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나 아닌데?
구오오오……!
당고륜의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 같았지만, 내심에서는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남궁천……!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물론 남궁천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어쩌면 자신이 맹주와 손을 잡고 마신단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눈치챘기에 이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정말로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천독노도 마교의 일원인가?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자, 당고륜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남궁천을 빤히 노려보았다.
“좋다. 자네가 누구든 본 가를 방해한다면 죽음뿐이다.”
“오, 무서워라.”
남궁천이 몸을 떠는 척하면서 양손으로 팔을 쓰다듬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하나 당고륜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이 나쁠 것도 없다.
어차피 남궁천은 견제를 해야 할 대상이다.
남궁천이 정말로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맹과 확실히 반목하는 자다.
무림맹과 척을 지는 것보단 그래도 기울 대로 기울어진 남궁가를 견제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한데 이렇게 나온다면 그야말로 마음 놓고 죽여도 된다는 뜻이 아니겠나?
명분은 충분히 갖춰진 셈.
당고륜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실망스럽긴 하군. 남궁가가 기울 대로 기울었다지만 정말 마교와 손을 잡을 줄이야.”
“웬 남궁가?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요?”
“아, 실수했네. 나도 모르게 자네가 남궁가의 소가주와 닮은 것 같아서 말일세.”
“아니, 어딜 봐서 내가 그런 개망나니를 닮았다는 거요? 복면을 덮어쓰고 있는데 당신이 내 얼굴을 알기는 아시오?”
“얼굴은 모르겠지만 목소리가 많이 닮았군.”
“목소리는 변조했다니까.”
“참으로 이상하군.”
“뭐가 말이오?”
“목소리를 변조해서 원래 정체를 숨긴 거라면, 오히려 내가 오해해 주는 쪽이 좋지 않은가? 자네가 정말 남궁천이 아니라면 말일세.”
“어…… 그렇네?”
“으응?”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소. 그렇소! 나는 남궁천이오!”
남궁천이 묘한 상황에서 이실직고 하면서 검을 앞세웠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마디 덧붙였지만.
“음…… 물론 사칭이오.”
“……그렇군.”
“진짜 내가 누군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겠지만 정체를 밝힐 수는 없소이다. 무림공적이 되긴 싫거든.”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
당고륜이 속에서 치미는 외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데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남궁천을 사칭한 건가? 자네도 남궁가에 원한이 있는가?”
“그야 당신이 날 남궁천으로 오해하고 있으니까.”
“으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자네가 남궁천이 아니라면 더 마음 놓고 죽일 수 있으니까.”
“신의도 저버리는 당가가 명분은 되게 신경 쓰시는군.”
“신의를 저버리다니?”
“천독노에게 쌍두오독을 약속해 놓고 뒤통수를 치는데 신의를 저버린 게 아니면 뭐란 말이오?”
“옳소!”
마침 곁에 있던 천독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당고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런 것까지 자네가 어찌 알았나?”
“으음…… 그건 내가 은밀히 천독노와 내통을 하고 있었으니까.”
“내 알기로 천독노는 본 가에 머문 후로 장원 밖을 나가지 않은 것으로 아네만.”
그러자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며 천독노를 돌아보았다.
“그랬어?”
“응. 그랬지.”
“아니, 왜?”
“원래 뭔가 몰두할 땐 밖을 잘 나가지 않는다.”
“허어, 주변 산책도 좀 하고 그러실 것이지.”
“당가가 워낙 넓어서 장원에서 산책해도 충분하더군.”
“그랬군. 그랬어.”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당고륜이 다시 물었다.
“정말 내통하고 있었던 게 맞긴 한가?”
“그렇소. 내가 워낙 신출귀몰하여 이 장원을 들락거렸지.”
“후후후. 뭐 어쨌든 내가 모르는 괴한이 본 가장에 침입했으니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겠지. 뭣들 하느냐? 저 두 놈을 쳐라! 복면 쓴 놈은 죽여도 좋다!”
“존명!”
당고륜의 명이 떨어지자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남궁천이 당황하며 얼른 손을 뻗었다.
“잠깐! 잠까안!”
“또 무엇이냐?”
“아니, 왜 나만 죽여도 되는 건데?”
“어차피 우리 목적은 무림공적인 천독노 하나일 뿐. 정체도 모를 네놈은 죽여도 무관하지.”
스스스스으읏.
어느새 당고륜의 양손에 시커먼 독기가 뭉글뭉글 맺히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거, 사람 차별하시네.”
“혹시 모르지. 자네가 그 복면을 벗어 던진다면 목숨은 살려줄지도.”
“난 가주와 안면이 없다니까 그러네. 복면은 그저 취미야.”
“별 괴상한 취미도 다 있구나!”
파앙!
순간 당고륜이 바닥을 차며 포탄처럼 날아갔다.
쒜쒜엑!
당고륜의 품에서 암기 두 자루가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남궁천이 얼른 허리를 젖히자, 암기 한 자루가 그대로 지나치며 뒤에 있던 천독노를 노린다.
하나 천독노도 예상했던 것인지 얼른 허리를 숙여 피했다.
곧이어 날아드는 암기는 남궁천이 발로 걷어찼다.
파앙!
휘리리릭, 콰작!
튕겨나간 암기가 전각 기둥에 깊숙이 처박혔다.
하지만 어차피 암기는 허초나 다름없었다.
진짜는 지척에 다다른 당고륜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일장이었다.
쉬퍼어엉!
‘통했다!’
당고륜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번뜩였다.
제아무리 강호신룡이라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것이리라.
지척에서 날린 암기를 피한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연환식처럼 펼쳐진 장력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일장은 흑연독(黑煙毒)을 품고 있었기에 남궁천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남궁천이 본 가에서 제공한 피독주를 복용하고 있더라도, 흑연독만큼은 피할 수 없다.
해독제는 있지만 피독주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바로 흑연독이었기 때문이다.
흑연독이라는 이름답게 시커먼 연기가 훅 퍼져나가다가 서서히 걷혀갔다.
“어떠냐? 남궁천.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나직이 말을 이어가던 당고륜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내뻗은 일장은 남궁천이 아니라, 어느새 앞을 가로막은 천독노의 등에 작렬한 게 아닌가?
가만?
이건 막은 게 아니다.
자세를 보아하니, 남궁천이 뒤에 서 있던 천독노를 억지로 끌어당겨 앞을 막은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천독노가 잔뜩 인상을 쓴 채 남궁천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이 애송이 새끼가…… 감히 날 방패막이로 이용해? 쿨럭! 쿠웨엑!”
천독노가 기침과 토악질을 하자 시커먼 독기를 머금은 체액이 와륵 쏟아져 나왔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영감은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잖아.”
“빌어먹을 놈! 하여튼 네놈은 네 아비…….”
‘네 아비랑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고 말하려던 천독노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간 남궁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뭐, 지금도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지만, 다른 게 있다면 증거가 없다는 것이니까.
한편 당고륜이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펄쩍 뛰어 물러났다.
과연 천독노라면 흑연독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
흑연독은 피독주가 마땅치 않을 뿐이지,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한 자라면 잠시 앓고 마는 수준이니까.
남궁천이 당했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졌겠지만, 내성이 강한 천독노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독이 아니다.
“노오옴!”
“죽어라앗!”
당고륜이 당황한 사이 수하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덤벼들었다.
암기를 날리는 자들, 독을 풀어내며 지척까지 달려드는 자들, 병장기를 휘두르며 몸을 사리지 않는 자들까지.
각기 다른 무공을 펼치는데도 이들은 서로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딜!”
“뒈지고 싶으면 덤벼라, 애송이들!”
남궁천과 천독노가 본격적으로 당가 무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따다다당! 채챙! 까앙!
퍼퍼펑!
금속성이 연이어 터지고, 불꽃이 일어나면서 독무가 자욱하게 피어난다.
거기에 장력이 폭발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연신 울린다.
절대적 다수가 단 두 사람을 상대하는 중임에도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시끌벅적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고륜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도대체 이것들 뭐야?’
복면인은 틀림없이 남궁천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한데 이해가 안 된다.
남궁가의 소가주가 천독노와 합을 이뤄서 싸우는데 이렇게 자연스럽다고?
이게 가능한 상황인가?
허공에서 자욱하게 비산하는 독은 천독노가 와해시켜 버리고, 어지럽게 날아드는 암기는 복면인이 죄다 쳐내버린다.
지척까지 다다라서 찔러 들어오는 창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떨쳐낸다.
그야말로 두 사람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완벽한 합격술.
이 정도의 합을 이루려면 수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할 터.
한데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남궁천이 저 천독노와 언제 이런 합을 맞춰 봤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지금 보면 저 두 사람은 최소한 수년 동안 무수한 전투를 치른 것 같지 않은가?
쉬퍼엉!
“크아아악!”
마침 천독노가 쌍장을 뻗어내며 남궁천에게 달려들던 무인 하나를 날려 보냈다.
“훅, 훅……! 에고, 늙으니까 벌써 숨이 차는구나.”
“그러니 독만 만지지 말고 운동을 좀 하라고.”
“닥쳐라, 이놈아. 네가 뭘 안 다고 나불거리느냐?”
천독노가 남궁천의 잔소리에 반박했지만, 내심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새파란 애송이 녀석을 보면 볼수록 그 녀석 생각이 난단 말이지.’
사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당고륜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처음 만난 이 아이가 자신의 싸움 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겨서 방패막이로 사용했을 때는 솔직히 기분이 팍 상했다.
한데 그마저도 예전 진천랑이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마치 자신을 병장기처럼 휘두르는 진천랑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둘이 함께 싸울 때는 겁날 게 없었다.
그만큼 둘의 합격술은 완벽에 가까웠기에.
함께 싸울 때면 진천랑이 자신의 사소한 습관까지 다 아는 듯했다.
나중엔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초견파공안.
진천랑은 그 능력으로 자신의 싸움 방식을 세세히 알고 있었던 것.
게다가 무림공적이라는 처지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해 더욱 합이 잘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래서 진천랑과는 꽤 친하게 지냈고, 독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었다.
진천랑과 함께 다니면 천하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피곤했다.
다 같은 무림공적이어도 진천랑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무림공적 일 호가 가지는 위험은 상상 이상이었다.
스치는 바람에도 살기를 느끼기 일쑤.
정말이지 측간에서 똥을 쌀 때도 긴장해야만 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아들놈이라서 그런가? 왜 이렇게 나랑 잘 맞아?’
모처럼 수년 전으로 회귀한 기분이랄까?
일거수일투족이 그저 즐겁다.
무아지경 속에서 독을 뿌리고, 권장을 날리는 게 이렇게 즐거웠던가?
‘모처럼 옛 생각이 나는구나!’
촤아아악!
순간 천독노의 소매에서 백색 가루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가 소리쳤다.
“달려라! 꼬마야!”
“영감, 바짝 따라붙으라고. 뒤처져서 혼자 뒈지지 말고!”
“저, 저……! 개 같은 성질은 닮지 않아도 될 것을……!”
천독노가 실소를 터뜨리고는 발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