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31화 (230/508)

231. 남궁세가가 내 손에 달렸다

남궁천은 담벼락을 가볍게 뛰어넘은 다음 경공을 펼쳐 단숨에 언덕까지 달려갔다.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 불을 대낮처럼 밝힌 언가장이 보였다.

혹시 모를 흑도인들의 기습을 대비해서 언가장에 거주하는 무인들은 여전히 긴장을 다진 채 번을 서고 있었다.

“이제 개방이 합류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거기에 강시도 사용할 수 있으니 만에 하나 흑도인들이 기습을 감행해도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을 거다.

물론 흑도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다시 쳐들어오진 않겠지만.

적어도 남궁천이 아는 한 류난은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할 사내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남궁천은 이제 황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온 이유는 혹시나 남은 이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을 염려한 탓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견습생 하나가 빠져나간다고 해서 눈길 하나 줄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남궁천은 진주언가 방어전의 상징적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남궁천이 내기의 흐름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 부상자 치료까지 도와주니 무인들 사이에서는 두 가주보다도 인기가 높을 지경이었다.

먼발치에서 남궁천이 지나가기만 해도 일부러 달려와서 포권하며 온갖 찬사를 늘여놓곤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남궁천이 진주언가를 떠나 황산으로 간다고 하면 누가 반기겠는가?

때문에 남궁천은 남들 모르게 언가장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럼 가볼까?’

남궁천이 몸을 돌리고는 경공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십여 장 정도 달렸을까?

저만치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응?”

걸음을 멈추고 보니 팽수혁과 진소홍, 그리고 윤종승과 유현이 팔짱을 낀 채 떡 버티고 있었다.

“야반도주냐?”

팽수혁이 태도를 어깨에 척 올리면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급하게 가볼 일이 생겨서. 다음에 보자.”

“누구 마음대로.”

“아, 이거 때문이구나. 깜빡할 뻔했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휙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팽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진짜 이걸 주려고 온 거였어?”

“그거 달란 거 아니었어?”

“아니, 뭐 주면 좋긴 한데…….”

손에 들린 소환단을 본 팽수혁의 입매가 자꾸만 씰룩인다. 하지만 남궁천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팽수혁이 얼른 표정을 굳히고는 말했다.

“물론 네가 나를 존경하는 마음에 이런 걸 선물하겠다면 굳이 거부하진 않겠다.”

“뭐래?”

“다만 나는, 아니, 우리는 널 그냥 보낼 생각이 없다.”

“비켜라. 바쁘다.”

팽수혁이 다시 성큼 나서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다급한 일이라면 도와주도록 하지.”

“아니, 비키라고.”

“우리가 함께 황산으로 가주마. 이미 홍안개 장로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황산으로 갈 거지? 만약 그곳에서 힘을 써야 할 일이 있다면 함께 싸워주마.”

“그럴 필요…….”

남궁천이 무심히 말을 꺼내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홀로 달려가는 게 훨씬 빠를 테지만 굳이 동료 의식으로 도와주겠다는 이들을 거부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래, 이번 생은 좀 달라야지.’

홀로 만인을 상대하는 건 지치기도 하고. 또 이런 상황이 거듭될수록 동료애가 생기는 것 아니겠나?

남궁천의 시선이 팽수혁 뒤에 선 다른 견습생들에게도 향했다.

다들 입술을 꽉 다문 채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었다.

마침 윤종승도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황산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나도 빠질 수 없어. 같이 가자.”

“뭐, 알겠다. 대신 뒤처져도 기다리진 않아.”

“물론!”

견습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남궁천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윤종승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런데 황산으로 갔다던 그자들 정말 흑도인일까?”

“아닐 수도 있어.”

“하긴. 홍안개 장로가 황산으로 ‘흑운대’가 간다는 정보를 받았다고 했잖아. 그런데 흑운대는 어제 언가장을 공격했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흑운대주는 남궁천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또 다른 흑운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누군가 흑무련의 조직 정보를 이용해서 흑도인인 척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윤종승이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황산으로 간 놈들이 흑도인이 아니면 대체 정체가 뭐지? 뭘 노리는 거지?”

‘이번에 봉기한 흑무련을 이용해서 남궁세가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수작일 테지. 그렇다면 역시 맹주 그 능구렁이가 제일 유력한 용의자가 될 테고.’

남궁천은 속에서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진 않았다.

대신 내심으로는 꽤 확신하고 있었다.

하필 개방으로부터 소식을 듣기 직전, 안휘성 무림맹 분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수상쩍었다.

남궁천은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을 이었다.

‘남궁세가가 대살성과 관련됐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무리수를 두진 않을 터. 그렇다면 맹주 그 능구렁이에게 다른 뜻도 있다는 건데…….’

자신이 아는 한 무림맹주는 감정에 따라서 무리수를 두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실리주의자에 가깝다.

달리 말해 자신에게 이득이 없는 한 기분이 나빠도 참을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분타까지 움직일 정도로 계획했다는 건 뭔가 이득을 노린다는 뜻이리라.

‘그럼 역시 마단곡 영단과 관련된 건가?’

남궁천이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팽수혁을 보았다.

팽수혁은 아직도 손에 들린 소환단을 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마단곡 영단이 남궁세가 수중으로 들어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

하나 맹주라면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리라.

애초에 도절귀를 호송하게 한 것이 바로 무림맹이었으니까.

만약 마단곡 영단을 노린 거라면 맹주가 직접 움직인 걸까? 아니면 손을 빌린 것일까?

우선은 가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서둘러야겠어.’

남궁천이 용천혈로 공력을 집중하며 소리쳤다.

“간다. 뒤처져도 기다리진 않을 테니 알아서 따라붙어.”

다음 순간 그가 화살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마차 한 대가 북경으로 향하는 관도를 따라 부지런히 달렸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신우가 마차 창밖으로 무심히 눈길을 두었다.

“곡주…… 아니, 련주의 계획이 틀어졌네. 이럴 때도 다 있군.”

“련주님도 사람이니까.”

맞은편에 앉은 곱상한 사내가 품에 안은 옥안영오의 깃털을 쓸면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얼핏 보면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곱상한 외모인 데다 워낙 동안이어서 미성년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나 그는 올해로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명실상부한 흑무련의 총군사로 만학수사(萬學秀士)라는 별호로 불리는 지강이었다.

여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지강을 노려보았다.

“명색이 총군사라는 녀석이 무책임하게 말하는군.”

“책임 있게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넌 도대체 하는 게 뭐냐? 총군사라는 녀석이 지략을 짜내야 할 것 아니냐?”

“알잖아. 나보다 련주님이 훨씬 똑똑하시다는 거.”

지강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한다. 그 모습이 언뜻 사랑스럽게 보일 지경이다.

하나 여신우는 내심 진저리를 쳤다.

그 모습이 철저히 가면이라는 것을 알기에.

지강의 낭창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으면 바로 먹잇감이 되고 만다.

지강은 그런 녀석이다.

저 해맑은 표정 이면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녀석.

지금 한 말만 해도 그렇다.

련주님이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흑무련주 류난은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다.

하나 지강도 뛰어나다.

류난이 자신의 계략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그의 곁에서 늘 보조하는 지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류난이 좋은 계략을 짜낼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 지강은 이렇게 말했었다.

“흑무련의 중심은 련주님이 되어야 해. 총군사는 어디까지나 보조에 지나지 않아야 하지. 내가 너무 잘났다는 듯이 설치게 되면 파벌이 생길 수도 있고.”

지강은 그런 녀석이었다.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헤실헤실 웃으며 옥안영오의 머리만 쓰다듬는 것 같아도 아마 지금쯤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을 터.

여신우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 강시를 우리한테서 빼앗은 걸로 만들어서 여론을 반전시켰어.”

“그건 확실히 그러네. 차분히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문제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닥쳐서는 일을 그르치기 쉬울 텐데. 도대체 어떤 놈이 그렇게 똑똑한 짓을 한 걸까?”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 계획이 틀어졌다는 게 중요할 뿐.”

“그러니까 어떤 놈인지가 중요하지.”

“그건…….”

여신우가 반박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던 지강이 어느새 진중한 얼굴로 굳어져 있었기에.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한참 후 마차가 멈췄다.

류난이 하북 분타 정문까지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다들 고생했다.”

“다녀왔습니다아.”

지강이 활짝 웃으며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 모습이 천상 아이 같았다.

조금 전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었다.

“에구. 강시마저 빼앗긴 우리 련주님.”

지강이 너스레를 떨자 류난이 피식 웃었다.

“벌써 소식을 들었나 보군.”

“개방 거지들이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리고 있던걸요.”

“확실히 분열을 노리던 계책은 물 건너가 버린 모양이야.”

“도대체 누굴까요? 그렇게 약삭빠르게 강시를 이용한 놈이? 정파에도 그런 약아빠진 인간이 있었다니.”

“원래 정파에 약아빠진 인간이 더 많다더니?”

“그렇긴 한데…… 흐음.”

“아, 언가장을 칠 때 남궁천을 만났다.”

“남궁천? 그게 누구죠?”

“진천랑의 아들.”

“……!”

순간 여신우와 지강이 흠칫거리고 서로를 보았다.

지강이 턱을 괴더니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묘하네요. 마단곡에서 실패한 것도 그 녀석 때문인데…….”

“무림맹 분열 계책을 실패했을 때도 남궁천이 있었지.”

“묘한 교집합이군요.”

지강이 턱을 긁적이면서 생각에 잠기자 류난이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먼 길 오느라 고생했으니 우선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네. 근데 회유는 어려울까요?”

지강이 조금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류난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만큼은 류난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 류난의 표정에 언뜻 쓴웃음이 스쳤다.

“회유라. 진천랑의 아들을?”

“아…… 많이 닮았던가요?”

“빼다 박았던데?”

“그럼 불가능이군요. 죄송합니다.”

지강의 말끝에 여신우가 슬쩍 나섰다.

“련주. 그럼 일찌감치 손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은 지켜보자고. 적절한 때가 온다면 제거해야겠지.”

여신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두 사람을 지켜본 지강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자자, 우리 무서운 얘기는 그만하고 한잔해요!”

* * *

황산 기슭의 낡은 사당.

“살…… 살려 주십시오. 아는 건…… 다 말씀…… 드렸습…… 니다…….”

얼굴이 피로 잔뜩 얼룩이 지고 옷가지는 아무렇게나 찢어져 만신창이가 된 시종이 전신을 덜덜 떨며 사정했다.

그의 곁에는 역시나 처참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시종이 쓰러져 있었다.

“제, 제발…… 살려주……!”

쉬컥!

시종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대신 시종의 목을 단칼에 그어 버린 흑의인이 옆에 선 다른 흑의인에게 말했다.

“이걸로 남궁가의 구조는 파악이 됐습니다. 마단곡 영단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도 알아냈습니다.”

“수고했다. 자정에 치도록 한다.”

“복명!”

두 흑의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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