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나 아닌데?
“잡아라앗!”
“놓치면 안 된다! 여의치 않으면 영감도 죽여랏!”
연무 너머에서 성난 고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남궁천은 검을 휘둘러 앞을 막은 자들을 베어내며 곧장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거, 너무하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늙은 영감한테.”
“닥쳐라! 저놈들 말보다 네놈 말이 더 기분 나빠!”
“영감이 성질머리하고는.”
“뭬야?”
남궁천과 나란히 달리던 천독노가 눈알을 부라렸다.
그때였다.
쒸에에에에엑!
단 한 자루의 비수가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피햇!”
남궁천이 얼른 천독노를 떠밀면서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파라라라, 따앙!
검신에 부딪친 암기가 연무 너머로 사라졌다.
남궁천은 어깨가 아릿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과연…… 사천당가라는 건가?’
당고륜이 날린 암기일 것이다.
만약 당고륜뿐만 아니라, 사천당가의 장로들과 수뇌인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면 천독노를 빼내기가 어려웠으리라.
하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파밧!
장원을 완전히 벗어난 남궁천이 정신없이 내달리는데, 다시 암기 몇 자루가 등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쒸쒸에엑!
“치잇, 귀찮게!”
짜증스럽게 혀를 찬 남궁천이 반원을 그리며 돌아서서는 검을 연이어 휘둘렀다.
따당! 땅! 따앙!
날아드는 암기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어찌나 강맹한 기운을 머금었는지 암기를 하나씩 쳐낼 때마다 남궁천의 몸이 한 보씩 쭉쭉 미끄러진다.
이게 정말 사람의 손으로 던진 암기가 맞나 싶다.
“제길, 도대체 몇 개를 던지는 거야?”
쒸에에엑!
암기 하나를 쳐내고 나면 또 다른 암기가 연무를 뚫으며 나타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암기들이 날아드는 경로가 제각각 다르면서도 정확히 자신을 노린다는 점이다.
‘암기를 쳐내는 소리를 듣고 날린 것이겠지.’
따앙!
이번에 쳐낸 암기는 마지막에 갑자기 궤도가 휘어 버리면서 급소를 노렸다.
이러니 끝까지 방심할 수가 없다.
쒸에에에엑!
또다시 날아드는 암기!
시커먼 기운을 품은 암기가 살아 있는 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날아든다.
‘막는다!’
남궁천이 이를 악물고는 검신을 휘둘렀다.
뚜까아아앙!
마침내 불꽃이 터지면서 검신이 부러져나갔다.
휘리리릭!
그 바람에 복면 한쪽이 부러져 나간 검신에 베이면서 툭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천독노가 뿌린 백색 가루 덕분에 목격자가 없다.
뺨을 타고 한 줄기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후우, 위험했다.’
얼굴에 상처라도 남게 되면 그게 곧 증거가 될 수 있다.
한편 남궁천이 암기를 막아내는 동안 천독노는 이미 연무 너머로 사라진 듯했다.
타앗!
남궁천이 그대로 몸을 돌려 천독노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영감!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물건이 나한테 있다는 걸 잊지 마!”
한참을 앞서 달리던 천독노가 남궁천의 소리를 듣고는 걸음을 늦췄다.
‘아차차……!’
하마터면 이대로 영영 떠날 뻔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아직 쌍두오독을 가지지 못했다.
당가의 포위망이 생각보다 거세서 이대로 달아나기만 하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제길, 저 애송이 놈이 약삭빠르군. 정말이지 못 된 것만 물려받았다니까!’
천독노가 어금니를 꾹 씹는 사이, 남궁천이 자욱한 연무를 뚫으며 나타났다.
“흐흐. 다행히 잊진 않은 모양이네?”
“시끄럽다. 어서 가자. 우선은 안전한 곳에서 얘기하자.”
“그러지, 영감.”
남궁천이 히죽 웃어 보이고는 앞장서서 달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멀찍이 사라지자 백색 가루가 만든 연무도 서서히 희미해 져갔다.
점점 옅어지는 안개를 뚫고 나타난 당고륜.
휘리리릭, 척!
바람처럼 나타난 당고륜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놓친 건가……?’
당고륜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손에 들린 암기를 보았다.
‘내 암기를 전부 막았다?’
이제 그는 상대가 남궁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심전력으로 던진 암기를 모두 막아낸 놈이 나타났다는 게 신경 쓰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게 정말 남궁천이라면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이제 약관도 채우지 못한 아이가 아닌가?
한데 회심의 일격을 모두 막아낸다?
‘허참……!’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만 나온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천당가주 당고륜의 특기는 바로 특기가 없는 것이라고.
그렇다.
그는 가문절기로 별호를 알린 자가 아니다.
주로 애용하는 절기라는 게 없다.
모든 절기를 고루 사용하는 데다 어느 하나를 지독하게 연마하여 정점을 찍은 것도 아니다.
모든 무공을 고루 적당히 익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기본적인 암기술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완벽에 가깝다.
당가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기본기가 탄탄한 자.
그게 바로 당고륜이다.
때문에 그는 늘 회심의 일격이 평범한 암기술이다.
알고도 당하고, 눈 뜨고도 당하는 게 바로 그의 암기다.
그만큼 기본에 충실하기에.
하늘을 가득 메우는 만천화우를 펼쳐놓고, 회심의 일격은 평범한 암기술로 마무리하는 남자. 그게 바로 당고륜이다.
천독노가 백색 가루를 뿌렸을 때, 당고륜은 마지막으로 남궁천을 확인한 지점에 연거푸 암기를 던졌다.
그런데 그걸 모두 막아낸 것이다.
“흐음.”
나직이 침음을 흘린 당고륜이 바닥에 떨어진 복면을 보고는 천천히 주워들었다.
“남궁천…….”
이대로 영영 사라질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자신 앞에 다시 나타나리라.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겠지.
마신단을 복용하려면.
어차피 서두를 건 없다.
천독노를 사로잡지 못한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마신단은 맹주에게 이미 보내 버렸고, 남궁천은 용공단(溶功丹)을 먹여서 제압하면 된다.
마침 장원에서 수하 하나가 급히 달려와 옆에 멈췄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됐다. 그보다 지객당으로 가서 남궁가의 손님들이 안전한지 살펴보아라.”
“존명!”
대답을 한 수하가 얼른 몸을 날리며 사라졌다.
정말로 안위를 살피라는 뜻이 아니다.
남궁천이 지객당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을 뿐.
* * *
“후우, 빌어먹을 당가 놈들.”
천독노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투덜거렸다.
남궁천이 부러진 검신을 보다가 한쪽 풀숲으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이래서 좋은 걸 써야 한다니까.”
“그래도 검을 바꿀 생각은 했구나.”
“영감,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해 보여? 벽라검을 흔들면서 나타나면 바보도 난 줄 알 텐데?”
“그런 놈이 왜 목소리는 바꾸지 않았더냐?”
“그야…… 내 목소리는 평범하니까?”
“목소리는 그렇다 쳐도 말투는 고쳐야지.”
“내 말투가 어때서?”
“정녕 모른단 말이냐? 사람 약 올리듯 삐딱하게 내뱉는 말투를?”
“흐음. 내가 그렇구나. 나는 삐딱한 녀석이었구나. 그럼 뭐 생긴 대로 살아야지. 잘 가라고, 영감.”
“인마! 어딜 가! 내놔야지!”
“삐딱한 인간은 영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소.”
“저, 저……! 내가…… 잘못했다. 말실수다. 약조한 것을 다오.”
그제야 천독노가 고개까지 숙이며 부탁하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영감, 앞으론 말조심해.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잖아.”
너한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다!
뱃속부터 치미는 분을 삼킨 천독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자, 그럼 물건은?”
“걱정하지 마. 약조는 지켜야지.”
남궁천이 품을 뒤적이다가 순간 멈칫거렸다.
“어……?”
“왜?”
“잠깐만…… 어……?”
“뭐냐? 설마 너…….”
“으악! 안 가져왔나 보다! 다시 당가로 들어가서 가져와야겠는데?”
구오오오오.
어느새 양손에 독기를 품은 천독노가 뺨을 부들거렸다.
“너 이 새끼…….”
“응? 뭐라고?”
남궁천이 어느새 품에서 쌍두오독을 꺼내 들고는 얄미운 표정으로 묻는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오?”
“클클…… 녀석,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엽구나.”
천독노가 넋 나간 사람처럼 웃는다.
잠시 같이 있을 뿐이었는데, 진력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어쩌면 저런 약아빠진 모습까지 제 아비를 꼭 닮았는지.
남궁천이 호리병을 흔들었다.
“자, 그토록 바라던 쌍두오독. 나는 신의는 확실한 사람이지. 누구랑 달리.”
“그렇군. 잘 받으마.”
천독노가 얼른 손을 뻗는데, 남궁천이 슬쩍 물러나며 물었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려고?”
“알 것 없다.”
“좋아, 더 묻진 않을게. 대신 다음에도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부탁해도 될까?”
“오냐, 그렇게 하지.”
“약속했다?”
“오냐.”
“좋았어. 그럼 가져가.”
그제야 남궁천이 천독노에게 쌍두오독을 넘겨주었다.
천독노는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쌍두오독이 맞군. 수고했다. 다신 보지 말자꾸나.”
“어어? 말이 달라지는데?”
“이놈아, 너처럼 싸가지 없는 놈을 내가 또 보고 싶겠냐? 뭐, 우연히라도 보면 도와주도록 하마. 그런데 그럴 일이 있을까? 킬킬킬.”
“하여튼 세상에 믿을 놈 없다니까. 특히 이런 늙은 구렁이들은 더욱 그렇지.”
“뭬야? 헛소리 말고 가서 마신단이나 잘 간수해라. 내가 보니 당 가주가 마신단을 빼돌리려는 것 같더구나. 너니까 알려주는 줄 알아!”
“흐흐. 걱정하지 마. 이미 그건 잘 처리했으니까.”
“벌써?”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독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너란 새끼는 정말 모를 놈이구나. 네 아비도 그랬지.”
“아무튼 영감, 다음에 또 보자고. 간만에 즐거웠어.”
“간만은 무슨…… 네놈이 날 언제 봤다고.”
천독노가 구시렁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마.”
천독노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뒤를 힐끔 보았다.
남궁천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서 자꾸만 진천랑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뭔가 통하는 상대가 있다면 바로 남궁천 같은 놈이리라.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데도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조심해라. 강호는…….”
그 순간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
“천독노! 거기 서!”
“히익! 저 계집년이 도대체 언제……? 난 이만 가마!”
천독노가 부리나케 달아나자,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이 배를 잡으며 웃어댔다.
잠시 후 고함을 질렀던 당예설이 남궁천 옆으로 날아와 섰다.
“성공했구나.”
“덕분에요. 천독노가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군요.”
“저렇게 보내주어도 되겠느냐?”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예, 당가의 만리향(萬里香)을 묻혀놨으니까요.”
“역시 무서운 녀석.”
“언제는 재미있는 녀석이라면서요?”
“아니, 이제 보니 넌 무서운 녀석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단주님은 성공하셨나요?”
당예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바로 마신단이었다.
“출구로 빠져나와 곧장 여기로 왔다.”
“좋습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는군요.”
“그럼 이제…….”
남궁천이 마신단을 품에 넣고 휙 돌아섰다.
“가시죠? 이제 소가주가 되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