지 제가…….”
바로 코앞까지 가까워진 남궁천이 입매를 길게 찢었다.
그 얼굴이 흡사 광기에 젖은 귀신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묵천악만 겨우 알아들을 만큼 작았다.
“대살성 진천랑이라는 이유만으로. 꼭 그래야만 했나?”
“……!”
묵천악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가 손가락으로 남궁천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은 역시……! 진천랑! 이 거머리 같은 놈! 어찌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것이냐! 네놈이 정녕 마공을 익힌 것이더냐!”
“마공이라니. 마교가 들으면 섭섭할 소리를 하시는군요. 진짜 마교와 손을 잡은 자가 누군데? 그렇지 않습니까? 총관님?”
남궁천의 시선이 귀빈석 난간에서 초조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총관에게 향했다.
이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남궁천을 따라 총관에게 향했다.
불명회의 정보에 따르면 총관은 맹주의 최측근이었다. 그라면 맹주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리라.
맹주의 최측근인 총관이 하는 증언이라면 그 파급 효과가 누구보다 클 터.
물론 총관이 끝까지 맹주에게 충성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무대는 갖춰졌고, 증언할 이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 어쩔 거요? 총관께서는 맹주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시겠소?’
남궁천의 눈빛을 받은 총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총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 보면 자신의 입에 맹주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다. 맹주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최후의 한 수가 통하지 않은 그 시점부터 이미 맹주의 운명은 끝이었다.
그럼에도 남궁천이 자신을 쳐다본 이유는…….
기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만약 여기서 맹주에게 끝까지 충성한다면 자신은 맹주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리라.
하나 맹주를 놓아버린다면……?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지리라.
남궁천에게 그만한 파급 효과를 주는 대신 권력에 희생당한 총관의 비애로 포장되리라.
그렇다. 이건 일종의 거래이기도 하다.
충성을 다한 총관이 될 것인가?
양심을 지킨 총관이 될 것인가?
꿀꺽……!
총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마치 대연무장에 가득 울리는 것만 같다.
총관의 시선이 맹주에게 향했다.
그간 그와 함께 지내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럼에도 나는…… 총관이 아니라, 은마령이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총관의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맹주님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말은…….”
“…….”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