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비겁해질 용기
“저…… 정말 대가리 박아야겠군요.”
“으음?”
남궁검이 차를 마시다 말고는 고개를 들었다.
비량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 사람하고 약속을 했거든요.”
“…….”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량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늘 보던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이런 걸 두고 개안(開眼)이라고 하는 걸까?
천하대살성 진천랑.
그도 어쩌면 저기 오가는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 어쩌면 더 훌륭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고.
하나 어려서부터 무림공적으로 내몰렸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만약 자신이라면 어떠한 삶을 살게 됐을까?
나름의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다.
비량이 무너지는 마음을 목소리에 담아 흘려냈다.
“진천랑은 천하대살성이어야 합니다. 그는 천살성을 타고났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제 인생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를 미치광이 살인마라며 혐오하고 추살하려 했던 저는 어떤 인간이 되는 겁니까?”
“…….”
“제가 답을 구할 수 있을까요? 지난 삶이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침묵이 흐른다.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미동도 없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남궁검이었다.
“자네의 인생을 위해서 누군가 천살성이 되어야 한다면, 그 인생도 너무 비극이 아닌가?”
“……!”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나 또한 그가 천살성이라 믿은 시절이 있었네. 잊어버리게.”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비량의 질문에 남궁검이 예의 그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엇을 말인가?”
“진천랑 때문에 따님을 잃으시지 않았습니까?”
“딸은 병사했네.”
“하나 오래전 가주님이 진천랑을 죽였더라면 따님이 배신자로 낙인찍히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남궁세가가 오늘처럼 망가질…….”
“그래서 미래를 예견해서 내가 그 아이를 죽였어야 했을까?”
“그건…….”
“지나간 일일세.”
비량이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하면?”
“세상에 알려야지요. 진천랑은 원래 대살성이 아니다! 그저 재능이 충만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사냥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남궁선은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면?”
“예?”
“알리면 변하긴 하는가?”
“그야…….”
변할까?
쉽게 대답이 나가지 않는다.
비량이 멈칫거리고는 한참이나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변할까?
그렇게 소리치면 세상이 알아줄까?
남궁검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내려두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그때마다 발끈발끈 분노해 봐야 해결되는 건 없다. 세상의 흐름은 공기의 흐름과 같지. 제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태풍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가만히 계십니까?”
“우선은 숨을 죽이고 바람이 멎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비량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는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비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량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남궁검의 칼날 같은 음성이 날아든다.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자네는 아는가?”
“……감히 짐작만 할…….”
“아니. 그건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지.”
“…….”
“나는 딸을 잃었고 딸이 낳은 아이는 방황하고 있네. 내게 비겁하다고 하였는가? 남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비겁해질 용기도 필요한 법이지.”
비겁해질 용기라.
비량의 시선이 창밖으로 다시 향했다.
남궁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럼 이제 자네는 뭘 할 건가?”
“…….”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할 텐가? 잃어버린 자네 삶의 의미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비량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 * *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라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실감 난다.
남궁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무한의 거리는 여전히 번잡했다.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아이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좌판에 깔린 노리개를 구경하는 아낙들, 목청껏 호객하는 장사치들, 옆구리에 칼을 차고 거니는 무인들.
세상은 변한 게 없는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참 많이도 변했다.
하긴 지난 이십 년간 남궁세가는 그 어떤 곳보다도 모진 풍파를 견디지 않았던가?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세월을 겪으면서 이제 어느 정도 환경의 변화는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달그락.
남궁검이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바로 이 다루, 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비량이다.
그리고 작년에 비량을 다시 만난 것도 이 자리에서였다.
남궁천이 무연회 본선에 진출했을 때였다.
당시 비량이 단호한 표정으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했던 자의 아들을 어떻게든 지켜줄 생각입니다.”
“그게 자네가 찾은 삶의 의미인가?”
“그렇게 거창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실수를 만회할 길이 아닐까 합니다. 답은 나중에 구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 아이는 비겁해질 용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태풍에 맞서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자칫 자네까지 그 태풍에 휘말릴지도 모르네.”
“그게 대수겠습니까? 이미 저는 그 태풍이었던 적이 있는데요.”
그렇게 실없는 미소를 짓던 비량이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남궁검이 다시 손을 뻗어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는 이미 식을 대로 식어 있었다.
‘비겁해질 용기라…….’
과연 그게 답이었을까?
자신이 비겁해질 용기를 선택하고 침묵하는 사이, 남궁천은 비량의 말대로 태풍에 맞서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태풍과 싸우고 귀환하는 길일 터.
발보다 빠른 게 말이라, 벌써 광서성의 무용담에 대해 무한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비겁해질 용기라…….”
문득 쓴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그 답이 틀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든다.
‘선아, 이 아비가 틀린 것이더냐?’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때마침 남궁검 앞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주님!”
그제야 남궁검이 시선을 돌려 눈앞의 사내를 보았다.
깍듯하게 예를 갖춘 사람은 다름 아닌 창응대주 손우곤이었다.
남궁검이 맞은 자리를 가리켰다.
“앉게나.”
“예,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닐세. 좀 일찍 나와서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지.”
손우곤이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어딘지 달라졌다.
늘 얼어붙은 칼날 같던 남궁검이다.
한데 이 순간은 왠지 칼날에 얼어붙은 이슬이 녹아내린 것 같달까?
여전히 날카롭고 예리한 인상을 지녔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다소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 남궁검의 눈매가 사뭇 날카로워지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째서 자네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가?”
그 말인 즉슨, 창응대 본연의 임무인 소가주 호위를 저버리고 왜 따로 떨어져 있냐는 추궁이다.
손우곤이 바짝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소가주님의 명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위에 어겨서는 안 될 가규가 있을 텐데.”
“특별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특별한 사정이라면?”
“이제 곧 소가주님이 무한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때 모든 걸 직접 가주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손우곤의 눈자위가 주변을 빠르게 훑는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의식한 것이다.
남궁검이 그 속내를 눈치채고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네.”
“물론입니다.”
손우곤이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납득뿐이겠습니까?’
자신이 가주라면 소가주를 등에 업고 춤이라도 추리라.
저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이 배어 나온 것인지, 남궁검이 눈살을 가늘게 여민다.
얼른 긴장을 다지고 표정을 굳히자 남궁검이 찻잔을 내려두고 말했다.
“내가 무한에 온 것은 곧 있을 칠대세가회 때문이다.”
“칠대세가회라면 본 가는…….”
손우곤이 말끝을 흐렸다.
남궁세가가 칠대세가에서 빠진 지는 이십 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에는 칠대세가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빠졌고, 이후에는 진짜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제외됐다.
한데 칠대세가회 때문에 무한에 왔다니?
남궁검도 손우곤의 말뜻을 대략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 가가 칠대세가에서 빠진 지는 한참 됐지. 다만 이번에 천이가 강호신룡으로 떠오르면서 본 가를 초청했다.”
“그렇군요.”
손우곤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과연 그들이 진심으로 남궁세가를 환영해 줄 것인가?
혹 불러놓고 이런저런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진 않을까?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데, 남궁검이 예의 그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각 세가의 소가주도 참석하는 자리다.”
“아…….”
손우곤이 움찔거리고는 짤막하게 침음을 흘렸다.
이제 그의 불안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소가주님이…… 참석해야 하는군요.”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인다.
왠지 모르게 시름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소가주가 참석하는 자리구나…… 그렇구나…….’
손우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소가주님이…….”
“혹여나 사고 치지 않도록 주의하게.”
역시. 이제는 가주님도 알고 계시는구나.
손우곤이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게 정말 어렵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칠대세가라면 다들 그 기세가 쟁쟁할 것이다. 게다가 소가주까지 자리를 하게 된다면 남궁천이 과연 얌전히 있을까?
혹여나 이런저런 귀에 거슬리는 말이 튀어나오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진 않을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혹시 그날 맹주님도 참석하시는지요?”
제발 그건 아니길 바랐지만, 남궁검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걸세. 모임은 황학루에서 이뤄질 걸세. 최근 흑도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모양일세.”
아, 그것과 관련해서인가?
손우곤은 문득 마단곡에서 만났던 흑도인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들은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지닌 자들 같았으니까.
최근 흑도인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동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달까?
남궁검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해서 천이는 언제 도착하는가?”
“오늘 저녁쯤에는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알았네. 그럼 있다가 보세.”
“예, 가주님. 그럼.”
손우곤이 깍듯하게 예를 차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시각, 남궁천은 견습 생도들과 함께 무한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아, 벌써부터 공기가 다르구나!”
남궁천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흐뭇하게 웃었다.
‘귀여운 내 영단들, 이제 곧 다시 보겠구나.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