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내가 언제?
한 번쯤은 마주치거나 보일 만도 하건만.
‘도무지 안 보인단 말이지…….’
연무 때문에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도 잘 되지 않는다.
설마 벌써 당한 건 아니겠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천이 아닌가?
일 년 정도 전만 해도 이런 생각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이젠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윤종승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서 혁련장을 맞고 나가떨어진 이봉대주를 보았다.
꿈틀…… 꿈틀……!
의식을 잃은 이봉대주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대자로 뻗어 있었다. 이따금씩 근육의 경련 때문인지 꿈틀거리기만 할 뿐.
탄탄해 보이는 배에는 붉은 연꽃무늬가 예쁘게 새겨져 있다.
‘역시……!’
윤종승이 다시 한번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연꽃 모양이 점점 더 진해지면서 완벽해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전체적으로 무공 실력도 상승하는 듯하다.
‘그 녀석 말이 맞았어. 혁련장만 완성해도 강호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 모든 이치가 하나로 통한다는 그 말이 사실이었군!’
그런데 다음 순간 가슴을 끓게 만들던 희열이 갑자기 차갑게 식더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슈우우우욱!
섬뜩한 감각에 휙 돌아선 윤종승은 자신의 이마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또렷하게 보았다.
“아아……!”
막을 수 없다.
칼날이 떨어지는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순간 주마등이 스친다.
어려서 남궁천과 함께 즐겁게 놀던 시절, 다른 이들이 남궁천을 대살성의 사생아라고 욕하면 함께 싸워주고, 학관에 들어가면서 배신하고 호구 취급하던 시절도. 그리고 자신에게 혁련장을 제대로 익히라며 조언해주던 모습까지.
‘젠장, 왜 죽는 순간까지 남궁천과 관련된 일만 주마등으로 스치는 거지?’
아마 이게 다 저기 하늘에서 강림하는 남궁천의 모습 때문일 거다.
으응?
그런데 남궁천이 왜 하늘에서 내려오지?
나도 참…… 그 녀석을 정말 대단하게 여기나 보다.
무슨 하늘에서 떨어진 신도 아니고…….
’어쨌거나 이젠 끝이다.
그래도 마지막엔 깨달음을 얻었으니 아주 헛된 인생은 아니었을까?
이제 저 칼날이 내 이마에 닿는…….
콰아아아아앙!
순간 폭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마를 향해 떨어지던 칼날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곧이어 폭음보다도 더 큰 잔소리가 윤종승의 고막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뭘 멍청하게 서서 헤벌쭉 처웃고 있어? 미쳤어?”
“어어……? 남궁천?”
“정신이 나간 거야? 뭐야?”
“어라? 너 방금 하늘에서 강림한……?”
“뭐라는 거야? 이 얼빠진 놈이! 정신 안 차려?”
“아, 그, 그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칼날에 스치긴 한 것인지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소매로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남궁천을 휙 돌아보았다.
“고맙다, 남궁천. 내게 깨달음을 줘서.”
“그건 또 뭔 소리야?”
윤종승이 주먹을 콱 쥐고 기수식을 취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혁련장 하나만 익혀도 충분히 강호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응? 내가?”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혁련장 따위 하나만 익혀서 고수가 된다고?”
“어…… 그래. 기억 안 나냐?”
“그럴 리가…… 고작 혁련장 따위로…….”
“뭐?”
“아, 아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마도? 어쩌면?”
윤종승이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뭐야? 그 미적지근한 반응은! 네가 지난번 여정 때 그랬잖아! 다른 무공을 익히고 싶다고 하니까 혁련장 하나만 제대로 익히라고!”
“아아…… 그랬지, 그랬어.”
“그래! 모든 건 만류귀종이니 하나의 무공에서 정점을 찍으면 다른 무공은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고.”
“에이, 그래도 혁련장으로는 어림없지.”
“뭐……?”
“아, 아니다. 뭐가 됐든 원래 내가 했던 말이 다 맞다. 암, 그렇고말고.”
뭐야? 이 새끼! 신뢰가 전혀 안 가잖아!
윤종승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너 솔직히 말해 봐! 그땐 그냥 귀찮았던 거냐?”
“에이, 아니라니까. 혁련장 열심히 익혀.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지금 반응이……!”
그때 꽤나 옅어진 연무 너머에서 모용강의 거친 목소리가 버럭 들려왔다.
“이런 썅! 적을 처리했으면 도와줄 것이지! 놀고 자빠진 거냐!”
남궁천과 윤종승이 휙 돌아본 곳에는 모용강과 운경이 서로 등을 진 채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나마 연막탄의 효력이 거의 끝나가면서 그 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보인 것이다.
“아, 미안!”
윤종승이 얼른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슈우우우우웃, 쿠웅!
갑자기 하늘에서 팽수혁이 혜성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슈우우우욱, 콰앙!
백무극도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이 떨어진 곳에는 흑산채 무인과 삼봉파 무인이 각각 깔려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윤종승이 눈을 부릅떴다.
‘어……?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잖아! 저 두 사람도 하늘에서……!’
윤종승은 물론 모용강과 운경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나 여전히 희미한 연무가 끼어 있는 데다 암벽으로 그늘이 잔뜩 져 있어서 딱히 특별한 점을 발견하긴 힘들었다.
“으라차차!”
팽수혁이 곧장 태도를 꺼내 들고는 가장 가까운 적을 향해 휘둘렀다. 공교롭게도 그 상대는 흑산채주였다.
카가가강!
불꽃이 터져 나오면서 막강한 힘에 떠밀린 흑산채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견습생이 동료 부하를 깔아뭉개고는 어마어마하게 큰 칼을 휘두르지 않는가?
게다가 그 뒤를 이어서 떨어진 또 다른 견습생은 보기에도 생소한 사슬낫을 들고 야차처럼 설치기 시작했다.
“키햐아!”
모처럼 일극이 나선 백무극은 혀를 길게 빼물고는 낫질을 시작했다.
슈컥! 슈카칵!
“크악!”
“키키킥! 짜릿하구나! 캬아! 이 맛이지!”
“이, 이 미친……! 크악!”
“으아악!”
그야말로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따로 없다.
과연 저 녀석이 견습생이 맞나 싶다. 아니, 정파 무인이 맞긴 한가?
연무의 효력이 다하면서 주변의 상황은 확실히 이전보다 잘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차라리 안 보이느니만 못했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였으니까.
지금쯤이면 표행이 거의 궤멸 상태가 아닐까 기대했다.
한데…….
‘이래서야…… 이쪽이 위험하잖아!’
저만치 삼봉파 문주 도지백은 비월문주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흑산채주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싸우는 백무극을 다시 한번 더 힐끔 보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실패다! 이건 실패야! 젠장!’
희미해진 연무 너머로 신위를 보이는 비량까지.
도저히 가망이 없다.
애초에 짐작했어야 했다.
아무리 연무가 끼어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지만, 그 많은 인원을 끌고 와서 아직까지 싸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흑산채주의 표정을 살핀 남궁천이 차갑게 웃었다.
“왜?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아차 싶어? 진작 알았어야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기껏해야 도적 두목이나 하는 거지.”
“네놈은 분명…….”
“그래, 내가 강호신룡, 남궁천이다.”
“노옴, 언젠간 반드시…….”
“자자, 그만 씨불이고 기회가 그나마 있을 때 꺼져라. 내가 오늘 많이 피곤하거든? 원래 성질 같으면 네놈 모가지 꺾어서 술 마실 때마다 쳐다보며 안주 삼았을 테지만, 오늘은 정말 피곤해. 좋은 기회잖냐? 어서 조용히 꺼져라.”
“치잇!”
흑산채주가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평소 같으면 저런 애송이의 허세에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으리라.
하나 남궁천의 무위는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게다가 상황을 이렇게 어렵게 만든 것도 모두 남궁천의 지략이었다.
어리다고 녀석의 경고를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
“두고 보자. 퇴각해라!”
마침내 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러잖아도 지칠 대로 지친 적들이었기에 퇴각 명령이 분하기보단 반가울 따름이었다.
“퇴각이다!”
“돌아간다!”
흑산채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도지백이 버럭 소리쳤다.
“채주! 이제 와서 퇴각이라니! 그럼 모든 걸 잃는……!”
“시끄럽소! 목숨은 건져야 할 것이 아니오! 더 싸워봐야 가망이 없잖소!”
“치잇!”
결국 도지백 역시 적당히 검을 섞으면서 천천히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흑산채주도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모용강은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팽수혁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너희들 도대체 뭐야?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우린 늘 이곳에 있었다.”
남궁천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하자, 모용강이 날 선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런데 왜 이제야 보이는 거냐?”
“연무 때문이겠지.”
“흥!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어 있다가 나온 건 아닐 테지?”
그러자 움찔한 팽수혁이 버럭 끼어든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설마 우리가 쥐구멍 같은 곳에 들어갔다가 왕릉 같은 곳을 막 헤매고, 어쩌다 보니 암벽 위까지 올라가서 다시 뛰어내리기라도 한 줄 아는 거냐?”
“…….”
“…….”
남궁천이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저 멍청한 놈. 하여튼 하북팽가 놈들 골 빈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다행히 모용강은 조금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까지 비꼬는 거야?”
“쳇! 기분 나쁘니까! 지금껏 죽을 고생을 하며 열심히 빠져나…… 싸웠는데!”
남궁천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암. 죽을 고생한 건 사실이지.
모용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그럼 그 무식하게 큰 칼은 뭐냐?”
“이, 이거……?”
“그래. 원래 네 거 아니잖아.”
이번엔 남궁천과 백무극도 괜히 긴장한 표정으로 팽수혁을 보았다.
저 단순한 놈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 안 된다. 마단곡의 ‘마’ 자라도 나오는 순간 우리 모두가 피곤해질 거라고!
잠깐 생각하던 팽수혁이 퉁명스레 말한다.
“오다 주웠다.”
“뭐?”
“오다 주웠다고! 불만이냐?”
“아니, 그런 걸 어디서 주워?”
“흑산채 놈들 중 하나가 떨어뜨렸나 보지! 뭘 자꾸 따져? 이게 네 거야? 어? 너도 누구처럼 막 눈에 밟히는 게 전부 네 것처럼 보이냐? 어? 왜? 줄까? 줘? 가지고 싶어?”
“됐다. 그럼 백무극 넌 그거 뭐야?”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백무극에게 향했다.
백무극도 손에 들린 사슬낫을 보고는 남궁천과 팽수혁을 한 번씩 보았다.
‘아니 왜 우릴 보냐고!’
남궁천이 눈치를 살피는데, 백무극이 팽수혁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킨다.
“팽수혁이 오다 주워 줬다.”
“…….”
“…….”
저…… 병……! 하아. 내가 말을 말자.
남궁천이 뒤통수를 벅벅 긁는데, 팽수혁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는 아예 뻔뻔하게 말한다.
“뭐? 왜? 어쩌라고? 저것도 네 거야? 아님, 너희들도 주워 줘?”
“아니, 뭐 그럴 것까진 없고.”
“필요하면 말을 해, 새끼들아. 누구처럼 욕심만 잔뜩 부려서 다 내 거처럼 쳐다보지 말고!”
하아, 저 무식한 놈을 응원해야 하나? 욕을 해야 하나?
남궁천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다행히 팽수혁의 뻔뻔함이 어느 정도 통한 모양이었다. 모용강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됐다. 전리품엔 관심 없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용강을 보면서 그제야 팽수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남궁천을 보면서 입매를 비튼다. 거만이 가득한 웃음이다.
마치 연기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저걸……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