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태풍에 맞설 용기
“기분이…… 좋아서?”
남궁화가 멍하니 대꾸하자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손우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먼저 말씀을 드려야겠네. 가져와.”
“알겠습니다.”
손우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는 나가자 남궁검과 남궁효, 남궁화가 영문을 모를 표정으로 서로 번갈아 보았다.
남궁화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 좌불안석이었다. 기분이 좋을 일이라고는 했지만…….
‘원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있어야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누던 그녀는 문득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가 남궁천이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늘 기죽은 채로 아무 말도 못하던 아이가 이제는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집안의 어른들이 남궁천만 주시하고 있다.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마침 기척과 함께 손우곤이 들어서면서 남궁화의 상념도 끊어졌다.
다시 돌아온 손우곤의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부대주 차무진도 뒤이어 들어왔다.
쿵! 쿠웅!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두 사람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열어.”
남궁천의 명에 손우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가와 상자의 덮개에 손을 가져갔다.
별것 아닌 일에도 왜 이리 긴장이 되는 것인지. 저 상자 안에서 수급이 나올 리도 없을 텐데.
남궁화는 괜히 손을 꼭 말아 쥐었고, 남궁효도 목이 타는 것인지 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손우곤이 상자 덮개를 여는 순간, 청아한 향이 실내에 가득 풍겼다. 그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상자에 빼곡하게 담긴 목함들.
그중 하나를 꺼낸 손우곤이 다시 덮개를 열자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아아…….”
남궁화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남궁검 역시 향기만 맡고도 이것이 보통 영단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궁검이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무엇이냐?”
“상청단입니다.”
“상청단……!”
남궁화가 깜짝 놀라서 그 말을 따라했다.
상청단이면 소림의 소환단 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내공을 축적할 수 있는 귀한 영단이 아닌가?
물을 마시던 남궁효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저 상자에 든 건 모두 상청단입니다. 그 외에도 소환단과 대환단도 있습니다. 물론 자소단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저만한 상자가 수십 개죠.”
“푸우우웁!”
급기야 남궁효가 입에 머금은 물을 뿜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얼른 입가를 소매로 닦아내고는 남궁검에게 사죄한다.
“죄, 죄송합니다, 가주님. 콜록, 콜록! 맙소사! 상청단이 수십…… 아니, 수백 개인가? 그럼? 그 많은 영단이 어디서…….”
“마단곡을 털어왔습니다.”
“마, 마, 마, 마…… 마단고옥!”
남궁효는 이제 눈을 뒤집고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마단곡이 어딘가?
마교가 온갖 영단을 긁어모아서 보관한 곳이다. 심지어 마단곡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정도 무림에서 이 마단곡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다.
마교가 제조한 영단보다는 대체로 정도 무림에서 제조한 영단이 많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마단곡을…… 지금 눈앞의 소가주가 다녀왔다고?
그것도…… 털어왔다고?
남궁효는 너무 놀라서 끊어질 것만 같은 의식을 애써 붙들며 다급히 물었다.
“도대체 마단곡이 어디에 있었기에? 아니, 너는 마단곡을 어찌 알고?”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죄수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마단곡의 존재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면 맹에서 견습생들을 마단곡으로 파견한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우연히 방향이 겹쳐서 제가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허어, 아무래도 소가주가 천운을 타고 태어난 모양입니다.”
남궁효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남궁검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어려움은 없었느냐?”
아무리 위치를 알았다고 한들 마단곡을 산책하듯이 다녀올 수는 없었을 터다.
온갖 기관진식이 불청객을 맞이할 게 뻔하지 않은가?
한데 남궁천의 입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예, 다행히 가마우지가 있어서 사냥하기 좋았습니다.”
“가마우지?”
“아, 비유적 표현입니다. 약간의 문제라면 흑도 세력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또한 마교의 잔당으로 보이는 이도.”
남궁효가 다시 한번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흑도 세력이! 거기에 마교 잔당까지! 그래서? 어찌 된 것이냐? 자네가 여기 있다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단 거겠지?”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예, 다행히 잘 해결됐습니다.”
“하면 그놈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아…… 다행이군.”
그제야 남궁효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만…….”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살아남았는데, 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남궁검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이미 본 가에 전해진 물건까지 노릴 배짱은 없을 터.”
남궁세가가 아무리 기울어 버린 가문이라지만, 흑도의 공격을 받는다면 정도 무림이 분개할 것은 뻔하다.
무림맹과 남궁세가가 썩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여론이 나빠지면 맹주는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움직여 흑도인들을 응징하게 될 것이고.
어쨌거나 임자를 찾지 못한 보물이라는 건 누구든 그 주인이 될 수 있기에 표적이 되는 법이다.
하나 지금은 이미 남궁세가가 주인이 되었으니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그래도 조심은 해야겠지만.’
남궁검이 묵직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져온 게 모두 몇 상자나 되느냐?”
“서른 상자가 조금 넘습니다.”
“그중에서 쓸 수 있는 영단은?”
다시 말해 마교가 제조한 영단이 아니라, 정도 무림에서 제조한 영단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거다.
남궁천도 그 뜻을 알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두 상자를 빼면 다 사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겨우 두 상자만?”
“예, 태음마령단(太陰魔靈丹)과 음혈마정(陰血魔精), 혈음마신환(血陰魔神丸)이었습니다.”
남궁효와 남궁화의 눈동자가 커졌다.
남궁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는다.
“네가 그걸 다 알아?”
“예, 대략 유추할 수 있겠던데요?”
알다마다.
정사마의 온갖 영단과 영약은 전생에 한 번씩 다 구경해 봤으니까.
거친 인생을 살면 그런 점이 좋달까?
온실 속의 화초가 평생 볼 수 없을 온갖 진귀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다만 그만큼 죽을 위기도 많아지지만.
물론 여기서 전생 이야기는 할 수 없으므로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책에 나온 것과 비슷하더라고요.”
“아…… 책에…….”
“예, 대충 영단의 밀도와 향, 색깔 등등 이런 걸 봤을 때요.”
남궁효가 헛웃음을 짓고는 중얼거렸다.
“허어. 아무리 그래도 그걸 구분할 수 있다니.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없던 능력이라도 생긴다는 게 사실인가?”
“어쨌거나 나머지는 당장에라도 복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단곡임에도 마교에서 제조한 영단이 별로 없는 건 단순한 이유다. 마교가 패망할 때쯤 그들은 마교도들에게 웬만한 영단을 모두 먹여서 최후의 발악을 해댔으니까.
오히려 정도 무림의 영단은 상성이 맞지 않거나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보관만 해둔 경우가 많았던 것이고.
“흐음.”
남궁검이 침음을 흘렸다.
“정말 그 두 상자만 빼고 다 쓸 수 있는 영단이라면 큰일을 해낸 거군.”
모처럼 그의 입에서 칭찬 아닌 칭찬이 떨어졌다.
남궁천이 내심 웃었다.
‘사실이라니까. 영감, 속고만 사셨나?’
남궁화가 상자를 가만히 보면서 물었다.
“그럼 태음마령단과 음혈마정, 혈음마신환 같은 것들은 어떻게 하죠?”
“태워 버려야지.”
남궁검이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역시.’
남궁천이 나름 흡족한 표정으로 남궁검을 보았다.
혹여나 마교의 영단까지 욕심을 낼까 봐 노파심이 들었는데, 괜한 기우였다.
대체로 마교가 제조하는 영단은 극음의 기운을 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새외세력인 북해빙궁이 아니고서야 극음의 기운을 가진 영단을 제조하기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마교에서는 주로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죽여 음기를 보강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마공을 익힌 자들도 잘못 섭취하면 주화입마에 빠져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광인이 될 위험이 있다. 하물며 정도를 익힌 자들은 오죽할까?
‘내 공력은 완전한 잡탕인데도 반쯤은 죽다 살아났었지.’
정말이지 그렇게 지독한 음기는 처음이었다. 온몸이 얼어붙고 오한이 들면서 시체처럼 혈맥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듯했으니까.
마교 놈들과도 인연이 있어서 그놈들 마공으로 가까스로 소화해 냈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다.
그 찝찝하고 텁텁하고…….
’아무튼 토할 것 같은 기분.
정순하지 못한 기운을 섭취하게 되면 그렇게 고생하는 법이다.
때문에 남궁천은 남궁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괜한 과욕이 화를 부르는 법.
“우선은 안전하게 본 가로 이송해야 할 테니 당분간 창응대를 이용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사실 창응대만으로도 부족하리라.
무한에 머물고 있다는 남궁표도 도와야 할 것이고, 남궁설희도 불러서 옮기는 데 일조해야 하리라.
꿀꺽.
남궁효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가늘게 떠는 음성을 흘렸다.
“허어, 마단곡이라니…… 도대체가 너는…… 허허허. 가주님, 아무리 생각해도 소가주를 제대로 뽑으신 듯합니다.”
남궁효가 입이 귀에 걸려 말하자, 남궁검이 침음만 흘리고는 수저를 들었다.
“우선 먹지.”
“예? 아, 예! 먹어야지요. 우리 소가주, 어서 드시게. 여기 고기도 좀 먹고! 밥은 부족하지 않은가? 내 걸 좀 덜어줄까? 아니, 어쩌다가 거길…… 흐흐흐. 거길 들어갈 생각을 하셨는가? 여기 차도 마시면서 천천히 드시게!”
남궁효가 예뻐 죽겠다는 듯 남궁천을 바라보며 방실방실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째 볼 때마다 선물 보따리를 이렇게 툭툭 던져주니 예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무려 마단곡을 털어왔다.
저 상자들 속에 든 영단이라면 남궁세가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괜히 눈시울까지 젖어드는 남궁효였다.
남궁검이 식사를 하는 중에 무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정각주는 표와 설희에게 연락해두게. 그리고 쓸모없는 것들을 가려내서 어찌 처분할지 논의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가주님!”
남궁효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너는 나와 함께 조만간 있을 칠대세가회에 참여할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썩 유쾌한 자리가 아닐 수 있다. 본 가는 현재 칠대세가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직은 배척하는 시선이 팽배할 것이다. 그럼에도 본 가를 초청한 것은 네가 무연회 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도록 해라.”
“그러지요.”
남궁천이 차분히 대답했다.
하나 남궁검은 남궁천이 과연 그 자리에 걸맞은 태도를 취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손자는 확실히 변했다.
만약 칠대세가회에서 은근히 신경전이라도 벌어진다면 과연 남궁천이 가만히 있을까?
태풍에 맞설 용기라.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예전 같았으면 그걸 객기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그 객기가 불러올 결말이 궁금해진다.
언뜻 기대도 된다.
저 아이를 데리고 칠대세가회에 참석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매번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으니 이젠 감도 오지 않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궁검은 모르고 있었다.
남궁천이 칠대세가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남궁검이 고기 한 점을 집어다가 무심히 남궁천의 밥그릇에 올려두었다.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