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
또로로로롱.
맑은 찻물이 찻잔을 채운다.
시녀는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하고는 물러갔다.
창밖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이따금씩 몰려와 뺨을 두드리곤 했다.
“드시지요.”
흑선이 손을 내밀며 차를 권하자, 이세천이 미세하게 코웃음을 치고는 찻잔을 들었다.
“할 말이 있소?”
“최근 바쁘신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소. 그보다 회주께서 어찌 이리 예를 차리시오? 나 같은 사람에게.”
“제가 어찌 각주님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자(知者)들은 천뇌당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명예로 생각할 정도인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시는 걸 보니, 곧 듣기 싫은 소리도 하시겠구려.”
흑선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각주님.”
“말하시오, 회주.”
“꼭 그러셔야만 합니까?”
“무얼 말이오?”
“왜 이러십니까? 그래도 이곳은 불명회입니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흑선의 말에 이세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흑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응시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세천이 찻잔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회주.”
“말씀하시지요.”
“회주가 보기에 지금 불명회는 어떻소?”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회주가 날 이렇게 불렀겠소?”
“그래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잘 돌아가지 않았다면 각주께서 그런 일을 꾸민다는 것조차 몰랐을 테지요.”
“흐음. 내가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고 있소?”
“본 회를 없애려고 하지요.”
“…….”
이세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불명회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곤 하지만, 불명회는 다르다.
자신의 변절을 이리도 빨리 눈치채고 구체적인 행동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물론 공공연하게 불만을 드러내긴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자신의 계획을 눈치챌 줄이야.
이세천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주. 이제 다 끝났소.”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회주. 불명회는 여느 조직과 다르오.”
“알고 있습니다.”
“본 회는 무림맹을 감시하는 만큼 흑도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참 우습게도 회원 상당수가 무림맹 소속이지. 그럼 과연 불명회는 흑도일까? 백도일까?”
“계속 말해보십시오.”
“어느 쪽이든 본 회의 특성상 무공으로 굴복시켜 회주를 갈아치우는 방식은 인정할 수가 없단 말이오.”
“주군께 불만이 있으신 겁니까?”
“그렇소.”
“무슨 불만입니까?”
“불명회 같은 조직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요. 무림맹을 지근거리에 두고 정보를 빼돌리고 있소. 언제 어느 때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래서요?”
“여기에서 조그마한 실수만 하면 불명회는 끝이란 말이오. 섣불리 불어온 바람에 불씨가 꺼지는 순간, 등하불명 따위는 없는 거요.”
“주군을 섣부른 바람으로 보시는군요.”
“세상이 강호신룡이라고 떠받들지만, 지금껏 해마다 그 별호가 나타났소. 하나 지금 남은 신룡이 몇 마리나 되오? 아니, 한 마리 남기나 남았소? 전부 불꽃처럼 사라졌지.”
“주군은 다릅니다.”
“아니. 다르지 않을 거요. 오히려 더 위태로운 신룡이오. 그의 아비가 천하대살성이었소. 하면 사람들은 앞으로 그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거요. ‘역시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게 되겠지. 그런 자를 섬긴다? 회주, 정신 차리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와 뜻을 함께합시다.”
“거절합니다.”
흑선이 단칼에 의사를 밝히자 이세천은 짐짓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회주. 옛정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오.”
“저도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라?”
“각주님.”
“말해보시오.”
“부디 주군을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흑선이 잠시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생각을 떠올리다가 곧 포기했다.
도저히 표현할 방법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그분은…… 각주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든 그 이상입니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소? 난 남궁천을 미친놈으로 생각하오.”
“그렇다면 그 이상입니다.”
“…….”
“…….”
“회주. 이래 봐야…….”
“후회하실 겁니다. 그분을 건드리시면.”
“이미 난 후회하고 있소.”
“그 이상으로 후회하실 겁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아.”
이세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선이 이리 벽창호 같은 줄이야.
회주의 자리에 오르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걸까?
지금 불명회는 꺼질 촛불 아래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 촛불은 곧 자신이 끄게 되리라.
“회주. 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소. 불명회는 곧 맹에 의해 사라질 거요. 물론, 나는 본 회와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 될 테고. 나와 뜻을 함께하지 않은 자들은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요.”
이번엔 흑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을 해보기엔 너무 멀리 온 셈이군요.”
“그렇소. 다 끝났소, 회주.”
“만약 제가 좀 더 일찍 각주님을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이세천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을 거요.”
“하긴. 제가 논리로 각주님을 이기긴 어렵겠지요.”
“알면 그만합시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주군이 각주님을 찾아갈 겁니다.”
이세천이 피식 웃었다.
“그자는 날 논리로 이길 것 같소?”
“글쎄요. 광인은 논리가 없지요.”
“광인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주군이 미친놈 같다고.”
“허.”
이세천이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고 자신의 주군을 그렇게 인정하다니.
‘이거, 뭐 개판이네.’
하긴 곧 사라질 조직이 아닌가?
일찌감치 발을 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세천이 싸늘한 웃음만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소.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살펴 가십시오.”
“그리고 회주의 주인에게 찾아올 거면 얼른 오라고 하시오. 불명회는 조만간 끝이니까.”
“참고하지요.”
“만약 날 찾아온다면 오히려 내가 한번 회유해 보겠소. 혹시 아오? 그아이가 조용히 떠나겠다고 한다면 불명회를 남겨둘지.”
“……!”
흑선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그런 건가?
이세천은 불명회주가 되고 싶은 것인가?
하긴 불명회주가 된다면 천뇌당에서의 입김은 더욱 세질 수 있으리라.
한마디로 맹의 요직들에 대한 정보를 쥐락펴락할 테니. 어쩌면 총군사 자리를 한번 노려볼 수도 있으리라.
아니다. 지금의 저 모습을 미루어볼 때, 지각주는 그보다 더 높은 곳을 보고 있다.
“설마 각주께선 맹주의 자리를…….”
“그만 가보겠소.”
이세천이 말허리를 자르며 몸을 돌렸다.
흑선도 더는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이쯤 했으면 됐다.
나머지는 남궁천에게 맡길 일이었다.
회주전을 나온 이세천이 마당을 가로질러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장내 무인들이 이세천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힐끔거렸지만 딱히 위협을 가해 오진 않았다.
하긴 무림맹 지각주에게 손을 댈 만큼 간 큰 놈들은 없을 테니.
‘곧 죽을 운명도 모르고 힐끔거리는 꼴이라니.’
내심 비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최대한 무신경한 표정으로 장원을 벗어났다.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서 무심히 말을 뱉었다.
“곧장 지각으로 가세.”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출발했다.
이세천은 마음을 다잡았다.
‘신룡이 날 찾아온다고?’
어림없는 소리.
그때쯤엔 강호신룡은 무림맹 뇌옥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이 강호신룡을 찾아갈 터.
맹주가 남궁가를 탐탁잖게 여긴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눈치도 없다면 지각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리라.
이왕 이렇게 된 것, 불명회를 털어내고 강호신룡도 사로잡아서 새 출발 하는 것이 낫다.
그 종점은 무림맹의 가장 높은 자리로 향할 것이다.
자신이 불명회 소속이 아니라는 증빙 서류는 차고 넘칠 정도로 준비해 두었다.
‘강호신룡이라며 떠받들어 주니 정말 신룡이라도 되는 줄 아는군.’
가소로움에 입매가 비틀린다.
강호신룡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미친놈이 화를 내면 무서운 게 아니라 우스울 뿐이다.
그 화를 진지하게 바라볼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그렇게 마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곧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멈춰 섰다.
‘벌써 도착인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류가 마차 안에 감돈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부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내리시지요, 각주님.”
“자네는……?”
이세천은 그제야 마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부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밖을 내다보니 신룡객잔이라는 깨끗한 현판이 보였다. 이제 막 지어진 건물 같았다.
아직 영업을 개시하기 전인지 인적도 전혀 없다.
“잘도 이런 짓을…….”
이세천의 목소리에 은근한 노기가 서렸다.
하지만 마부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이세천이 불편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안내해라.”
마부가 몸을 휙 돌리고 앞장섰다.
“가시지요.”
마부를 따라 객잔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큰 탁자 하나가 일 층 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너머에는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지각주.”
“남궁천.”
“회주를 통해서 기별은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구려.”
“하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소? 앉으시고,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이세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가소롭구나, 남궁천.’
이세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가갔다.
“우리 강호신룡이 이렇게까지 자리를 마련했으니 그럼 한잔 받아봅시다.”
자리에 앉은 이세천이 남궁천과 잔을 부딪치고는 술잔을 비웠다.
“그래, 무슨 대화를 하시려고?”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소.”
“내가 바쁜 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구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은 그쯤 합시다. 불명회 문제를 얘기하려고 하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불명회라니. 새로 생긴 조직이오? 하면 본 각에서 한번 조사해 보겠소.”
이세천이 태연하게 받아치는 말에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발을 빼시려는 거요?”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러시네.”
“흐음. 회주가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소?”
“무슨 말을?”
“후회할 거라는 말 말이오.”
남궁천이 방긋 웃는다.
하나 그 웃음이 정말 순수한 미소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
이세천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인생은 후회와 반성의 연속 아니겠소. 그럼에도 미래를 보고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지.”
“각주의 미래는 죽음이오?”
“모든 이의 미래는 죽음일 테지. 하나 아직 나는 멀었소.”
“나는 어떨 것 같소?”
남궁천이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이세천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강호에서 죽음이란 늘 선택의 갈림길에서 정해지는 법이지. 그대의 죽음은 가까운 곳에도 있고, 먼 곳에도 있고.”
“각주께서는 그게 보이시오?”
“보이고말고. 조언을 들어 보시련가?”
“궁금하군. 그런데 그 전에…….”
“말하게.”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 짧다?”
“……?”
“말이 짧잖아, 이 새끼야. 그래도 내가 아직은 주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