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그게 뭔데?
뚝…… 뚝……!
시커먼 낭아봉에서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철나한은 눈을 내리깔고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끄으으……!”
“으윽……!”
견습생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희미한 신음을 흘린다.
내상을 입은 윤종승은 입가에서 피를 철철 흘렸고,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러진 유현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언가권을 연신 내질러대던 언호량은 두 주먹이 불어 터져서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진소홍은 의식을 잃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전각 정문을 등진 채 쓰러진 팽수혁은 퉁퉁 부은 얼굴에 상체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터져서 가장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견습생들 모두가 처절하게 싸웠다.
그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무연회 때보다도 훨씬 강해진 그들이었다.
하나 철나한이라는 고수 앞에서는 아직 한참 부족한 실력이었다.
철나한이 혀로 두툼한 입술을 핥으면서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확실히 싹은 보였다. 하나 나를 적으로 만난 것이 불운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를 흘려낸 철나한이 고개를 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혈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든다.
언제 맡아도 적의 피 냄새는 머리를 상쾌하게 만든다.
저벅저벅……!
철나한이 걸음을 옮기다가 바닥에 쓰러진 팽수혁의 머리채를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평소 거인처럼 크게 느껴지던 팽수혁의 덩치가 철나한 손에 들리니 마치 어린아이 같다.
“팽 소협……!”
“안 돼……!”
유현과 윤종승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철나한의 시선이 그들에게 잠깐 향했다.
“너희들도 곧 이 녀석 곁으로 보내 주마. 보채지 마라.”
무심히 말을 뱉은 철나한이 팽수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팽수혁이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뜨고는 침을 뱉었다.
“퉤! 뭐…… 해? 죽여, 이 병신아.”
“크하하하! 그 패기만큼은 마음에 드는구나! 과연 하북팽가답다! 기대해라, 네놈은 가장 잔인하게 죽여줄 테니!”
“혓바닥이…… 기네…… 병신…….”
팽수혁이 끝까지 눈을 부릅뜨려고 애쓰며 욕설을 뱉어냈다.
“네놈 혓바닥은 아주 더럽구나. 저승에 가서 예의범절부터 배우거라.”
철나한이 다른 한 손으로 낭아봉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그가 낭아봉을 힘껏 후려쳤다.
퍼억!
“커억!”
머리채가 잡힌 팽수혁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물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겨우…… 그 정도냐……?”
팽수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크흐흐! 좋아, 좋아. 그렇게 버텨야지. 그래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지.”
철나한이 다시 낭아봉을 들어 올렸다.
“수혁아!”
윤종승이 버럭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진탕이 되어 버린 내장에서 피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쿠웨엑!”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버리니 철나한이 힐끔거리며 조소를 지었다.
“잠자코 기다리라니까. 네놈들도 곧 보내 버릴 테니까.”
“크윽……!”
윤종승이 울분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친구가 죽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곧 들이닥칠 죽음을 가만히 기다려야만 한다니!
‘만약 남궁천이 여기 있었으면……!’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남궁천이었다.
남궁천도 같은 생도일 뿐인데.
아버지도, 비량도, 맹주도 아닌 남궁천이 떠오른다.
왠지 남궁천이 있으면 저 거구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죽을 때가 되니 말도 안 되는…….’
윤종승은 자신의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다고 여겼다.
어쨌거나 팽수혁은 이제 곧 죽으리라.
벌써 전신이 피범벅이었다.
저 시커먼 몽둥이에 촘촘히 박힌 가시들이 팽수혁의 몸을 마구잡이로 난자하고 있었다.
퍽! 퍽! 퍼억!
쿠당탕탕!
연이어 낭아봉에 얻어맞은 팽수혁이 바닥을 구르며 문 앞에 쓰러졌다. 그 지독하게 이를 갈던 팽수혁도 더 이상은 무리였는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하긴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수혁아……!”
“제길……!”
팽수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철나한을 보면서 견습생들이 저마다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이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던가?
마침내 팽수혁 앞에 다다른 철나한이 낭아봉을 들어 올리곤 말했다.
“별로 재미도 없군. 그만 가거라.”
찰나지간 낭아봉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쉬이이이익!
“아아악!”
“안 돼!”
견습생들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렇게 낭아봉이 팽수혁의 머리를 으깨기 직전,
꽈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각 문이 통째로 뜯겨 날아가면서 철나한을 덮쳤다.
콰자장!
철나한이 재빨리 낭아봉을 휘둘러 날아드는 문짝을 박살 냈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는 전각 안쪽을 보았다.
마침 전각 안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누가 내 아들을 건드리나?”
그는 바로 팽적호였다.
쓰러져 있던 생도들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팽 가주님이……!’
진작 팽적호를 부르고 싶었다. 실제로 몇 번 소리쳐 부르기도 했다.
하나 그때마다 팽수혁이 말렸다. 아버지가 집중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찌나 고집스러운지 더 이상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하긴.
팽수혁이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아버지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할 테니.
정말이지 그 대단히 팽가다운 고집에 다른 이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팽적호가 나타난 것이다.
흠칫거린 철나한이 천천히 입매를 비틀었다.
“이게 누구신가? 장원도 버리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던 팽 가주 아니신가?”
“거구에 낭아봉을 보니 자네는 철나한이군.”
“나를 알아보는 걸 보니 눈알이 썩진 않았군.”
“내 아들을 건드린 것이 네놈이렷다?”
“그렇다면?”
팽적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어야지.”
툭 던져진 말.
말의 무게가 이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순간 철나한은 팽적호가 뱉은 말에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단지 공력을 실은 목소리라서가 아니다. 그 목소리에 절절한 진심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나한이 미간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꼴에 아비라고 건방을 떠는구나!”
일갈을 터뜨린 그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철나한이 그대로 낭아봉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쒸이이이잇!
그때까지만 해도 팽적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나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멍청하긴. 완전히 얼어붙었군!’
하나 바로 그 직후에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꽈다아앙!
팽적호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더니 낭아봉이 그대로 바닥을 때리는 게 아닌가?
“이게 어찌!”
철나한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튕기듯 물러났다.
파밧!
팽적호는 딱 한 보 정도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매우 느린 속도로 대도를 들어 올렸다.
단전에서 올라온 오색의 기운이 서로 뒤엉키며 전신 혈맥을 향해 뻗어갔다.
‘확실히 다르다!’
내공의 흐름이 이전과 판이하게 다르다. 도신을 타고 뻗어 나가는 기공이 예사롭지 않다.
만약 이 일격이 통한다면…….
‘남궁천, 내 너에게 밥 한 끼 거하게 사마. 아니, 밥 한 끼로도 부족할 터! 평생 은인으로 삼으마!’
생각을 마친 팽적호가 마침내 바닥을 차며 날아갔다.
그야말로 빛살처럼 빠른 속도였지만, 매 순간에 신중을 기한 팽적호는 스스로 그렇게 빠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쒸아아아앙!
반면 철나한으로서는 어둠 속에서 벽력 한 줄기가 날아드는 것만 같았다.
“어딜!”
그가 기합성을 터뜨리며 낭아봉을 가로로 눕혀 막았다.
따아아아아앙!
마침내 도와 낭아봉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한데 다음 순간 지켜보던 견습생들이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딱 벌렸다.
분명 대도가 낭아봉과 부딪쳤는데 도신이 바닥을 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반면 철나한은 낭아봉을 가로로 든 채로 서너 장이나 미끄러졌다.
“…….”
“…….”
안마당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팽적호가 바닥을 때린 도신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철나한이 희미한 목소리를 흘렸다.
“니미럴…… 어째서……!”
다음 순간 눕혀진 낭아봉에 세로로 금이 새겨지더니 쩍 갈라지는 게 아닌가?
곧이어 철나한의 철갑도 세로로 갈라지면서 쪼개졌다.
철커덩!
피츗, 츄아아아아아!
이내 상반신마저 세로로 선혈이 생기더니 철나한이 피를 뿌리며 무릎을 꿇었다.
쿠웅!
놀랍게도 혼원벽력도의 일도단천이 철나한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 것이다.
단 일초!
“이, 이겼어!”
“우아아아아앗!”
견습생들이 눈물겨운 환호성을 터뜨렸다.
반면 한순간에 상당한 공력을 소모한 팽적호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몸을 돌려 팽수혁을 보았다.
다행히 팽수혁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인지 아버지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믿었습니다, 아버지.”
“괜찮으냐?”
얼른 팽수혁을 부축한 팽적호가 야단을 쳤다.
“이 정도로 다쳤으면 진작 나를 불렀어야지!”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결국 해내셨잖아요.”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다 아버지 닮아서 그렇죠.”
“허어!”
팽적호가 한숨을 쉬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이토록 무리한 것은 분명 따끔하게 타일러야 할 일이었다.
‘나중에 알아듣게끔 말하면 되겠지. 그보다 큰일이군.’
팽적호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이곳은 철나한에게 맡겨 버린 것인지 흑도인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욱 많은 흑도인들이 언가장으로 쳐들어온 듯했다. 그가 얼른 몸을 날려 지객당 지붕 위로 올라섰다.
과연 언가장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악착같이 버티는 중이었다.
그가 바닥으로 내려와 견습생들의 응급처치를 하고선 말했다.
“큰일이다. 이대로면 버티기가 어려울 것 같다. 수적 열세다. 놈들의 머릿수가 너무 많구나!”
“이것들이 아주 작정했군요!”
“팽가에 이어 언가까지 무너뜨리면 하북을 평정한 셈이 될 테니까.”
“제길……! 아 참!”
팽수혁이 고개를 번쩍 들자, 팽적호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남궁천이 저한테 맡긴 게 있습니다!”
“남궁천이? 그게 뭐냐?”
일단 남궁천이라면 믿고 듣는 팽적호였다.
남궁천 덕분에 혼원벽력도가 상당한 경지에 오르지 않았는가?
이내 팽수혁이 품에서 두 개의 주머니를 꺼냈다.
하나는 붉은색이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이었다.
“그놈이 저에게 이걸 주면서 말했습니다. 언가장이 위급할 때는 붉은 주머니를! 아버지가 오의를 깨우치지 못했을 때는 푸른 주머니를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오! 그럼 어서 붉은 주머니를 풀어보아라!”
“예, 아버지!”
팽수혁이 서둘러 붉은 주머니를 풀어보자 작게 말린 종이가 나왔다.
종이를 펼쳐 보니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용하시죠, 그거. 저는 찬성입니다. 살고 볼 일 아니겠습니까?
팽적호가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과연 남궁천은 다 계획이 있구나!”
“그렇군요! 그럼 사용하시죠!”
“그런데 그게 뭐냐?”
“예? 그건 아버지가 아시는 것 아닙니까?”
“응? 난 모르는데?”
“예에? 그럼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내가 묻잖아. 그게 뭐냐고.”
“아니, 저도 모르죠.”
“아니, 그럼 그게 뭐야? 도대체 남궁천은 뭘 말하려는 거냐고!”
지객당에 팽적호의 애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