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감히 본 가를 건드려?
촤촤촤촤아악!
“크아악!”
“끄아아악!”
파육음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솟구쳤다. 사위에서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훅, 훅, 훅……!”
숨이 턱 끝에서 연신 토해져 나온다. 들이마신 공기가 폐부에 닿지도 않을 것 같다. 그만큼 빠르게 헐떡이는 중이다.
비틀……!
순간 균형을 잃었던 남궁표가 얼른 자세를 고쳐 잡으며 검신을 앞세웠다.
“훅, 훅, 후욱……!”
검신이 떨린다. 아니, 검파를 쥔 손과 팔이 통째로 떨고 있다.
다리도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린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다.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몇 명이나 베었을까?
남궁표는 흐려진 눈으로 주변을 슬쩍 훑어보았다.
적아가 구분도 되지 않는 사상자들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수북하게 쌓여 있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봐주기도 힘든 광경이다.
하나 남궁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이라는 걸 꺼버리고, 감정이라는 걸 지운 상태다. 그저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르고 발을 놀렸다.
때문에 몇 명이나 베고,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알 수 없다.
투둑.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아주 미약한 소리였지만 남궁표는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쒸아아아악!
지칠 대로 지친 인간이 휘두른 검신이라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맹한 검기가 날아간다.
콰가강!
결국 애꿎은 담벼락만 작살났다.
조금 전의 소리는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 파편 때문이었지만, 남궁표가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주르륵.
남궁표의 뺨을 타고 피땀이 흘러내린다. 턱 끝에 맺힌 피땀이 뚝뚝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이 피가 자신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하아. 하아…….”
남궁표는 연신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고요하다.
오로지 예민한 기감과 스스로 내쉬는 숨소리만 느껴질 뿐.
남궁표를 비웃던 흑의인들은 이제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그 많은 동료들이 저 지독한 영감에게 당해 죽거나 다쳤다.
연무실 안마당에 서 있는 자는 이제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저 지독한……!”
“훅, 훅…… 들어오라니까,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회색빛 눈동자로 뭐에 쓰인 듯 중얼거리는 남궁표의 모습은 가히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야차 같았다.
비틀…….
다시 한번 균형을 잃고 주춤거리던 남궁표가 얼른 검을 고쳐 잡는다.
정말이지 툭 치면 픽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럼에도 흑의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 모습에 넘어가서 덤벼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자들이 벌써 다섯이 넘었다.
지독하게도 쓰러지지 않는다.
지칠 줄도 모르고 공포도 모르는 강시 같다.
“클클, 쫄았느냐?”
“이익……!”
남궁표의 도발에 흑의인들이 어금니를 까득 갈고는 숨만 크게 쉬었다.
그때 연무실 안마당으로 한 사내가 저벅저벅 들어섰다. 핏빛 머리카락에 핏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였다.
하나 남궁표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흑의인들은 뒤에서 다가오는 그를 의식하지 못했다.
“……켜라.”
“음?”
흑의인 하나가 움찔거리고 뒤를 돌아보는데, 마침 한 줄기 섬광이 그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피츗!
“어……?”
츄아아아아!
순식간에 목이 날아간 흑의인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흑의인의 목을 쳐낸 사내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길을 막고 있어. 쯧…….”
남궁표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기운을 풍기는 상대를 보고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고수…….’
아득한 본능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경고한다.
그가 바로 혈우대와 혈영대를 이끌고 온 혈영신마였다.
남궁표가 검을 앞세우고 혈영신마를 겨눴다.
“덤비겠느냐?”
“클클클. 그 꼴로 날 막아설 수 있겠소?”
혈영신마가 입매를 길쭉하게 찢는다.
남궁표도 씨익 웃으며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눈짓했다.
“보다시피.”
“클클. 재미있는 영감이군.”
말을 마친 혈영신마가 허리춤에서 도를 뽑아냈다.
스르르릉.
아침햇살을 받은 도신이 시뻘건 빛을 뿜어냈다. 수많은 인간의 피를 머금은 칼이어서 그런지 도신에서 요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혈영신마가 도신을 혀로 핥았다.
“영감의 피 맛은 어떨지 궁금하군.”
“미친놈이구나.”
“영감도 미친개니까 우린 꽤나 잘 통하지 않겠는가?”
“잔말이 많다. 여길 들어가려거든 노부를 꺾어라.”
“그럼 사양하지 않고.”
처억!
순간 혈영신마가 오른발과 오른손을 뒤로 쭉 빼더니 몸을 낮게 숙였다.
다음 순간!
파앙!
응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혈영신마가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들었다.
남궁표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혈영신마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마치 공간을 쪼개어 그 틈새로 비집고 달려드는 느낌이랄까?
“흡!”
남궁표가 짧게 호흡을 삼키면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마침내 도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쩌어어어엉!
천지가 격동할 듯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남궁표의 신형이 포탄처럼 튕겨나가면서 연무실 출입문에 부딪쳤다.
콰아아앙!
쩌적…… 쩍!
문짝에 처박혀 큰 대자로 뻗은 남궁표가 그대로 고꾸라지자,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던 출입문이 이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콰자자장……!
조각조각 파편이 나서 무너지는 출입문을 보고 흑의인들조차 넋을 놓고는 입을 딱 벌렸다.
강시처럼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남궁표가 눈을 허옇게 뒤집은 채 엎어져 있자, 흑의인들이 경외감을 담은 눈길로 혈영신마의 등을 보았다.
혈영신마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락이 있을 줄 알았더니…….”
혈영신마가 혀를 차고는 도신을 갈무리했다.
철컥!
“별로 재미없네.”
무심히 중얼거린 그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제 부서진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될 일.
남궁표를 지나 몇 걸음을 옮기던 그가 일순 멈칫거리고는 눈을 내리깔며 돌아보았다.
“음?”
기절한 줄 알았던 남궁표가 꿈틀거리면서 깨어나고 있었다.
혈영신마가 냉소를 지었다.
“숨겨둔 뭔가는 없고…… 정말 단순히 집념이었을 뿐인가? 집념이란 결국 약자의 미련일 뿐인 것을.”
그가 쓴웃음을 짓는 사이 남궁표는 어느새 비척거리며 일어나서는 스산한 목소리를 흘려냈다.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여기 서 있는 한……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고…….”
“난 또 나자빠져 있기에 들어가도 되는 줄 알았지.”
혈영신마의 조소에 남궁표가 벼락처럼 고함을 내지르며 다시 검을 휘둘러왔다.
“지금은 이렇게 서 있지 않은가!”
쒸에에에엑!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검봉이 혈영신마의 눈을 찌르기 직전!
탁.
“……!”
남궁표의 눈이 부릅떠졌다.
‘손으로……!’
놀랍게도 남궁표가 내지른 검신이 혈영신마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혈영신마가 한숨을 내쉬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형편없군.”
다음 순간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검신이 뚝 부러지는 게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번만큼은 남궁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지쳤다지만 검신을 이렇게 젓가락 부러뜨리듯 다루다니?
하지만 놀랄 겨를도 잠시,
쒸에에엑!
‘위험!’
혈영신마가 부러진 검신을 그대로 남궁표에게 내질렀다. 미처 대응을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감각이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다.
푸욱!
“끄아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뇌리를 들쑤시는 고통이 남궁표를 덮쳤다.
“흐끄으윽!”
남궁표의 한쪽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부러진 검신이 오른쪽 눈에 박혀 있었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물러났기에 즉사만은 피할 수 있었다.
주저앉아서 절규하는 남궁표를 두고 혈영신마가 무심히 돌아섰다.
“뭐, 우리 애들을 도륙하던 모습은 나름 인상 깊었소.”
입매를 비튼 혈영신마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이…… 찢어죽일 노옴! 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아악!”
남궁표가 발악하듯 외치며 한쪽 눈에 박힌 파편을 쑥 뽑아내고는 재빨리 던졌다.
쒸에에엑!
하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칼날은 이번에도 혈영신마의 손에 다시 잡히고 말았다.
혈영신마는 칼날에 꿰인 눈알을 보고는 히죽 웃더니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과연 마교에서 가장 잔악하다는 혈영신마다운 행동이었다.
“퉤! 역시 맛없군. 그래도 남궁세가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햇살을 보게 해줬더니…… 굳이 처절한 죽음을 원하는가?”
혈영신마가 저벅저벅 돌아오더니 막 일어서려는 남궁표의 머리를 발로 꾸욱 밟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욱!
“끄아아아아악!”
핏빛 도신이 남궁표의 오른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끄아아아아악!”
남궁표가 다시 한번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런 중에도 남궁표는 다른 한손으로 혈영신마의 바짓단을 붙든 채 놓지 않았다.
혈영신마가 미간을 구기고 내려다보자, 남궁표가 한쪽 눈을 치뜬 채 표독스럽게 외쳤다.
“너는…… 절대 못 간다! 그 물건은 우리 소가주의 것이다!”
“미련하군.”
혈영신마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도신을 쑤욱 뽑아냈다.
“그럼 이번엔 왼팔을 찢어주면 되겠소? 영감도 찢어 죽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아, 아니지. 눈알부터 마저 없애는 게 낫겠군. 그래야 아침햇살을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을 것 아니겠소?”
“네 이놈…… 내 죽어도 악귀가 되어 네놈을 저주하리라.”
“괜히 마음 약해지는 소리는 하지 마시고. 이것도 영감이 자초한 거니 원망은 맙시다.”
무덤덤하게 말을 마친 혈영신마가 핏빛 도신을 슬쩍 옮겨서 남궁표의 남은 눈알을 겨눴다.
이제 힘만 살짝 주어도 끝인 상황.
그럼에도 남궁표는 끝까지 한쪽 눈을 치뜬 채 혈영신마를 노려보았다.
혈영신마가 피식 웃었다.
“그 눈을 보니 역시 눈알을 선택한 게 탁월한 것 같소.”
그렇게 혈영신마가 도파를 쥔 손에 힘을 싣는 순간!
슈컥!
“응……?”
한 줄기 미풍에 이어 혈영신마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혈영신마는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그건 남궁표도 마찬가지.
‘어……?’
상황을 채 깨닫기도 전에 혈영신마의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혈영신마가 일순간 옆을 휙 돌아보았다. 그가 다시 한번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누, 누구……! 어, 어느 틈에?’
놀랍게도 그곳에는 남궁천이 벽라검을 치켜든 채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남궁표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 소가주!”
“소가주……?”
순간 혈영신마의 표정이 격하게 흔들렸다.
소가주라니?
이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소가주? 아……! 그 남궁천이라는 녀석인가?
한편 일격에 혈영신마의 팔을 날려 버린 남궁천이 검신에 묻은 피를 핥더니 침을 탁 뱉었다.
“퉤, 역시 맛도 더럽게 없네. 감히 본 가를 건드려?”
다음 순간, 착 가라앉은 남궁천의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콱 뒈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