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25화 (224/508)

225. 그게 뭔데?

또로로롱.

맑은 찻물 소리가 실내에 울린다.

긴 세월 발효시켜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보이차의 짙은 향기가 실내를 채운다.

활짝 열린 창밖에서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무림맹주 묵천악이 고개를 돌려 옆에 시립한 총관을 보았다.

“앉지.”

자리를 권하자 총관이 잠시 주춤거리다 곧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지금쯤 하북에서는 난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군.”

묵천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총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총관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묵천악이 넌지시 물었다.

“자네, 나와 함께한 세월이 얼마나 됐지?”

“삼십 년이 좀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오래됐군. 자네가 보기에 언가가 이 위기를 넘길 것 같은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총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꾸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게 당연한 대답이겠지.”

맹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총관이 눈치를 살피다 넌지시 물었다.

“맹주님은 어찌 보시는지요?”

“어려울 걸세. 하나…….”

“…….”

“만약 그 난관을 극복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되겠지.”

“또 다른 문제라면 본 맹에 해가 될 문제입니까?”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 테지.”

말을 마친 맹주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총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맹주가 슬며시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살성 진천랑이 죽은 것도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군.”

“그렇군요. 맹주님의 큰 업적입니다.”

“사람 참. 이젠 대놓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군.”

“사실이니까요.”

총관이 빙그레 웃었다.

묵천악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툭 던지듯 물었다.

“자네는 진천랑이 대살성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가?”

총관이 잠깐 흠칫거리다가 곧 생각을 정리한 듯 대꾸했다.

“지금에 와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총관의 대답이 못내 만족스러운지 묵천악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하나 진천랑은 대살성이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일세. 물론 처음에는 어땠는지 모르지. 사람들은 수십 년 전, 그의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진천랑은 진정한 대살성이 되었네. 그가 무림맹 수백 명을 도륙하고 죽던 날을 기억하는가? 그날 진천랑은 말 그대로 사신이었어. 하늘이 내린 대살성이었지.”

“……!”

“인간이란 환경이 만들어내는 조각일세. 지난 수십 년간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진정한 대살성으로 만들었지. 그의 손에 죽은 자가 얼마나 많던가? 천살성을 타고나진 않았을지언정 환경이 그를 진정한 대살성으로 만든 것이야.”

“그렇군요.”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대살성으로 죽었으니, 그의 아들만큼은 영웅이 되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천랑에게 전하는 내 작은 선물일세.”

맹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 * *

촤아악! 촤악!

“크아악!”

“으아악!”

남궁천은 혈귀가 되었다.

혈향에 도취된 남궁천은 무아지경 속에서 벽라검을 휘둘렀다.

살과 뼈가 갈라지는 감각이 검신을 타고 전해질 때마다 전신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났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하하하! 이 불나방들! 좋은 기세다! 덤벼라, 덤벼!”

어느새 남궁천은 지금의 신분마저 잊은 채로 전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쯤 되자 주변에 있던 흑도인들이 사색이 되어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괴, 괴물 같은 놈!”

“저게…… 정말 정파의 후기지수라고?”

그렇게 보기엔 너무나 패도적이고 잔인하지 않은가?

어딘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 입매를 길게 찢은 채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 맹수처럼 먹잇감을 향해 지체 없이 달려드는 동작들.

눈만 마주쳐도 오줌이 찔끔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이익!

한 줄기 바람이 흑도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치더니 남궁천을 향해 그대로 날아갔다.

쩌어어어엉!

검과 판관필(判官筆)이 서로 부딪치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이 일어났다.

츠즈즈즈즈즛!

남궁천이 뒤로 서너 장이나 미끄러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검격을 펼치려다가 움찔 떨고는 멈췄다.

‘류난……?’

반백의 중년 사내.

한 손에는 강철로 만든 붓 모양의 판관필을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 가죽으로 엮어서 이은 채찍이 감겨 있다.

어딘지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보니 긴장이 절로 풀어지면서 차츰 이성이 돌아온다.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풀풀 휘날리는 류난이 남궁천을 보며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진천랑의 아들인가?”

“그런데요?”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벽라검을 어깨에 척 걸쳤다.

그 행동이 전생의 진천랑과 꼭 닮았기에 류난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부전자전이라더니. 피로 이어진 관계라는 건 참으로 신기하군.”

“아버지를 아시는 분?”

“알지. 네 아버지는 내 친구였다.”

뭐, 술 한잔 기울이면서 서로 웃고 떠들었던 사이였으니까 친구라면 친구겠지.

“그래서요?”

“하하! 아비를 닮아서 맹랑하구나.”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남궁천이 단도직입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류난과 길게 대화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무림맹 총군사가 와도 류난과 말싸움하면 이기기 힘들 것이다.

류난이 그런 남궁천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말했다시피 네 아버지는 나와 친구였다. 한데 너는 어찌 무림맹에 속해서 네 아버지와 반대되는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인가?”

“내 맘이니까.”

“뭐라?”

“내 인생이잖아요. 아버지야 어쩔 수 없이 힘든 길을 갔지만, 내가 왜 굳이 아버지처럼 힘든 길을 가야 합니까? 상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

“아버지도 아마 내가 아버지 그늘에 가려져 있지 않고 제 인생을 살길 바랐을 겁니다. 이제 답이 됐나요?”

“하면 너의 길이 무엇이냐?”

“그야 당연히 잘사는 거죠.”

“네 아버지를 죽인 무림맹과?”

류난이 도발적으로 말하자 남궁천이 피식 웃더니 저벅저벅 걸어갔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류난 앞으로 걸어가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긴장할 판이었다.

코앞까지 다다른 남궁천이 류난을 빤히 보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나의 삶이 있는 겁니다. 무림맹과 어찌 지낼지는 내 마음이고. 삶의 방식도 저마다 다른 법이고. 그러니 내게 이래라 저래라 설교하지 마시죠.”

남궁천의 당돌한 말에 류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정말이지 제 아비와 똑같은 성정이군.’

류난은 아주 잠시 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마치 눈앞에 있는 자가 남궁천이 아니라 진천랑처럼 느껴졌으니까.

물론 상황은 정반대다.

당시 진천랑은 무림맹에 쫓기는 입장이었고, 지금 남궁천은 무림맹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사람이 어째서인지 진천랑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라.”

“알아들었으면 그만 꺼지시죠. 괜히 아버지를 위한 척하면서 날 꼬셔볼 생각은 접어두시고.”

“하하하. 네 아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

“본 련의 거사는 모든 강호인을 위해서다. 이 강호의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류난의 눈동자가 열기로 불타오른다.

남궁천이 그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저와 맞지 않네요.”

“하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말했잖아요?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싸운다고!”

찰나 남궁천이 벽라검을 횡으로 휘둘러 갔다.

벽력처럼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류난은 여유 있게 판관필을 거꾸로 세우며 막았다.

까아아아아앙!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오자 류난이 재빨리 공력을 운기해 판관필에 달린 채찍을 뿌렸다.

취리리리릭!

채찍이 뱀처럼 날아가며 남궁천의 전신을 휘 어감았다.

생포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진작 그 수법을 알고 있었다는 듯 몸을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하면서 채찍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휘리리리리릭!

그 일련의 과정이 워낙 매끄럽다 보니 류난도 놀란 눈치였다.

‘내 수법을 알고 있다는 듯이 피하는구나!’

물론 이는 남궁천이 과거에 류난과 함께 장난처럼 비무를 즐긴 적이 있었기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생포할 때 류난이 자주 쓰는 방식이었으니까.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류난으로서는 남궁천의 임기응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채찍을 거둔 류난이 빙그레 웃으며 칭찬했다.

“강호신룡이라더니 과연 허명성세는 아니었구나.”

“뭘 이 정도로.”

“너는 네 아비보다도 훨씬 뛰어나다.”

어디서 비교질이야?

내가 나다, 이 새끼야.

남궁천이 말없이 웃고만 있자, 류난이 입매를 말아 올렸다.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언가는 이제 무너질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남궁천이 여유 있게 반문하자 류난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묻는다.

“네 생각은 다른가?”

“다르죠. 아저씨라면 아실 만할 텐데.”

“무엇을?”

“언가가 이렇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는 걸.”

“…….”

“궁즉통(窮則通)이라잖아요? 언가가 궁지에 몰리면 가만히 망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언가 뒤에 버틴 저 암벽이 그냥 보기 좋은 병풍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류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놀란 기색을 지우고는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언가가 말해주더냐?”

“아뇨. 제가 의외로 책벌레라서 어느 정도 추리력이 있다고나 할까요?”

“하하! 보면 볼수록 탐나는군. 아까워. 정말 아까워.”

“아까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내 길을 갈 겁니다.”

“하나 언가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할 겁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제가 붉은 주머니를 남겨두었으니까요.”

“붉은 주머니?”

“그런 게 있어요.”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저만치 언가를 보았다. 언가에서는 고성과 비명 소리가 더욱 높게 치솟고 있었다.

몇 군데에서는 불길도 일어나고 있었다.

정문은 이미 뚫려서 아수라장이었다.

정말이지 이대로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두었다.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었는데. 흐흐흐.’

남궁천이 내심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 도망자가 되어 쫓길 때마다 추격자들은 상황에 따라 붉은 주머니나 푸른 주머니를 풀어보곤 했다.

한번은 그 주머니에 뭐가 들었는지 하도 궁금해서 놈들을 다 죽인 후에 직접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각 상황에 맞는 총군사의 계책이 들어 있었다.

남궁천은 그걸 흉내 낸 것이었다.

“내가 그걸 언호량에게 주었으니 곧 대책을…… 아니지, 언호량이 아니라 팽수혁에게 줬지. 둘 다 덩치가 크고 무식하게 생겨먹어서 헷갈리는데, 아무튼 곧 언 가주를 찾아가서 물어볼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뭐.”

알 수 없는 말에 류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 시각, 다행히 팽적호와 팽수혁은 남궁천의 예상대로 언가주를 찾아가고 있었다.

“언가주라면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모른다! 가자!”

“예, 아버지. 남궁천 그 녀석이 언호량에게 건네준다는 걸 착각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긴 너희 둘 모두 덩치가 크고 용맹하니까.”

비슷하면서도 다른 판단을 내린 팽적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