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우리 절친이었어?
콰아앙!
검파로 복부를 쳤는데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크억!”
눈앞이 캄캄해진다.
극한의 고통을 넘어서 버리니 이젠 아프지도 않다. 그저 아득하게 의식이 멀어지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도 조춘은 단전이 부서진 게 아닐지 걱정이 됐다.
이 정도의 충격이면 단전이 산산이 깨져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내가 한낱 견습생에게 이리 당하다니……!’
이젠 짜증도 치밀지 않는다.
완벽한 실력 차다.
적면도의 말이 맞았다.
남궁천은 격이 달랐다.
이제야 깨닫다니.
자신과 적면도가 시종 부딪치면서 서로를 방해한 것도 모두 남궁천의 농락에 의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니 남궁천의 보법과 움직임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왠지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싸운다면 적어도 적면도와 부딪칠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법.
다 무슨 소용인가?
‘단전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단전이 조각조각 깨져 버렸다는 것을.
턱!
얼른 한 발을 내디뎌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마지막 자존심과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무릎을 꿇진 않았다.
하지만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린다.
마침 분에 찬 기합성이 귓가에 들려온다.
“남궁처어어어언!”
자신을 마주 보고 선 남궁천 뒤로 적면도의 시뻘건 얼굴이 보인다.
‘저 병신…… 다 끝이구나.’
조춘이 눈을 내려감았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의 배후를 노리고 날아오른 적면도가 도기를 풀풀 휘날리며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기파가 터지면서 비무대 바닥이 통째로 뜯겨 날아갔다.
쿠콰콰콰콰콰앙!
조춘이 파편과 함께 기풍에 휩쓸려 장외로 나가떨어졌다.
쿠당탕탕!
회심의 일격을 내려친 적면도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훅, 훅, 훅……! 제길, 끝이군.”
“날뛰느라 고생했어요.”
등 뒤에서 들린 섬뜩한 목소리.
적면도가 재빨리 돌아서려는 순간!
퍼억!
“크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적면도가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슈우우우웃, 콰다앙!
관중석 아래로 굳건한 벽에 균열이 거미줄처럼 생겨났다.
큰대자로 뻗었던 적면도가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게거품을 문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워낙 강맹한 일격이었기 때문일까?
관중들이 한동안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로 굳었다.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렸다.
“강, 강호신룡이 이겼다!”
“우와아아아아아!”
관중석에서 함성이 차올랐다.
비무가 펼쳐지는 무대는 모두 네 곳인데, 수많은 관중이 남궁천의 싸움만 지켜본 것처럼 환호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난전 속에서 남궁천이 기회를 잘 엿본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춘과 적면도는 애초에 자신들의 계획과 달리 자꾸만 서로 도검을 섞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귀빈석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맹주는 눈자위를 파르르 떨었다.
“과연…… 강호신룡이군.”
얼핏 들으면 순수한 찬사처럼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짙은 후회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맹주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후회하는 중이었다.
죽였어야 했다.
제 아비와 제 어미를 죽인 것처럼.
아예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애초에 철저히 짓밟았어야 했다.
하나 조심스러웠다.
남궁세가의 몰락 그 자체가 강호 이목을 이끌 만한 사건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이 공식적으로 남궁천을 죽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비밀리에 남궁천을 죽이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다.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어도 오해를 받고 죽일 놈이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한 강호가 아닌가?
자칫 섣불리 움직이다간 음모가 발각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진천랑을 먼저 죽이는 게 나으니까.
한데 진천랑이 죽은 이후로 남궁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변신했다.
마치 그간 바짝 웅크리고 있었던 이유가 높이 뛰어오르기 위한 것이라는 듯.
도저히 호구였던 아이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뿌리를 밟으려고 한 것인데…….
‘이미 그때도 늦었단 말인가?’
말도 못 하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짓밟아야 했다.
콰득!
묵천악이 태사의 한쪽을 콱 움켜쥐었다.
‘이제는 더 늦을 순 없다. 남궁천, 네놈이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운명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중, 삼중, 사중으로 네놈을 옭아맬 그물이 준비되었으니!’
곧 총관이 나서서 남궁천의 승리를 알리자, 관중석은 다시금 환호로 가득 차올랐다.
* * *
“받아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윤종승이 공손한 자세로 술잔을 받았다.
윤첨산이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윤종승을 보았다.
이 철부지 아이가 언제 이렇게 대견하게 컸단 말인가?
제 형과 달리 늘 집에서는 속만 썩이던 아이였건만.
동네 파락호처럼 구는 걸 보다 못해서 학관을 보냈더니 이런 기적 같은 변화가 있을 줄이야.
윤첨산의 그윽한 눈길을 느낀 윤종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묻었다. 잘생김이 묻었구나.”
“예?”
윤종승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묻자, 윤첨산이 헛기침을 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농이다. 이 녀석아.”
“아버지도 참. 그런데 모처럼 무한에 오셨는데 형님을 만나러 가시지 그랬어요?”
“네 형은 이미 오전에 보았다. 너에게 기대가 크더구나.”
“저야 뭐 아직 한참 멀었죠.”
“어허, 지나친 겸손도 실례가 되느니라. 너는 당당하게 본선에 오른 실력자다. 조금 더 너를 드러내도 좋다.”
“예…… 뭐.”
윤종승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마침 점소이가 음식을 쟁반 가득 담아서 가져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고맙네. 여긴 내 아들일세. 이번에 적랑단주 선발전에 참가한다네. 내일 우리 아들이 대회에 나설 걸세.”
윤첨산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덕분에 부끄러움은 윤종승의 몫이 되었다.
“아버지, 그만하세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하하! 하긴 너에겐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겠지. 하나 여기 점소이에게는 너 같은 인재를 만난 것이 기연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
“아버지도 참…….”
윤종승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먼산을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윤첨산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기고만장했을 터다.
하나 남궁천과 유현, 그리고 팽수혁 등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 윤종승이었다.
점소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이야아, 대단한 분이셨군요! 혹시 그럼 이분이 바로 요즘 세간에서 유명한 그 분입니까?”
“커흠흠. 뭐, 우리 아들이 제법 유명하긴 할 걸세. 크허허! 그래,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고?”
“요즘 강호에 떠오르는 샛별 같은 존재!”
“그렇지! 그리고 또?”
“황산에서 온 신성!”
“옳거니! 그리고?”
“강호신룡이라 불리는 그분! 바로 남궁천 소협!”
“…….”
“…….”
“으음. 뭐, 비슷하긴 하네.”
“아…… 그럼 다른 분……?”
“그…… 황산까지는 맞았네.”
“아! 그럼 남궁세가분이군요? 남궁천 소협의 친척?”
“커흠! 친척은…… 아니고.”
“그럼요?”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첨산이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강호신룡과는 뭐랄까…… 이웃사촌? 뭐, 어찌 보면 친척 같은 거지.”
“아…….”
“꽤 친한 친구?”
“아…… 그렇군요. 어쨌거나 그분의 친우시라면 역시 무공 또한 고강하겠군요.”
“당연하지! 이 녀석이 정이 많아서 꼭 친구만 만나면 손속에 사정을 둬서 말일세.”
“아, 예예. 그렇군요. 속이 깊으신 분이군요.”
이쯤 되자 점소이도 대충 윤첨산의 기분을 맞춰주는 분위기였다.
점소이가 서둘러 대화를 정리했다.
“혹시 적랑단주가 되신다면 단체 회식은 저희 객잔에서 부탁드리겠습니다요!”
“하하하! 젊은 친구가 사람 볼 줄 아는군!”
윤첨산이 부러 큰 웃음을 터뜨렸다. 보다 못한 윤종승이 민망한 마음을 숨기려고 술잔을 들자, 윤첨산이 얼른 제지했다.
“술은 그만 마셔라. 내일 비무를 치러야 하지 않느냐? 과음은 좋지 않다.”
“그렇네요.”
윤종승이 순순히 응하자, 윤첨산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불렀다.
“종승아.”
“예, 아버지.”
“이 아비는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너는 이미 아비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내일 비무에서 혹시나 너무 무리하진 마라. 몸을 잘 챙겨야 한다.”
“명심할게요.”
“그러고 보니 같은 조에 네 동료가 있는 것 같더구나.”
“예, 팽수혁과 같은 조예요.”
“하북팽가는 예로부터 기가 드센 집안으로 유명하지. 그 아이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더구나.”
윤종승이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요. 수혁이도 화끈한 성격이죠.”
“만약 내일 너와 그 아이가 마지막까지 남게 된다면, 너무 무리하지 마라. 이 아비는 네가 친구에게 결과를 양보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
윤종승이 울컥하는 마음으로 윤첨산을 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윤첨산을 좋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겁에 질려서 기권하게 될까 봐 미리 포장해 주는 것이다.
“아버지.”
“오냐.”
윤종승이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윤첨산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느새 윤종승의 눈빛은 모종의 결의로 다져져 있었다.
아들이 이처럼 진중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잘 없었기에 윤첨산이 내심 긴장해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저는 기권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설령 상대가 팽수혁이 아니라 남궁천이라고 해도 끝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괜찮겠느냐?”
“제 가능성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두려움과 싸우고 싶고요.”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윤첨산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 아비는 그저 널 응원하마.”
“감사합니다.”
“하나만 묻자.”
“예, 아버지.”
“너를 이렇게 바꾼 게 무엇이냐?”
윤종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데 그 답을 윤첨산이 먼저 찾아내고는 물었다.
“역시…… 남궁천 그 아이더냐?”
“그렇습니다.”
“알겠다.”
윤첨산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부자는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 * *
다음 날.
역시나 무림맹 대연무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금왕과 남궁검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휘장을 치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윤첨산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금왕이 반색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러잖아도 오늘은 윤 가주님 자리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앉으시지요.”
“고맙소, 만금진인.”
윤첨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짧은 순간 금왕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달라졌군.’
그는 상재를 타고난 상인답게 윤첨산의 분위기가 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윤첨산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남궁검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어딘지 모르게 잔뜩 경직된 표정이었기에 손우곤이 반사적으로 나서며 검파에 손을 얹었다.
“멈추시오.”
하나 남궁검이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물러서게.”
“예, 가주님.”
손우곤이 비켜서자 윤첨산이 남궁검에게 다가오더니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척!
다음 순간 주변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윤첨산이 느닷없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남궁 가주께 감사드립니다. 제 아들 녀석이 귀가의 소가주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간 본 가가 남궁세가에 무례하게 군 것이 있었다면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
“본 가는 앞으로 귀가가 신뢰할 수 있는 우군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순간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하나 남궁표를 비롯한 남궁세가 사람들은 내심 뿌듯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남궁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리네. 앉게나. 곧 비무가 시작될 테니.”
“고맙습니다.”
윤첨산이 뜨거운 눈길로 남궁검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마침 둘째 날 비무가 이제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