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 건드리면 안 되는 것들
“죽이라니…… 악굉을 죽이라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외쳤다.
“그래도 유일하게 본 가를 도와주러 오던 녀석이야. 그런데…….”
“지난번 언가장 전투에서 겪어봤잖아? 어설픈 동정을 품으면 일을 그르치기 쉬워. 동정심은 강호에서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남궁천이 냉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약점으로 쥐고 흔드는 곳이 바로 이곳 강호니까.
“그럼 악굉의 몸에도 폭멸고가 심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팽수혁의 질문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난번에 봐서 알잖아? 흑무련은 그런 놈들이야. 대신 죽일 때는 주변에 피해가 없도록 조심해.”
“젠장! 이 개 같은 흑무련 놈들!”
“그럼 간다. 가능한 악굉을 찾아내.”
마침내 남궁천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에 남은 견습생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우와아아아! 남궁천이다!”
“멋진 승부 부탁한다!”
“강호신룡 힘내라!”
“다치지 마라!”
많은 사람이 남궁천을 환호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패력궁 천무류가 등장하자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와아아아! 패력궁이다!”
“적랑단주는 단순히 인기 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게 아니다! 연륜이 필요한 법이다!”
“패력궁이 적랑단주 적임자다!”
남궁천의 도약이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실리적인 면을 따지는 자들은 패력궁 천무류가 적랑단주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아무래도 강호 중대사를 다룰 만큼 연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이런 열띤 현장 복판으로 남궁천과 천무류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비무대에 오르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후우우웅.
한 줄기 삭풍이 비무대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무류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 대살성의 피를 이은 자. 지금껏 숨죽이며 지내다가 돌풍을 불러일으켰지.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패력궁. 전생에도 한 번 부딪친 적 없는 자를 이렇게 만나네. 과연 눈빛부터가 다르군. 그런데 왜 저렇게 노려봐? 내가 전생에 저 사람 아들이라도 죽였나?’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사이, 귀빈석에서 맹주가 몸을 일으켰다.
최종 결승인 만큼 맹주가 연설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맹주가 관중석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마침내 적랑단주 선발전의 결승을 치르게 됐소.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으로 오늘 이렇게 결승까지 치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오. 과연 무림맹에는 아직 뛰어난 인재가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되었소. 여기 마지막까지 남은 두 사람은 천하가 아는 고수들이오. 패력궁과 강호신룡! 이 둘의 별호만 보아도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오.”
사람들이 인정한다는 듯 다시 환호를 내질렀다.
맹주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난 세월 수많은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왔소. 무엇보다 얼마 전 천하대살성인 진천랑을 추살하면서 큰 위기를 잠재울 수 있었소.”
장내가 조금씩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대살성 진천랑은 바로 남궁천의 친부였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큼 몇몇 이들이 수군거렸다.
“강호신룡이 듣기엔 좀 껄끄럽겠어.”
“그럴 수는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은가?”
“그렇지. 강호신룡이 인기가 많다고 맹주님이 할 말을 못해서는 안 되지.”
“내 말이 그 말일세.”
술렁임이 잦아들자 맹주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대살성의 혈육인 남궁천이 강호신룡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소. 나는 강호신룡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소. 친부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본 맹에 헌신하겠다는 그 자세를 칭찬하고 싶소. 게다가 친부의 탁월한 재능이었던 초견파공안까지 물려받았다니, 이는 본 맹의 홍복이 아니겠소?”
몇몇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는 별생각이 없다가도 맹주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 과연 이 사실을 복으로만 간주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맹주의 화법이었다.
맹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물론 혹자들은 불안할 수도 있소. 초견파공안을 이어받은 강호신룡이 과연 천살성은 물려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 거요. 하나, 나는 우리의 신룡을 믿소. 의지가 피보다 진하다는 것을 믿고 싶소! 그래서 나는 신룡을 응원할 수밖에 없소. 패력궁 천 각주께서는 이런 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묵천악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양해를 구하자, 천무류가 포권으로 답례했다.
그 광경을 보며 총관은 다시 한번 속으로 감탄했다.
‘맹주님은 지금 군중의 마음만 흔들어놓는 게 아니다. 패력궁의 마음도 사로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패력궁의 입장에서는 맹주가 군중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렇듯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이미 천살성으로 판명이 된 자를 마지막까지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무림맹의 사기 진작을 도모하는 것과 동시에 양민들의 불안감도 말끔히 씻겨주려는 행동으로 보이리라.
확실히 맹주는 그런 면에서 철두철미한 자다.
처세술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자.
든든한 배경 하나 없이 맹주의 자리에 올라 이토록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저러한 처세술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어쨌거나 맹주는 이제 연설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패력궁의 손에 달렸으리라.
“자, 이제 지루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소. 다들 이 늙은이의 수다보다는 젊은 혈기와 강호 노고수의 싸움을 기대하는 것 같으니.”
관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맹주가 한 번 더 웃어 보이고는 천무류를 보았다.
‘부탁하네.’
그 속내가 전해지기라도 한 듯 천무류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가 말을 맺었다.
“그럼, 이제부터 패력궁과 강호신룡의 비무를 시작하겠소!”
“우와아아아아!”
대연무장 가득 함성이 차올랐다.
따로 비무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없다.
오늘은 결승전인 만큼 특별히 맹주의 이 말을 기점으로 비무가 시작된 셈이었다.
남궁천과 패력궁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천천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남궁천도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만이던가?
이처럼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고 상대에게 집중하던 때가.
의외로 전생에도 이런 경험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떼를 지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남궁천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마와 같은 존재였고,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적들은 전부 불나방과 같았다.
이렇게 일대일의 싸움으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패력궁이라…….’
전생에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자.
남궁천으로서는 자신의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상대다.
그가 묵천악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점도 좋은 부분이다.
적어도 패력궁은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비무에 임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으로…….
‘으응?’
남궁천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는 천무류를 보았다.
천무류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아니, 잠깐.
‘이건…… 얘기가 좀 다른데?’
분명 불명회의 조사에 의하면 남문각주 천무류는 맹주와 깊은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저렇게까지 살기를 보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뭐,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부류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하기엔 좀 과한데?
남궁천이 얼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생에 패력궁의 자식을 죽인 건 아닌지.
‘뭐,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은 죄다 죽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불명회의 보고에 의하면 패력궁 천무류에게는 애초에 자식이 없지 않았던가?
도대체 저 증오 섞인 살기는 어디에 기인한 걸까?
그사이에 맹주가 손을 쓴 건가?
남궁천이 힐끔 귀빈석을 보았다.
냉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맹주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그렇구나. 저 늙은 구렁이가 또 수작질을 했구나.’
마침 천무류가 옆으로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휘이이잉!
다시 한번 비무대 위로 삭풍이 지나쳤다.
천무류가 쏘아대는 살기와 함께 바람을 맞으니 등골이 쭈뼛 설 지경이다.
하나 이런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남궁천 역시 걸음을 멈추고는 천무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기의 흔들림이 없다.
과연 절대 고수.
어쩌면 패력궁이 무림칠성 중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소문이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
천무류 역시 나름대로 남궁천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내 살기를 정면으로 받고도 용케 버티다니.’
지금 자신이 쏘아대는 살기는 유현에게 펼친 예안기공보다 훨씬 살벌한 기운이었다.
그럼에도 남궁천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다.
마치 이런 기운은 평생 익숙하다는 듯 태연한 반응이다.
상황이 이리 되니 남궁천이 천살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된다.
태생적으로 살성을 지닌 자가 살기에 무던한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나?
‘하나 놀랍기도 하군. 천살성을 가진 녀석이 철저하게 살기를 억누르고 있다니.’
사실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울 건 없다.
원래 천살성이 무서운 이유는 살기를 풀풀 휘날리지 않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수나 경험이 풍부한 의원이 직접 진맥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천살성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누구보다도 살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자. 동시에 누구보다도 살성이 강한 자가 바로 천살성이다.
살기를 거둔 천무류가 단전에서부터 예안기공을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선배, 저 마음에 안 들죠?”
“으응?”
대뜸 던져오는 질문에 천무류의 예안기공이 맥없이 풀렸다.
천무류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요. 지금 저 마음에 안 들죠? 살기를 마구마구 뿌려대시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흐음. 자네는 비무가 장난인가?”
“에이, 그럴 리가요. 패력궁 천 각주님을 상대로 어찌 제가.”
“한데 대뜸 질 낮은 질문이나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야 선배의 의중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니까요. 저는 선배와 대결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 한계를 알아볼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선배는 절 거의 죽일 작정이신 것 같네요.”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까지 지으며 말하자, 패력궁이 냉소를 지었다.
“과연. 내 살기를 받고도 그런 태도라니. 칭찬을 해야 할 일인지, 우려를 표할 일인지 모르겠군.”
“젊은 후기지수가 이리 당당하면 칭찬을 해주셔야죠.”
“그렇지. 자네가 보통의 후기지수라면. 하나, 자네는 좀 특별하지.”
“어떤 부분이요?”
“자네는 천살…….”
“……?”
천무류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자네는 살곡주가 아닌가?”
“아…….”
남궁천이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과연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가?
확실히 살곡과 연결된다면 패력궁이 오해를 할 만도 하다.
나름 살곡에 주의를 주었음에도 맹주가 사실을 알아낸 모양이다.
하긴. 살곡을 장악했다는 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이긴 했다.
‘생각보다 좀 이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천무류는 천살성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아직까지 확신을 하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살곡을 장악한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절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째서 자네를 노렸단 거지?”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이미 천무류는 맹주의 입김이 닿은 자였다.
이후에 무슨 말을 한들 그에게는 변명으로 들리리라.
아니나 다를까, 천무류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변명일 뿐일 터. 자네가 살곡주라는 건 천살성을 물려받은 증거겠지.”
“아니라면요?”
“뭣이?”
“그러니까 제가 천살성이 아니면 어쩌실 건데요? 이렇게 죽일 듯하시다가 막상 천살성을 타고난 게 아니면?”
“갈! 네놈이 천살성이 아니면 어째서 살곡을…….”
“그러니까 사연이 있다니까요. 자꾸 억울하게 몰아가시면 저도 기분이 나쁘다고요.”
“노옴! 무얼 잘했다고…….”
남궁천이 천무류의 말을 가로지르며 불쑥 물었다.
“아니면 대가리 박으실래요?”
“뭐, 뭣?”
남궁천이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제가 천살성이 아니면, 대가리 박고 사죄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