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대가리 박으시죠
대연무장은 고요했다.
비무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자들만이 목청을 높여 떠들어댈 뿐이었다.
그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비무였다.
물론 수많은 사람이 모인 만큼 작은 웅성임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숨을 죽인 채 속삭이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유지하며 관람하고 있으니, 작은 움직임도 눈에 띌 정도였다.
이런 환경은 확실히 여신우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거 움직이기가 애매한데?”
“흐음. 그러게. 그나저나 남궁천…… 진짜 대단한데?”
지강의 말에 여신우가 팔짱을 낀 채로 침묵했다.
지강이 여신우를 힐끔 돌아보았다.
여신우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조차도 상대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뜻이리라.
하긴.
눈앞에서 펼쳐지는 비무는 평생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은 그 사실을 알기나 할까?
두 사람의 비무가 어찌나 긴박감이 넘치는지 여신우와 지강은 잠시 해야 할 일을 잊을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다.
특히 지강의 경우에는 저 두 사람이 주고받는 공방이 너무 빨라서 몇 가지 동작은 놓치기도 했다.
“확실히 대살성의 아들이다. 천하제일룡의 아들이고.”
“혈육이라는 게 이렇게도 무서운 건가? 천살성의 기질을 물려받지 않은 것만은 천만 다행이네.”
지강의 말에 여신우가 코웃음을 쳤다.
“흥. 너도 알잖아. 애초에 진천랑이 천살성이 아니라는 걸. 타고난 살성 따위는 없던 자다.”
“그렇지만 대살성인 건 맞지.”
“그래, 만들어진 대살성. 그걸 만든 게 저 구렁이지.”
여신우가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귀빈석의 맹주를 보았다.
맹주는 굳은 표정으로 비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남궁천이 꽤 잘 버티고 있었기에.
“총관.”
맹주의 부름에 총관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예, 맹주님.”
“비선향을 준비하는 건 어떤가?”
“……!”
“여차하면 비선향이 개입을 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은데.”
총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사실을 눈치챈 맹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반대하는 모양이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리 서두르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 비무가 끝나면 남궁천은 내 측근이 되는 걸세.”
“그렇지요. 하나 가까이에 두고 보면 더 많은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전에 패력궁이 처리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요.”
“비무가 길어지고 있네.”
“…….”
“비무가 길어질수록 패력궁은 남궁천이 천살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걸세. 그렇다면 차라리 비선향을 개입시켜서…….”
“패력궁이 원치 않을 겁니다. 그는 설사 남궁천이 천살성이어도 정당한 승부로 결말을 짓고 싶어 할 겁니다.”
“그래서 지금 패력궁의 눈치를 보자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오라…….”
“됐네. 자네 말은 알아들었어.”
묵천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다.
알고 있다.
만약 자신이 이 비무에 끼어들어 수작질을 하게 된다면 오히려 패력궁에게도 반감을 살 수 있다.
총관은 그걸 염려하는 것이리라.
그걸 알지만…….
‘도대체 저 잡초 같은 놈은 왜 이렇게도 질긴 것이냐!’
까득.
정말이지 이가 갈린다.
진천랑을 사냥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사냥당하는 것만 같은 이 더러운 기분!
패력궁의 무위로도 누를 수 없을 만큼 남궁천이 강하다는 건가?
‘패력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빨리 그 천살성 놈을 요절내란 말이야!’
묵천악이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총관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맹주님의 정서가 널을 뛰는구나. 위험하다.’
벌써 며칠째 저런 증세가 계속되는지 모르겠다.
‘남궁천. 자네는 패력궁을 상대로도 살아남을 작정인가?’
총관의 시선이 다시 남궁천에게 물끄러미 향했다.
한편 이 순간 남궁천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팽수혁을 비롯한 견습생들이었다.
각자 흩어져서 관중석을 돌아다녔던 견습생들이 이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찾은 사람?”
팽수혁의 질문에 다른 견습생들이 고개를 저었다.
윤종승이 진소홍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아무리 찾아도 악굉은 보이지 않던데.”
“아냐. 오히려 악굉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더 많아졌어. 분명 무한에 있는 건 틀림없어.”
“그렇다면 흑무련 놈들도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윤종승의 말에 다른 견습생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미 흑무련과 사투를 벌인 적이 있는 견습생들이었다.
때문에 이곳에 흑무련 수뇌부가 와 있다면 꽤나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상황.
팽수혁이 턱을 괴다가 중얼거렸다.
“만약 그놈들이 악굉을 데리고 온 거라면 뭘 노린 걸까? 인질극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유현의 대꾸에 팽수혁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만약 제가 흑무련주라면 악굉으로 인질극을 벌이진 않을 테니까요. 무림맹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기에는 악굉의 인지도가 너무 낮아요. 무림맹이 거래에 응할 가능성도 적고요. 최소한 청랑단주쯤은 돼야 거래 시도를 해보겠죠.”
“흐음. 그렇다면 유현 도장이라면 악굉을 어떻게 이용할 것 같아?”
“글쎄요. 저라면 일단 소모품으로 쓸 것 같습니다. 사지를 찢어놓은 다음 사람이 많은 곳에 그 시체를 전시를 해놓는다든지. 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좋을 테니까요.”
“…….”
“그게 아니면 지난번 언가장 전투 때처럼 폭멸고를 복용시키고 최대한 많은 적이 밀집한 곳에 투입시켜 터뜨려 버린다든지…….”
“이익, 지독한 새끼!”
팽수혁이 저도 모르게 유현의 멱살을 확 낚아챘다.
유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제가 그런다는 게 아니라, 흑무련이라면 그럴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만.”
“커흠.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이 됐다.”
팽수혁이 멱살을 놔주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윤종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언제부턴가 유현이 저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팽수혁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몰랐다.
‘하여튼 남궁천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이라니까.’
아직도 비무대에서 패력궁을 상대로 놀라운 무위를 보여주는 남궁천.
그런 남궁천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유현 도장의 추측대로라면 흑무련은 악굉을 이용해서 폭멸고를 터뜨릴 수도 있다는 건데. 사람이 많은 지역이라면…….”
“……!”
견습생들이 퀭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지금 이곳보다 사람이 많이 밀집한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팽수혁이 버럭 소리쳤다.
“설마 여기서 악굉을 이용해 폭멸고독을 터뜨리겠다는 거야? 이 무고한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하지만 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어째서?”
“흑무련으로선 얻을 게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짓을 했다간 철저하게 고립되고 말 겁니다. 아무리 사파라지만 강호에서 명분이 없으면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노리겠죠. 무고한 불특정 다수보단 영향력 있는 한 사람.”
“그렇다면…….”
“맹주?”
팽수혁의 말을 진소홍이 받으며 물었다.
유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러니 우리는 이제부터 귀빈석 주변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깐! 그럼 오히려 잘된 것 아냐? 지금으로선 맹주야말로 보이지 않는 적이잖아. 그런데 악굉이 처리해주기만 한다면 손 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인데?”
윤종승의 말에 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맹주가 공개석상에서 죽게 되면 여론이 뜻밖으로 흐르겠죠.”
“그 순간부터 맹주가 무림맹의 영웅이 될 수도 있겠네.”
진소홍의 말에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도 좋을 건 없습니다.”
“과연! 남궁천은 거기까지 예상을 한 거로구나. 그래서 악굉을 제거하라는 거고.”
그때 견습생들 위로 시커먼 그늘이 지더니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헉, 깜짝이야!”
윤종승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보자, 그곳에는 언제 온 것인지 남궁표와 남궁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미 살곡의 살수들을 이끌면서 대략의 사정을 알고 있던 남궁표가 견습생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수고가 많군.”
“아…… 어르신들.”
윤종승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남궁효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흑무련 이 약아빠진 것들이 꼼수를 부리다니. 절대 악굉이 맹주를 죽이게 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
“우리가 돈을 받을 수 없다.”
“응? 예?”
윤종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남궁효가 움찔거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커험! 험!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것만은 막아야지. 그러니 자네들도 최선을 다해서 악굉을 찾아내 주게. 사례는 두둑이 하겠네.”
“으음…… 왜 사례까지 하시는 건지…….”
윤종승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데, 남궁표와 남궁효가 더 말을 듣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연신 관중석을 살피며 악굉을 찾는 듯했다.
유현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리는 귀빈석 쪽으로 가보지요. 만약 악굉이 뭔가를 저지른다면 역시 그쪽이 유력합니다.”
“가자!”
팽수혁을 비롯한 견습생들이 곧장 귀빈석 쪽을 향해 달렸다.
* * *
“우오오! 생각 외로 박빙이다.”
“대단한데. 이런 비무는 살면서 처음 보는 것 같아.”
“무림맹의 미래가 밝구나!”
비무가 길어지면서 이제 관중들은 패력궁과 강호신룡의 대결을 온전하게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세상에 홀로 동떨어진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이가 있었다.
죽립을 눌러쓴 사내, 바로 악굉이었다.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은 온통 벌겋게 충혈되어서 금방 피눈물이라도 쏟을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씩 탄성이 터질 때마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귓속에서 이명처럼 성난 군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느냐! 죽여라! 맹주를 죽여!”
인상을 잔뜩 구긴 악굉이 옆을 돌아보자, 히죽 웃는 양민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맹주를 죽이라니까! 이 멍청한 놈아!”
악굉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아, 아냐. 맹주를 죽여서는 안 돼! 맹주는 강호를 지키는……!’
툭!
마침 누군가 악굉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갔다. 그대로 쓰러진 악굉이 고개를 들자 성난 군중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윽박을 질러댔다.
“이 멍청한 녀석아! 맹주를 죽이라니까!”
“맹주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너를 잡아먹겠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이윽고 군중들이 입을 쩍 벌린 채로 싯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온통 붉어진 세상에서 괴이하게 변한 인간들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으아아아!”
비명을 내지른 악굉이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헤치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맹주를 죽여라!”
“키키킥! 그래, 어서 맹주를 죽여라!”
군중들이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에 악굉이 귀를 틀어막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잔뜩 붉어진 시야에 저만치 귀빈석에 앉은 맹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맹주를…… 죽인다……!”
씹어뱉듯 중얼거린 악굉이 순간 바닥을 차며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