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장사는 이렇게
추혈검을 갈무리한 남궁천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상당한 양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본 가를 충분히 키울 수 있겠어.’
남궁세가를 정말 ‘세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사실 신병이기를 하급 무사들까지 나눠줄 필요는 없다.
그야말로 돼지 목에 걸린 진주가 될 테니까.
‘일단 장로들을 포함한 수뇌인사에게 전부 돌리고, 정예들까지 지급해 줘도 여분이 꽤 남겠네. 나머지는 조직을 키워가면서 요긴하게 쓰면 되겠지.’
그렇게 구석진 곳까지 모두 살핀 남궁천은 몸을 돌리려다가 멈칫거리고는 선반 한쪽에 세워진 시커먼 항아리를 보았다.
항아리치고는 독특하게도 온통 시커먼 색이었는데, 경면주사로 부적이 그려진 노란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이, 이번엔 진짜 예사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열어봐.”
부곡주가 남궁천을 짐짓 간곡한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싸가지 없는 놈…….’
부곡주가 항아리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서서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확실히 이 정체불명의 항아리는 척 보기에도 요기가 넘쳐흘렀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부곡주가 남궁천을 천천히 돌아보며 물었다.
“설마…… 흑비사(黑飛蛇) 같은 게 들어있진 않겠죠? 갑자기 튀어나와서 문다거나…….”
흑비사는 영물 중에서도 지독한 맹독을 품은 녀석인데, 온몸이 검은 뱀이었다.
똬리를 뜬 채로 서너 장 높이를 솟구칠 수 있을 만큼 반동력이 좋아서 흑비사라고 부른다.
빠르기는 빛살 같아서 웬만한 사람으로는 흑비사가 날아드는 걸 눈치채기도 힘들다는 말이 있다.
만약 항아리 안에 정말 흑비사가 들어있다면 덮개를 여는 즉시 부곡주는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했다.
남궁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달랬다.
“너무 쫄지 마라. 네가 죽으면 장례는 치러줄 테니까.”
“끄응.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군요.”
“살수 새끼가 뭔 위로까지 바라? 그냥 까라면 까.”
“후우, 알겠습니다.”
부곡주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그가 결심을 굳히고는 덮개로 손을 가져갔다.
“그럼…… 하나, 두울…….”
“…….”
“두울 반…….”
“뒈진다.”
“……셋!”
“…….”
“…….”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덮개를 잡은 부곡주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팔짱을 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살기가 스쳤다.
그걸 느낀 것인지 부곡주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곡주님! 정말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덮개가 안 열립니다!”
“그럼 부적을 떼면 될 거 아니냐?”
“아…… 그럴까요?”
뭉그적거리던 부곡주가 부적을 하나씩 떼어냈다. 내심 부적도 떨어지지 않길 바랐지만, 의외로 쉽게 떨어졌다.
모든 부적을 제거하자 항아리를 덮은 덮개가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다.
다르르르르!
“흐익.”
마치 초월적인 존재가 항아리를 쥐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 기묘한 상황에 부곡주는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열, 열까요?”
“열어.”
“그, 그럼.”
부곡주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덮개를 확 열어젖혔다.
후욱!
“허업!”
순간 부곡주가 숨을 참으며 뒤로 물러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냄, 냄새가……!”
그야말로 엄청난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항아리에 든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피였다.
아마도 순수한 피는 아니리라.
어떠한 마교 대법을 이용해서 모은 피가 분명했다.
검붉은 핏물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떨고 있었다.
남궁천이 천천히 다가가서 항아리에 가득 담긴 피를 내려다보았다.
우우우우웅……!
핏물이 떤다.
마치 들리지 않는 비명 소리가 이 공간을 배회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우우우웅……!
놀랍게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벽라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조금 있자니 석실에 가득한 신병이기들이 저마다 진동을 일으키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위이이이잉.
다르르르르!
모든 신병이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떨기 시작하니 부곡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제법 많은 세월을 산 부곡주였다.
하지만 그도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르르릉.
푸른빛을 품은 검신이 예리하게 빛났다.
우웅. 우우웅. 우우웅!
벽라검은 다른 신병이기들과 마찬가지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여긴 천마가 마련한 창고니까 모든 걸 천마처럼 생각해야겠지.”
“옳, 옳습니다!”
부곡주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무한 긍정했다.
남궁천은 부곡주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한 채 눈을 가늘게 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벽라검은 피를 부르고 있다.
그 의지가 손아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만약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저도 모르게 저 피가 담긴 항아리로 걸어갈 것만 같다.
“후우우.”
긴 숨을 내쉬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남궁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천마다.’
속으로 뇌까린 남궁천이 벽라검을 쥔 채로 단전에서 마기를 슬그머니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창벽공으로 관리되는 마기는 폭주하는 대신 혈맥을 따라 차분히 달려 나갔다.
마침내 손을 지나 검신까지 뻗어갔다.
지이이이잉.
검신이 떨면서 희미한 검기를 드러냈다.
곧이어 남궁천이 검을 거꾸로 쥐고는 항아리에 꽂았다.
그 순간,
끼아아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실제로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검의 진동에 따라 핏물이 담긴 항아리가 공명하면서 기묘한 소리를 울린 것이다.
한데 이것이 마치 귀곡성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니 부곡주는 저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벽라검이 붉은빛을 터뜨리면서 항아리에 담긴 핏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남궁천의 손등을 따라 힘줄이 툭툭 불거지더니 전신으로 뻗어갔다.
“크읍!”
남궁천이 이를 악물고 버티자, 검신이 점점 붉게 빛나면서 공명했다.
슈우우우우욱!
생각보다 검신이 피를 빨아먹는 시간은 짧았다.
핏물이 줄어드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
그렇게 항아리 바닥에 고인 피까지 완전히 흡수해 버리자 벽라검이 부르르 떨면서 항아리 밖으로 나왔다.
검파를 쥔 남궁천은 온통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헉!”
부곡주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자, 남궁천이 온통 새빨개진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지은 죄가 많아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냐?”
놀랍게도 남궁천의 목소리는 혼성처럼 들렸다. 마치 여러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듯했다.
“곡, 곡주님……?”
“너의 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구나.”
“헉! 곡주님, 정신을……!”
파앗!
창졸지간 남궁천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나타났다.
쒸이이잇!
동시에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검봉!
‘제기랄! 이렇게 죽는다고?’
부곡주의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치는 그때,
툭.
이마를 건드린 벽라검.
동시에 남궁천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더니 새빨갛게 변했던 눈동자가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르르륵.
이마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더니 콧등에서 갈라졌다.
부곡주는 눈을 끔뻑이면서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겨우 인지했다.
고개를 숙인 남궁천이 긴 숨을 토해냈다.
“후우우우.”
나락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부곡주가 떨리는 음성으로 불렀다.
“곡주님……?”
“그래. 하마터면 죽일 뻔했네.”
“아…… 정신이 돌아온 겁니까?”
“그래. 이거 엄청난 마기네. 까딱하면 정신을 잃고 죽일 뻔했어.”
“어, 어쨌든 천만다행입니다. 이대로 곡주님이 광인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랬다면 넌 지금 시체가 됐겠지.”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검을 회수했다.
그는 벽라검을 들어 야명주의 빛에 검신을 비춰보았다.
붉게 빛나던 검신이 지금은 전처럼 푸른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호오. 벽라검도 제왕의 검이 되었는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런 게 있어.”
대충 말을 얼버무린 남궁천이 마기를 주입하자, 아니나 다를까, 검신이 새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헛!”
검신의 빛깔이 달라지면서 갑자기 요기를 머금기 시작하자, 부곡주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남궁천은 아까와 달리 멀쩡한 얼굴로 검신을 휙휙 휘두르고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같은 검, 다른 느낌. 좋은데?”
“곡주님. 괜찮으신 거죠?”
“그래. 내가 너 살렸다.”
“예?”
“아까 너 죽을 뻔했잖아. 그런데 내가 기적적으로 정신이 돌아와서 살았잖냐?”
“그, 그렇지요.”
“그러니 앞으로 날 생명의 은인으로 대해라.”
“…….”
부곡주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자기가 죽이려다가 말아놓고 생명의 은인이라니?
남궁천이 거기에 한술 더 떴다.
“원래 사방살을 죽일 때 너도 죽이려고 했지만 살려줬지. 그러고 보니 벌써 내가 두 번이나 구해줬군.”
“감사합니다……?”
“알면 앞으로 잘해.”
남궁천이 부곡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부곡주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를 떠올렸다.
‘세상은 저렇게 사는 거구나. 뻔뻔하고 싸가지 없게…….’
* * *
남궁천은 곧장 당가에서 함께 온 무인들에게 각종 암기류와 몇몇 신병이기를 넘겨주었다.
“여러분은 이걸 가지고 당가로 돌아가면 됩니다. 당 가주께 우린 바로 황산으로 간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한때 적랑단원이었던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고는 길을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궁천이 휙 돌아서서 뒤에 도열한 삼십여 명의 하급 살수들을 보았다.
“자, 그럼 너희들은 각자 맡은 짐을 메고 황산으로 간다.”
“복명!”
살수들이 우렁차게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부곡주가 넌지시 물었다.
“저어, 곡주님.”
“말해.”
“오백만 냥은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아, 그렇지. 너희들도 운영비가 필요하겠군.”
“그렇습니다. 사실 요즘 전대 곡주가 멍청하게 맹주의 의뢰를 받는 바람에 일이 끊어져서…… 살수도 많이 부족하고…… 여기저기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습니다.”
“살수는 왜 그렇게 부족해?”
아니, 네가 다 죽였잖아!
뱃속에서부터 치미는 고함을 삼킨 부곡주가 헤실헤실 웃으며 답했다.
“다수는 곡주님께 실수하다가 죽어 버렸고, 지금 이렇게 또 서른 명을 차출해 가시니…… 하하…….”
웃지만 웃는 게 아니다. 울상이다.
‘솔직히 이 인간에겐 기대도 안 한다. 다만 오만 냥이라도 남겨준다면 감지덕지겠지.’
하나 왠지 그간 남궁천의 행동으로 볼 땐 오백만 냥 중,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갈 것 같았다.
턱을 괴고 있던 남궁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백만 냥을 줄 테니 정비에 힘쓰도록.”
“예, 감사합니다. 최대한 아껴서 효율적으로 써볼…… 예에에엑? 얼, 얼마요? 백만…… 백만 냥이요?”
“왜? 싫어? 부담 돼?”
세상에 돈이 부담되는 인간이 어디에 있나?
돈에 있어서만큼은 다다익선이 절대 진리가 아니던가?
“정, 정말 백만 냥을 주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살수들 훈련도 하고, 진법 수정도 하고, 이래저래 의뢰도 받고 활동하려면 돈이 있어야지.”
“감,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안 주면 안 하려고 했어?”
“그,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내가 누구냐?”
“본 곡의 주인이십니다.”
“그래. 내가 내 것 관리하는 것일 뿐이다. 감사는 무슨.”
감격에 찬 부곡주가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외람되지만 나머지 돈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어디긴. 본 가로 돌아가서 재건하는데 쏟아부어야지. 앞으론 본 가가 진정한 제왕의 가문으로 올라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