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남궁세가 가주전 회의실에 모처럼 장로들을 포함한 수뇌인사들이 모였다.
가세가 기울고 나서 이렇게 대대적인 회의가 열린 것은 오랜만이었다. 물론 지난번 소가주 결정 안건으로 회의가 진행되긴 했으나, 장로들은 빠진 상태.
하지만 오늘은 별원에 기거하던 장로들까지 모두 모였으니 그 규모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수뇌인사들은 마침 남궁검이 상석으로 나타나자 입을 다물고 시선을 모았다.
남궁검이 좌중을 한차례 훑고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것은 최근 본 가에 다소간의 변화가 있어 한 번 정리를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자 장로원주 남궁헌상이 탁자를 탁 내려치더니 입을 열었다.
“내 그렇지 않아도 그 일에 관해 가주께 드릴 말씀이 있었소.”
남궁검의 시선이 남궁헌상에게 향했다. 언뜻 날카로운 눈초리를 마주하자 남궁헌상은 잠깐 움찔거리고는 눈을 가늘게 여몄다.
“소가주가 결정됐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소.”
“맞습니다. 소가주는 남궁천으로…….”
“어째서 그 중한 결정을 내리면서 장로원에 한마디 통보도 없이……!”
“소가주를 결정하는 권한은 오로지 가주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소가주를 정하는 자리에는 장로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남궁검은 예의 그 냉랭한 표정으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남궁헌상은 움찔거리면서도 쉬이 물러나지 않고 받아쳤다.
“물론 알고 있소. 하나 관례대로면 소가주를 결정하기 전에 장로원과 한마디 상의 정도는 해왔던 것으로…….”
“관례는 관례일 뿐입니다. 관례를 따르지 않는다고 문제 될 건 없지요.”
“가주……!”
남궁헌상이 엄중한 표정으로 다그치자, 남궁검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이 숨 막힐 듯한 눈싸움을 하는 사이 남궁효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어, 원주님. 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지요.”
“이게 뭐요?”
남궁헌상이 남궁효가 내미는 목함을 힐끔거리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한번 열어보시지요.”
남궁효가 손짓을 하자 남궁헌상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목함의 덮개를 열었다.
다음 순간 청아한 향이 실내에 가득 풍겨 나왔다. 시종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궁헌상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이건……?”
“소림의 대환단입니다.”
“대…… 대환단!”
“무당의 태청단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소환단, 상청단, 자소단 등 많이 있지요.”
“허어! 어떻게 그런 귀한 것들이?”
“참고로 지금 드린 건 장로원에 배당된 것입니다.”
남궁헌상은 갈수록 모를 표정이 되어서는 멍한 시선을 남궁검에게 돌렸다.
설명을 바라는 눈치였다.
제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더라도 굶주린 상황에서 먹잇감이 눈앞에 떨어지면 으르렁거리기보단 입맛을 다시는 법이 아니겠는가?
마침 남궁화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가주가 구해온 것이에요.”
“소가주가……?”
“네. 마단곡 영단을 찾아냈거든요.”
“마단곡 영단을……!”
남궁헌상은 이제 놀라기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남궁화가 그간의 상황을 짧게 정리해서 전달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궁헌상은 이제 날카로웠던 기색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그런…….”
대살성의 사생아를 소가주로 삼은 것에 대해 제대로 한번 물고 늘어지려고 했다.
더구나 최근 장원도 다시 확장 공사를 하는 등 가세가 좋아지는 마당에 왜 하필 소가주를 남궁천으로 뽑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오히려 남궁천 덕분에 이뤄진 것이라니.
남궁효가 말을 덧붙였다.
“하여 장로원을 다시 장원으로 들일 생각입니다. 현재 가주전이 있는 심청원(深靑院)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구역으로 나눠서 북청원(北靑院)에 장로원을 두려고 합니다. 괜찮으실까요?”
“끄음. 나쁠 건 없겠지.”
“그럼 재가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남궁효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남궁헌상도 더 이상 불만을 뱉진 않았다.
아니, 불만이 없을 수밖에.
그동안 코딱지만 한 장원에 발 디딜 곳도 없어서 별원에서 따로 지내던 장로들이었다.
한데 장원 내에 장로원을 지어주겠다니 있던 불만도 쑥 들어갈 지경이다.
게다가 귀하디귀한 영단까지 덤으로 얻은 상황.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남궁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듯 소가주가 세운 공이 적지 않습니다. 하여 오늘은 소가주의 공을 인정하고 적절한 상을 내리는 게 좋을 듯한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끄음. 뭐…… 보기보단 소가주가 수완이 좋은 듯하군.”
남궁헌상이 다소 애매한 반응을 보이자, 남궁표가 슬쩍 나서며 물었다.
“그래서 가주님은 어떤 포상을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소가주가 현재 본 가의 보검인 벽라검을 임시로 사용하는 중일세. 정식으로 검을 준 것은 아니지. 해서 그 벽라검을 소가주에게 정식으로 하사할까 생각하네만.”
“그건 안 됩니다!”
타앙!
갑자기 남궁표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근처에 있던 남궁효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남궁표의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앞서 남궁천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사게 되는 바람에 한동안 가문의 조사까지 받지 않았던가?
지금이야 혐의를 벗었다지만, 당시의 앙금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어쩌면 당장에라도 기회만 된다면 소가주를 갈아치워 버리려는…….
“고작 벽라검을 하사하는 게 대체 무슨 포상이란 말입니까?”
‘으응?’
남궁효는 생각을 멈추고는 남궁표를 휙 돌아보았다.
남궁표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본 가의 소가주입니다. 남궁천이 지금까지 해낸 일이 어디 한두 개입니까? 이현의 상권을 수복한 것도 모자라서 마단곡 영단까지 쟁취했습니다! 거기에 지난번 칠대세가회에서는 그 재수 없는 칠대세가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이번에 팽가와 언가를 구했다는 소식은 다들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또 금왕의 명패를 받은 건 어떻고!”
남궁표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자 좌중의 사람들이 다들 멍한 표정이 돼서는 그를 보았다.
어깨까지 들먹이며 씨근거리던 남궁표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보십시오. 남궁천이 소가주가 되고 나서 본 가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작 벽라검이라니요! 가주님! 형님! 배포가 그 정도밖에 안 되십니까? 이미 들고 다니는 벽라검을 정식으로 준다는 게 뭐가 포상입니까?”
“저어, 숙부…… 우선 진정 좀 하시고…….”
남궁화가 슬쩍 끼어들어 말렸지만, 남궁표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너도 네 아버지가 저런 결정을 내리면 옆에서 뭐라고 말이라도 했어야지! 소가주전을 따로 건설해 줘도 모자랄 판에! 아니, 이참에 아예 무한에 소가주의 집 한 채를 건설합시다. 그 녀석…… 아니, 소가주는 용입니다! 아시겠어요? 우리가 못하는 일을 죄다 해내는 녀석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은자도 넉넉하게 챙겨주고요! 내가 그간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설움을 생각하면…… 크흡……!”
마침내 남궁표가 눈시울까지 붉히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남궁검이 물끄러미 보다가 혀를 찼다.
‘우냐……?’
왠지 안쓰럽게 느껴지긴 한다.
그래도 가문을 일으켜 보겠다고 무림맹 가까이 터를 옮겨서 갖은 애를 쓰던 남궁표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다른 이들의 반응도 어딘지 숙연해졌다.
마침 듣고만 있던 남궁설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공감해요. 그 아이…… 우리 소가주는 더 큰 포상을 받아야 마땅해요. 이미 들고 다니는 검을 정식으로 하사한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하면 어떤…….”
그때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창응대주 손우곤이 달려 들어왔다.
남궁헌상이 눈살을 구기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지금 회의 중이라는 걸 모르는……!”
“정체불명의 적이 침입했습니다!”
“뭐야?”
순간 회의실에 있던 수뇌인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 * *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에 있는 거야?”
복성은 지친 발걸음을 가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황산 인근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살펴봤지만 사라진 시종 두 명이 끝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강을 한번 다잡던지 해야지. 이래서야 원.”
이제 막 세가가 힘을 얻어 새롭게 출발하려는데 시종들부터 이렇게 해이해지면 되겠는가?
어깨까지 들먹이면서 가장으로 걸어가던 복성이 순간 멈칫거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물론 자신이 가고 있는 쪽은 장원 서쪽 출입로이기 때문에 정문은 아니다.
하지만 문지기 두 명이 서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할 무인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문지기들도 농땡이 부리는 건가?’
이맛살을 푹 구긴 복성이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한낱 시종인 주제에 수문 무사들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
하나 이렇게 태만하다면 윗사람에게 이 사실을 낱낱이 고해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단단히 생각하며 서문으로 다가가니 정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다들 정신 상태가 너무 해이해졌어! 이래서야 우리 세가가…….’
무심히 문을 열고 들어서던 복성이 멈칫거렸다.
‘피 냄새!’
평소 냄새를 워낙 잘 맡아서 개 코라고 불리던 복성이었다.
그가 얼른 주변을 둘러보니 문 바로 뒤쪽에 수문 무사 두 명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으헉!”
화들짝 놀란 복성이 뒤로 물러서다가 문에 쿵 처박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제야 아스라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함과 욕설, 그리고 비명까지.
“이, 이게 뭐야……?”
그 순간, 누군가 복성의 다리를 콱 움켜잡았다.
“우아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른 복성이 얼른 시선을 내려 보니 쓰러진 문지기 중 한 명이 복성의 발목을 콱 움켜쥐고 있었다.
“무, 무사님! 괜, 괜찮습니까요?”
복성이 얼른 다가가서 부축하자, 수문 무사가 울컥 피를 토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서…… 가서…… 도움을……!”
“일단 의원을 불러서 치료를……!”
“안 돼! 시간 없어! 많다…… 헉, 헉……! 적이 많아! 본 가 무인들로는 턱없이 부족…… 쿨럭! 어서 도움을……!”
“적이 많다니요? 대체 그 많은 적이 어디서…… 아니, 그보다 도움은 어디로 가서 청하면……!”
복성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힘겹게 말을 뱉던 문지기가 이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말았다.
복성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실제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청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멀리서 들리던 난투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도, 도움을……! 도움을……!”
이미 저 지경이 되었다는 건 가문의 모든 무인들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터였다.
하면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신이 가봐야 도움이 될 건 없으리라.
“도움을 청해야 해! 어디든……!”
비틀거리며 일어난 복성이 무작정 장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어디로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장로들이 이미 모여 있으니 장로원에 갈 필요는 없다.
그럼 어디로? 어디로……?
무작정 걷던 복성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 가문으로 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길은…… 황산윤가!”
그렇다.
지금 황산에서 가장 빨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은 황산윤가밖에 없다.
하지만 황산윤가가 과연 남궁세가를 도와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는데?
그래도 해야만 한다.
문지기가 말하지 않았나?
적이 너무 많다고.
하긴.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천하의 남궁세가다. 남궁검 가주의 무공만큼은 건재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그런 남궁세가를 습격했다는 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단 한 명의 무인도 아쉬운 상황이리라!
“어떻게든 황산윤가를 설득해서 도움을 받아야 해!”
복성이 날듯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