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내가 언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손우곤이 버럭 소리치자 남궁천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주의를 주었다.
“목소리 낮춰. 여기 창응대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명령이라니까.”
“창응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가주님을 지키는 게 첫 번째 임무…….”
“지금이 그 특별한 상황이잖아. 아무리 은신한다고 해도 그 상자를 들고 날 졸졸 따라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 몰라? 오히려 그게 더 날 위험하게 만들 수 있어.”
“그렇지만…….”
손우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정할 수 없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천하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노릴 마단곡 영단이지 않은가?
마교가 제조한 영단도 있지만, 오히려 대환단이나 자소단처럼 백도 무림에서 흘러 들어간 영단이 더 많다.
그 이유야 단순하다.
마교에서 만든 영단은 만드는 족족 곧장 마교도들이 소비해 버렸을 테니까.
반면 백도 무림에서 만든 영단은 마교와 상성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복용 후에 부작용이 나지 않도록 소화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까다롭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온갖 영단이 다 든 상자를 등에 지고서 남궁천을 졸졸 따라다닌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리라.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지금부터 너희들은 곧장 무한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불명회를 찾아가도록. 내가 아는 한 가장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도 주군을 이곳에 두고 저희들만 갈 수는…….”
“왜? 아까는 잘도 포기하고 가려더니?”
“그, 그건……!”
“내 뜻을 받들겠다며? 빨리 영단부터 옮기자며?”
“그건 제가 말한 건 아니고…….”
“뭐, 딱히 반대도 안 하더만? 어쩔 수 없다면서 냉큼 미끼를 물어 버리던데?”
“주군 그건 정말 오햅니다.”
손우곤이 울상이 되어 말하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우기고 가. 아니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가든지.”
“무슨 그런 말씀을……!”
“아, 글쎄! 그냥 가라고!”
급기야 남궁천이 버럭 소리치자 손우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확고하시군요.”
“그래. 어차피 난 드러난 몸이야. 혹여 이곳의 일을 아는 누군가가 또 나타나더라도 나나 다른 생도들을 노리겠지. 너희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를 테니까. 혹여나 안다고 하더라도 내 주위에 은신해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고. 그러니 따로 움직이는 게 맞아.”
“그렇게 되면 주군이 미끼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명령이나 들어.”
손우곤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곧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고 물건이나 관리 잘해라. 알지? 내 물건 하나라도 없어지면 다 뒈지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쯤에서 찢어지자고.”
남궁천이 턱짓을 하자, 손우곤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창응대원들에게 돌아갔다.
손우곤에게 대략의 설명을 들은 창응대원들 중 일부가 반발을 하는 듯했으나, 곧 남궁천의 표정을 힐끔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이미 남궁천의 표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결심이 섰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창응대가 곧 남궁천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손우곤의 지시에 따라 창응대원들이 몸을 날렸다.
숲속으로 산새처럼 날아가는 창응대원들을 본 남궁천이 그제야 몸을 돌려 생도들에게 걸어왔다.
팽수혁이 어딘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쳇, 갔군.”
“왜?”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영단 한 알을 안 주냐?”
“맡겨놨어?”
남궁천이 툭 던지듯 말하자, 팽수혁이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남궁천이 혀를 찼다.
“쯧쯧. 저 욕심 많은 것 보소. 내가 그 무식하게 큰 칼도 너한테 줬건만.”
“야, 인마! 이게 뭐, 네 거야? 그리고 마단곡 영단을 혼자 싹 쓸어간 놈이 누구보고 욕심이 많다고……! 읍! 놔 봐! 아니, 유현 너는 왜 자꾸 나만 말려! 읍읍!”
“진정하세요.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아래에서 들리겠습니다.”
“치잇!”
그제야 팽수혁이 혀를 차고 휙 돌아섰다.
그가 저만치 절벽 아래에서 아직도 사투를 벌이고 있는 흑산채와 삼봉파, 그리고 표행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까지 연무가 깔려 있었지만 조만간 시야가 확보될 정도로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그랬다.
여긴 표행이 사투를 벌이던 그 협곡의 동쪽 암벽 꼭대기.
무너지는 왕릉에서 계단을 따라 줄기차게 위로 달린 결과 이곳으로 나타난 것이다.
“거, 오래도 싸우네.”
“그 바람에 아직 우리의 부재가 들키지 않은 거죠.”
“그래도 승기가 잡혀가는 모양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남궁 소협의 전술이 나름 먹혀든 모양입니다.”
“전술은 무슨! 처음부터 잿밥에만 관심 있었던 거지!”
“아…….”
유현도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는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남궁천이 코웃음을 친다.
“그 잿밥에서 콩고물 떨어지길 기다리다가 안 떨어지니까 골이 잔뜩 난 놈이 누군데?”
“저, 저……!”
“자, 이거 받고 그만 투덜대라.”
남궁천이 순간 손에 쥔 무언가를 휙 던져준다.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든 팽수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아한 향기.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고 심신이 편안해지는 듯하다.
‘영단……!’
팽수혁이 절로 입매가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이게 뭐냐?”
“뭐긴 뭐야? 영단이지.”
“그러니까 무슨 영단이냐고.”
“소환단이다. 나참, 그렇게 처먹고 싶어 하면서 주니까 뭔지도 모르네.”
“소환단? 정말 소환단이냐? 이거…… 나 주는 거냐?”
“왜? 싫으면 말고. 다른 녀석 주…….”
“누가 싫다고 했냐! 네가 내게 감사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너는 원래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라서 내가 친히 이해하마. 네 마음 잘 받겠다.”
“뭐라는 거야? 저 멍청한 놈이.”
남궁천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데, 팽수혁이 헤실헤실 웃으며 소환단을 품에 넣고 돌아섰다.
“어쨌든 너희들도 고생했으니 하나씩 주마.”
남궁천이 유현과 백무극에게도 소환단을 한 개씩 던져 주었다.
유현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남궁 소협.”
“잘 먹겠다.”
백무극이 무뚝뚝하게 대꾸를 하고 나자, 남궁천이 절벽 가장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보아하니 싸움이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표행이 배수의 진을 친데다 자욱한 연막탄 때문에 삼봉파와 흑산채는 인해전술의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한 듯했다.
후방에 있던 적들이 흩어져서 달아나는 모습도 보였다.
“가자. 조만간 연무가 걷히겠어. 그럼 우리가 없다는 것도 들킬 거야.”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연무가 사라지기 전까지 도착하긴 어렵다. 포기해.”
“달려가지 않고 뛰어내리면 되지.”
“뭐? 어딜? 저길? 여기서?”
팽수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돌아본다.
“왜? 쫄려?”
“쫄, 쫄리긴 누가 쫄린다고 그러냐! 네놈의 그 밴댕이 같은 간으로 해낼 수 있을까 싶어서 묻는 거다.”
“그럼 뛰어!”
팍!
순간 남궁천이 절벽 아래로 쑥 꺼졌다.
“허억!”
팽수혁이 눈을 찢어지도록 부릅떴다.
저 미친놈이 정말로 저기서 뛰어내렸어?
얼른 가장자리까지 달려가 보니 남궁천이 절벽에 검을 박아가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게 아닌가?
콰가가가가각!
“역시 남궁 소협은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유현, 괜히 무리하지 마라. 너는 화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제자잖아. 혼자 돌아서 내려가는 게 좀 그러면 내가 함께 내려가 줄 수도 있…….”
“아닙니다. 저는 거듭된 임무를 통해서 제가 실전을 너무 얕봤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든 변수에 적응하려면 이 정도쯤은 각오해야겠지요.”
“아니, 굳이 각오하지 않아도…… 어엇!”
“먼저 가겠습니다!”
콰가가가가각!
유현이 남궁천처럼 절벽에 검을 박아 넣으면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지, 거의 추락하다가 검을 박아서 멈추고, 다시 추락하길 반복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어이, 무극. 너는…… 너는…… 그래, 넌 홀몸이 아니잖아.”
“……?”
“아니, 그러니까 너는 혼자가 아니라며! 전해 듣기론 너 안에 여러 명 있다며? 네가 함부로 뛰어내리면 일극과 이극, 삼극 걔네들도 다치잖아! 그러니까…….”
“병신아, 쫄리면 뒈지시든가?”
“뭐……?”
“방금은 일극.”
“아니, 뭐 이런 개…….”
“갈게.”
“야, 야! 야, 이 새끼야! 아까도 일극 아니지? 너지? 이 새끼야!”
콰가가가가각……!
하지만 백무극도 새로 구한 사슬낫을 절벽에 박아 넣으면서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우! 저 꼴통 새끼들! 무식하게 여길 그냥 뛰어내려? 그러다가 추락해서 뒈지면 어? 누가 제사상에 영단이라도 올려준다냐? 하아, 개 같은 놈들!”
결국 팽수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으아아아아아!”
콰가가가가각!
팽수혁이 비명 같은 기합성을 터뜨리며 절벽을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미끄러져 내려가던 남궁천이 절벽 중간쯤 다다랐을 때 눈살을 구기고는 위를 보았다.
커다란 덩치를 지탱하기 어려워서인지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는 팽수혁.
“아…… 새끼, 다 들키겠네.”
팍!
남궁천이 벽에 박힌 검을 뽑아내자 다시 아래로 쑥 떨어졌다.
콱! 카가가각!
암벽에 꽂힌 벽라검이 미끄러지면서 거친 소리를 울렸다.
마침 저만치 아래에 혈투를 벌이는 윤종승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 * *
타앙!
“치잇!”
야심차게 휘두른 칼날이 토시에 맞고 튕겨 나오자 삼봉파 이봉대주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애송이 새끼가……!’
연무 속을 헤매다가 맞닥뜨린 녀석은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견습생.
아직 자라지도 않은 새싹을 짓밟는 게 좀 미안했지만, 이건 실전이었다. 그래서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 버릴 각오로 싸웠는데…….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남궁천의 무위가 막강하다는 건 앞서 봐서 짐작했다.
그런데 여기 이름 모를 녀석도 이 정도일 줄이야.
“제법이구나, 애송아.”
“헉, 헉……! 그 애송이 하나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면서 쪽 팔리지도 않으신가?”
“뭐라?”
“그리고 내 이름은…… 윤종승이다!”
파바밧!
순간 윤종승이 바닥을 차며 몸을 부웅 날렸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혈맥을 따라 빠르게 흘러가면서 다섯 손가락에 집중된다.
혁련장!
언젠가 남궁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혁련장 말고 다른 것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 남궁천은 이렇게 대답했다.
“혁련장 하나만 제대로 써도 강호 고수가 될 수 있다. 좋은 무공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궁천의 그 말에 신뢰가 생겼다.
그래, 만류귀종이라고 하지 않던가?
무공 하나의 극의를 깨우치게 된다면 다른 기술은 절로 따라오리라.
마침 이대주가 일갈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까불지 마라! 견습생 주제에!”
쉬이이잇!
검봉이 윤종승의 이마로 곧장 날아들었다.
‘멍청하긴!’
검봉이 이마를 노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몸을 낮게 숙였기 때문이다.
하나 이럴 때는 목을 노렸어야 한다. 이미 몸을 낮춘 상황에서 고개를 더 든다면 심장이 위험해지고, 더 낮춘다면 머리가 꿰뚫릴 수 있으니까.
한데 실전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적의 눈을 마주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얼굴을 노리고 검을 날린다.
이 또한 남궁천이 지난 여정에서 알려준 것이다.
“그럴 땐 반 보 정도만 밖으로. 딱 반 보면 된다.”
윤종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딱 반 보……!’
팟!
피츗!
검봉이 흔들린다 싶더니 귓가를 살짝 베며 스쳤다.
그 틈을 타서 윤종승이 이봉대주의 품으로 혁련장을 날렸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이봉대주가 비명을 터뜨리며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훅, 훅, 훅……! 역시 됐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윤종승이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역시 남궁천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통해! 그 녀석은 진짜…… 괴물이야!
‘그나저나 그 괴물 녀석은 대체 어디서 싸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