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장사는 이렇게
“아으. 좋다아.”
남궁천이 다시 한번 뜨거운 물에 목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탄성을 흘렸다.
손바닥을 통해서 온갖 종류의 잡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대체로 사이한 기운이었지만, 때때로 정순한 기운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기운이 마공에 흡수되기 쉬운 성질로 변형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이 석문이 빼앗아간 내공의 성질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모양이었다.
‘가만, 그럼 혹시?’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태사의 앞에 놓인 바둑판.
‘그럼 저 바둑판도 같은 재질인가?’
분명 바둑알을 놓았을 때 일순간 내공이 쑥 빨려들어 가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던가?
만약 바둑판이 이 석문과 같은 재질의 기물이라면 상당량의 내공이 저장되어 있으리라.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군.’
일단은 이 석문이 보내주는 기운부터 온전히 흡수하는 게 중요하다.
남궁천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는 손바닥을 통해 흘러드는 기운을 느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죽어나간 살수들의 선천지기까지 흡수한 석문이 아닌가?
그 모든 내공을 고스란히 돌려받으니 단전이 금강석처럼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기연을 얻을 줄 누가 알았을까?
“생각할수록 기특한 놈일세.”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리자, 부곡주가 머리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곡주님.”
“응? 너 말고.”
“아…… 그럼 누구…….”
“전대 천마.”
“……천마요?”
“그래. 이 석문을 만든 게 정말 기발하지 않냐?”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석문 때문에 죽어나간 살수만 여럿이니까요.”
“그렇지. 천마신공으로 갈고닦은 기운이 아닌 이상 모든 공력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다니. 그리고 그걸 천마신공을 익힌 자에게 모두 쏟아붓게 만들다니. 아주 악랄하고도…….”
“…….”
“기특한 녀석이다.”
“예…… 정말 악랄하고 기특한 녀석입니다.”
부곡주가 뜻도 모른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남궁천은 단전으로 흡수된 기운을 천천히 마기와 조화를 이루어 창벽공으로 갈무리했다.
확실히 창벽공의 포용력은 남달랐다.
왜 남궁세가를 제왕의 가문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기연 중에서도 가장 큰 기연은 내가 남궁세가의 창벽공을 익힌 거로구나.’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찰떡궁합인 무공이 아닌가?
그리고 이 기연은 아들이 준 것이리라.
괜히 가슴 한편이 시큰거리는 것 같다.
남궁천은 이미 전생에 수많은 무공을 섭렵하면서 다양한 기운을 운기해 본 적이 있었다.
초견파공안 덕분에 온갖 잡기를 익히는 게 어렵진 않았으나, 그러한 기운의 충돌로 인해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창벽공을 익힌 후부터는 확실히 그런 충돌이 적어지고 모든 잡기가 조화를 이루면서 창벽의 기운에 갈무리되었다.
무릇 한 나라에는 군자도, 성인도, 악인도, 왈패도 있지 않던가?
진정한 제왕은 그 모두를 다스리는 자다.
그리고 무공에서만큼은 바로 창벽공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순한 기운도, 사이한 기운도, 심지어 천마의 기운까지 품는다.
남궁세가에 이토록 대단한 심법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어쩌면 남궁세가의 몰락은 나로부터 시작된 게 아닐지도.’
엄밀히 말하자면 창벽공이 실전되었을 때부터 남궁세가는 아주 천천히 몰락의 길을 걸었으리라.
어째서 남궁세가를 제왕의 가문이라 칭하는지도 모른 채 버릇처럼 그렇게 부르기만 할 뿐.
내공이 소주천에 이어 대주천까지 마치자 남궁천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단전이 더욱 단단해졌다.
중심은 무거우나 전체는 가볍다.
슈우우우우.
한동안 남궁천 주위를 맴돌던 기운이 전신으로 흡수되면서 부풀었던 장삼자락도 차분해졌다.
감았던 눈을 뜨자 남궁천의 두 눈이 새빨갛게 빛나다가 이내 푸른빛으로 돌아왔다.
“곡주님……?”
“왜?”
“괜찮으신 거죠?”
“아주 좋아.”
“아…… 다행입니다. 너무 오래 움직이지 않으시기에.”
“뭘 얼마나 서 있었다고. 그리 참을성이 없나?”
“벌써 해가 저물었습니다요.”
“응?”
그제야 남궁천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과연 대전 밖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흑무련에서 찾아왔다가 돌아간 게 점심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으니, 족히 세 시진은 석문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잠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확실히 즐거운 일을 할 땐 시간이 짧다.
“꽤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켰구나.”
“물론입니다.”
부곡주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약 광증이라도 드러냈다간 바로 죽였을 거다.’
물론 뒤이어 떠오른 생각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괴수의 아가리에 넣었던 손에 힘을 실었다.
다음 순간!
그그그그긍……!
놀랍게도 육중한 석문이 천천히 갈라지면서 열리는 게 아닌가?
어찌나 오랫동안 굳게 자리를 지킨 것인지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천장에서는 부스러기가 쉼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그그긍!
마침내 석문이 활짝 열리자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훤히 드러났다.
남궁천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다행히 잠겨 있진 않았다.
‘하긴. 석문을 그렇게 악랄하게 만들었으니, 굳이 여기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겠지.’
남궁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과연 휘황찬란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벽마다 야명주가 여러 개 박혀 있었는데, 갖가지 도검창이 걸려 있었고, 선반마다 평소 구경하기 힘든 신병이기가 널려 있었다.
“우와. 엄청나네요!”
부곡주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자, 남궁천이 뒤통수를 또 후려쳤다.
딱!
“윽……! 왜……?”
“내 뒤에 서지 말라고 했지?”
“앞장서라고 하지 않으셔서…….”
“그럼 밖에서 기다려야지.”
“죄송합니다.”
부곡주가 얼른 앞으로 걸어가자, 남궁천이 다시 뒤통수를 때리고는 말했다.
“가려서 안 보이잖아.”
“그럼 어쩌라는 건지…….”
“옆에 서라.”
“알겠습니다.”
부곡주가 다시 남궁천 옆으로 다가갔다.
남궁천은 온갖 신병이기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과연. 이만하면 남궁세가가 재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군. 표창이나 암기류는 당가에 좀 나눠주면 될 것 같고.’
암기 종류도 꽤나 다양했다.
죽통 같은 것에 달린 실을 잡아당기면 수백 발의 세침이 발사되는 것도 있었다.
하여튼 강호인이란 어쩌면 사람을 많이 죽일 수 있을까만 연구하는 변태 같은 놈들이다.
뭐, 그런 무기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가는 자신도 변태 같은 놈이지만.
견물생심이라던가?
애초에 신병이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던 남궁천도 자꾸만 반짝거리는 것들을 보니 눈길이 가면서 마음이 생긴다.
‘어디 나도 이 기회에 좀 괜찮은 게 없는지 볼까?’
사실 웬만해서는 벽라검보다 나은 걸 찾기는 어려우리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쓸 만한 무기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괜찮은 물건이 나오면 따로 챙겨두기도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알아.”
“예?”
“살수 주제에 신병이기는 무슨. 사람 죽일 때는 그냥 주변에 잡히는 걸로 하는 거다.”
“그럼 신병이기는 언제 쓰는……?”
“나를 지킬 때.”
“그렇군요.”
“적어도 신병이기에 대한 예의다. 그러니까 살수들에겐 절대 필요 없는 게 신병이기다.”
“……그렇군요.”
조금은 기대를 하던 부곡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이기들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시종 번쩍이는 빛을 뿜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독 고철 같은 단검 한 자루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다들 자태를 뽐내는데 단검 한 자루만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으니 오히려 눈길이 갔다.
남궁천이 걸음을 멈추고는 단검을 집어 들었다.
“이건 뭐지?”
먼지를 툭툭 털어내자, 뽀얀 검신이 드러났다.
“뭔가 평범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요사스럽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부곡주의 말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 번 시험을 해봐야겠다. 대라.”
“예? 뭘…… 댑니까?”
“팔뚝.”
“제 팔뚝…… 을요?”
“그럼 내 팔뚝을 썰까?”
“아니…… 그렇다고 제 팔뚝도 좀…….”
“확실히 살 만해졌지?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 죽이고 다닐 때가 편하고 좋았는데. 그렇지? 그냥 좋았을 때 깔끔하게 남방살처럼 머리를 터뜨려서…….”
“여기 대령했습니다.”
부곡주가 군말 없이 팔뚝을 불쑥 내밀었다.
남궁천이 가볍게 단검을 휘둘러 부곡주의 팔뚝을 얕게 베어냈다.
피츗!
“끄음.”
“엄살떨지 마라. 안 뒈진다.”
“예…….”
“좀 어때?”
“그냥…… 아픈데요.”
“다른 건?”
“별로…….”
“뭐야? 이거? 아무 기능도 없구만.”
그렇다고 날이 유독 잘 드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가 고철 하나가 섞여 들어온 모양이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단검을 어깨너머로 대충 던졌다.
댕그랑.
“어어?”
순간 부곡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단검을 가리켰다.
“왜? 뭐?”
남궁천이 얼른 묻자, 부곡주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방금 저 단검이 제가 있는 쪽으로 스윽 미끄러졌습니다!”
“단검이 이쪽으로 미끄러졌다고?”
“예! 분명히 봤습니다.”
“그럴 리가.”
“아닙니다. 분명히 제 쪽으로…… 다시 한번 던져보시지요?”
“흐음. 그러지.”
남궁천이 단검을 주워 들었다가 다시 바닥에 슬쩍 던졌다.
댕그랑!
그러자 제자리에서 몇 번 튕긴 단검이 일순 부곡주 방향으로 스륵 미끄러지는 것이 아닌가?
“어엇!”
“보셨죠? 보셨죠?”
“응. 봤어. 마치 저절로 움직인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요! 역시 뭔가 요상한 검입니다!”
“뭐지?”
남궁천이 단검을 다시 주워 들고는 손바닥에 올려두고 찬찬히 관찰했다.
그런데 일순 단검이 빙글 돌아가면서 검첨이 부곡주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어?”
“신기하네요.”
“너, 옆으로 가봐.”
“이렇게요?”
부곡주가 옆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도 단검이 빙글 돌면서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이 단검이 널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오오! 신기합니다! 혹시 이 녀석 주인을 알아보는 건 아닐까요? 제가 이 단검의 주인이라는 거죠. 하하핫!”
“그게 아니면 죽일 놈을 알아보는 건가?”
“아…… 설마요…….”
파안대소하던 부곡주의 웃음이 일순 쑥 들어갔다.
확실히 단검은 남궁천이 자리를 옮길 때도 부곡주만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나침반처럼.
‘가만…… 나침반이라.’
생각을 마친 남궁천이 단검으로 손바닥을 스윽 그었다.
“곡주님?”
“확인을 좀 해보려고.”
대수롭지 않게 말을 마친 남궁천이 단검을 부곡주에게 휙 던졌다.
“손바닥에 올려봐.”
“예? 아, 예.”
부곡주가 얼른 손바닥을 펴고는 단검을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단검이 빙글 돌면서 이번엔 남궁천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남궁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이거 재미있는데?”
“이번엔 왜 곡주님을 가리키는 거죠?”
“이 단검은 마지막으로 맛본 피의 주인을 찾는 거다.”
“아……!”
“재미있는 물건이니 이건 내가 가져야겠어.”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단검을 가져갔다.
“이제부터 요놈 이름은 추혈검(追血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