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초대받지 않은 자들
앞서 남궁검의 시선이 더듬던 관중석 어느 곳.
한 노인이 지팡이를 턱에 괸 채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호오. 놀랍군.”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옆에 앉은 소동이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할아버지. 저 사람도 무림맹이에요?”
소동이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바로 적면도였다.
노인이 홀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시골에서 올라온 무사라고 소개되었지만, 글쎄…….”
“시골 무사가 아니에요?”
노인이 주변을 힐끔 둘러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가 소동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저치는 사실 적면도라는 무인이란다. 무림공적에 이름을 올린 자지.”
“어? 그럼 무림맹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동이 눈치 없이 큰 소리로 물었지만, 주변의 환호성이 너무나 컸기에 금방 묻혀 버리고 말았다.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그건 맹주가 싫어할 테지.”
“왜죠? 정말 모르겠네요.”
“원래 사람 속을 알기 어려운 법 아니겠느냐?”
“그런데 저 형은 참 대단해요. 저렇게 칼을 맨손으로 휙 잡아 버리다니! 정말 멋있어요!”
소동이 눈을 반짝이며 남궁천을 보았다.
노인은 그런 소동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옆에 선 호신위를 힐끔 보았다.
흑색 피풍의를 두르고 흑립을 깊이 눌러 쓴 호신위는 장승처럼 선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이따금씩 그의 전신에서 은근한 기운이 흘러나왔지만 바로 옆에 있는 자신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소동은 궁금한 게 많은지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 저기 앉은 사람은 왜 저렇게 화려해요? 돈이 많은가 봐요.”
“저자가 바로 금왕이란다. 강남에서 유통되는 돈은 전부 금왕의 손을 한 번 거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
“와, 역시 엄청난 부자군요. 저도 나중에 저렇게 부자가 되고 싶네요.”
소동이 어딘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금왕을 바라보았다.
소동의 질문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누구예요? 아까 이쪽을 살피는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에요?”
“허허,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른단다.”
“그래요? 누군데요?”
“남궁세가주 남궁검이라는 자란다.”
“아아, 저 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남궁검이군요! 그럼 그 옆에는 남궁세가 사람들인가요?”
“그렇지. 그리고 방금 무대에서 맨손으로 칼을 잡은 청년이 소가주인 남궁천이고.”
“아아, 그렇구나. 강호신룡의 가문은 역시 대단하구나.”
소동이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노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한때 천하제일룡이 나왔던 가문이니까. 그 아이도 비범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물며 저 젊은이의 아비는 천하대살성으로 악명을 떨친 자였으니…….”
“할아버지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어요.”
소동이 생글거리며 웃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할아버지.”
순간 아이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었다.
지금껏 호기심이 충만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던 그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세상 모든 관심사가 사라진 것만 같은 표정.
노인이 돌아보니, 소동이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면서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졸려요.”
“허허, 그새 흥미를 잃은 것이냐?”
“하지만 비무가 별로 재미없는 걸요? 그냥 동네 형아들이 싸우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요.”
누군가 이 말을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리라.
강호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생사비무를 벌이고 있는데, 한낱 동네 파락호들과 비교를 하다니.
물론 철없는 아이가 떠든 말이니 근처의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진 않았다.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만 가자꾸나. 아침부터 서둘러서 피곤할 텐데.”
“후웅. 그래요, 할아버지. 오늘은 이만 쉬고 싶어요.”
“오냐, 그만 일어나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돌아보자, 피풍의를 두른 호신위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호신위는 그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음에도 빽빽한 관중석의 길이 저절로 열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호신위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묘한 기운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물린 탓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관람하는 중이었기에 그 묘한 기운을 깊히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대연무장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오자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적막했다.
인근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무림맹 남문을 지난 세 사람은 길가에 세워진 마차로 다가갔다.
소동이 다시 기지개를 켜며 방긋 웃었다.
“으읏차! 오늘 재미있었어요.”
그러자 지금껏 인자한 얼굴로 웃기만 하던 노인이 표정을 단단하게 굳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라니까.”
“죄송합니다.”
노인이 핏기조차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소동이 노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경직될 것 없어요. 앞으로도 종종 소식 보내줘요.”
“그러겠습니다.”
“적서(赤鼠)는 뭐라던가요?”
“아직은 좀 더 지켜보겠다고 합니다. 최근 맹주도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는 것 같습니다.”
“하긴. 확실히 골칫거리 같더라고요.”
소동이 생글 웃더니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흑립의 호신위도 오르자 노인이 마차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소공마(小 公魔)님.”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남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죄송합니다.”
여전히 경직된 노인의 표정을 보고는 소공마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시 후 마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돌아섰다.
일순 그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그래도 나름 촉이 있는 모양이구나. 드러내지 않고 지켜만 보는 걸 보니.”
누구에게 한 말일까?
팟!
순간 노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쏘아지더니 저만치 전각 모퉁이를 빠르게 돌아갔다.
“헉!”
헛바람을 삼킨 무인 하나가 재빨리 경공을 펼쳐 달아났다. 아니,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노인의 손에 목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커억!”
쿠웅!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무인이 노인을 보고는 품으로 손을 넣어 신호탄을 찾았다.
“어딜.”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의 발이 먼저 무인의 가슴팍을 밟았다.
우둑!
“끄아악!”
늑골이 부서지면서 무인이 피를 토했다.
노인이 살기 서린 눈빛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무림맹에도 제법 눈치 빠른 녀석들이 많단 말이야.”
“끄윽……! 윽……!”
“살고 싶은가?”
무인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라는 듯 노인이 허리를 숙여 무인의 허리춤에 찬 명패를 뜯어냈다.
“염라단 삼 대주인가?”
“네놈들…… 정체가…… 끄윽!”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인데 무엇이 그리 궁금한가? 결국 그 호기심 때문에 이리 된 것을. 처자식은 있는가?”
처자식이란 말에 삼 대주의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핏발 선 그의 눈가가 눅눅하게 젖어들었다.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축하하네. 그래도 죽기 전에 남긴 것이 있으니.”
“끄으읍!”
순간 노인이 발에 힘을 싣자, ‘으득’ 소리가 나더니 삼 대주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노인이 무심한 눈길로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앞으론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사라질 무인들이 넘쳐날 것이다.”
* * *
마차에 탄 소공마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칭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졸려.”
“아침부터 서두르셨으니까요.”
흑립의 호신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데 놀라운 것은 호신위의 목소리가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맑디맑다는 것이었다.
소공마가 눈을 감으며 물었다.
“음마는 안 졸려?”
호신위가 흑립을 벗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역시 음마는 젊네.”
“저보단 부교주님이 더 어려 보이시는 걸요.”
“나야 반로환동을 했으니까. 실제론 내가 훨씬 늙은 거고.”
소공마의 말에 음마라 불린 여인이 곱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물었다.
“베고 누우시겠어요?”
“좋지. 음마의 무릎베개는 언제나 최고지.”
“그럼 부디.”
소공마가 싱긋 웃더니 몸을 눕혔다.
겉으로 보면 조카가 이모의 무릎을 베고 누운 모습 같았다.
음마가 자연스럽게 소공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떠셨나요?”
“글쎄. 으음. 자세한 건 나중에. 지금은 정말 졸려.”
“자장가 불러드릴까요?”
“좋지. 음마의 자장가는 무릎베개보다도 좋으니까.”
음마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혼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비싼 재료를 이용해서 특수 제작한 마차는 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흔들렸다.
그 와중에 옥구슬 구르듯 맑은 음성이 감미로운 선율로 노래를 부르니 잠이 절로 소록소록 쏟아졌다.
멀쩡한 사람도 정신을 잃게 만드는 마력이 있달까?
까무룩 잠이 들 뻔한 소공마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물었다.
“이 아리따운 목소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정말 궁금하세요?”
음마가 잠시 노래를 멈추고 묻자, 소공마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래 상상할 때가 제일 재미있는 법이야.”
“풋. 정말 어쩔 때 보면 아이 같으시다니까요.”
“아이 맞잖아.”
“그렇죠. 그래서 궁금해요.”
“뭐가?”
“반로환동을 하면 어떤 기분일지.”
“흐음. 가끔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지 않아? 정신이 육체를 따라간다는 말. 그래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
“그렇죠. 특히 백도인들은 건강한 육신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고들 하죠.”
“멍청한 소리이긴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냐.”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비슷해. 몸이 어려지면 마음도 어려진달까? 나쁘진 않아.”
소동이 빙글 웃어 보인다.
정말 순진한 소년이 웃는 것만 같다.
음마도 더는 캐묻지 않고 싱긋 미소만 지었다.
“그렇군요. 후회는 하지 않으세요?”
“반로환동한 것?”
“예.”
“가끔은. 차라리 반로환동할 공력을 다른 곳에 쏟아부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긴 해.”
그랬다.
소공마의 반로환동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반로환동은 절대 고수조차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소공마는 반로환동을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공력을 꽤나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조차도 어지간한 고수는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남궁천이 적랑단주가 될까요?”
“글쎄. 그렇다면 맹주의 계획이 또 틀어지는 셈인데. 속이 많이 쓰리겠네.”
“하지만 적서나 백묘 말에 의하면 맹주가 꽤나 꼼꼼한 성격이라고 하니 대비책은 있겠죠.”
“원래 어설픈 자들이 계획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우지. 정말 무서운 자는 계획이 없는 자야. 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과연 그렇군요.”
“한 가지는 분명해.”
“뭔가요?”
“맹주가 꽤나 골치 아플 거야. 남궁천은……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었으니까. 졸리지만 않았어도…… 더 구경하고 싶긴 했는데…… 흐음…….”
말을 이어가던 소공마가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음마는 그런 소공마를 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곧 마차 안에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장가가 울려 퍼졌다.
“남궁천…… 흐음…… 지금쯤 비무가 끝났을 거야…….”
소공마의 잠꼬대도 간간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