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아니, 왜 안 나타나!
“와아아아아아아!”
진정성이 담긴 함성은 그 울림이 남다른 법이다.
표행에서 제일 약하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생도가 생사결의를 다지니, 이를 본 무인들의 가슴에는 깊은 울림이 절로 생겨났다.
그리고 그 울림은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로 이어져 우렁찬 함성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하늘이 뒤흔들리고 협곡이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에 뒤를 쫓아 달려왔던 삼봉파와 흑산채가 절로 움찔거릴 정도였다.
순식간에 사기를 끌어 올린 남궁천을 보면서 연추량은 내심 생각했다.
‘이제 보니 잠룡의 기질마저 다분하구나. 내가 사람을 한참 잘못 보았구나!’
새삼 부끄러워진다.
남궁천의 말대로 자신은 부딪쳐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이며,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한두 번이야 그 상황을 회피하고 달아날 수 있겠지만, 매번 요행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랜 평화에 젖어들어 편한 길만 고집한 것이리라. 그러니 자연스럽게 싸울 방법보다는 피할 방법부터 떠올린 것이고.
‘참으로 어리석었어.’
돌이켜 생각하니 그간 왜 두 번이나 표행에 실패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러고도 말로만 믿어달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데 남궁천은 다르다.
불리한 싸움은 피하는 게 아니라 유리하게 만든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싸운다.
마치 강호의 비정함에 찌들대로 찌든 자의 독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 그것이 전혀 어리석어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모종의 경외감마저 생긴다.
최악이 아닐 때는 싸우는 거라니.
피식.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온다.
번쩍!
호승심이 치민 연추량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싸우자! 저 비열한 것들에게 강호 정의를 가르쳐주자!”
“와아아아! 싸우자! 이기자!”
“정의가 승리하리라!”
표행에 참여한 무인들의 사기가 대폭 상승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호승심을 끌어 올리며 미친 듯이 기합성을 질러대니 무섭게 달려오던 삼봉파와 흑산채가 괜히 머뭇거렸다.
도지백이 미간을 꿈틀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저것들이…… 갑자기 집단으로 미친 건가?”
“궁지에 몰리니 이성이 마비된 모양이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흑산채주 강상도가 이매를 비틀어 올렸다.
도지백이 코웃음을 쳤다.
“흥! 쥐새끼가 궁지에 몰려 찍찍거린다고 해서 정말 고양이를 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군. 뭣들 하느냐? 쳐랏!”
“우와아아아!”
삼봉파 무인들이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강상도의 수신호에 흑산채 무인들도 뛰쳐나갔다.
막다른 협곡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막아랏!”
“죽여라!”
“정의는 승리한다!”
“객기의 대가를 치르리라!”
살기와 살기가 뒤엉키고, 서로를 향한 원망과 욕설이 난무한다.
챙챙! 채채챙!
“크악!”
“으아악!”
칼부림 끝에 비명이 치솟고 피가 튀어 오르며 혈향이 자욱하게 퍼져나간다.
“어우, 이 징글징글한 새끼들!”
남궁천이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자신에게 달려들던 흑산채 무인 하나의 목을 가차 없이 그어 버렸다.
슈칵!
“커억!”
단 일격에 나가떨어진 흑산채 무인이 목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연추량이 전율했다.
‘잠룡이다. 저 아이는 진짜 물건이야!’
과연 저 아이에게 실전 견습이 필요할까 싶다.
검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살육을 저지르는 살인마도 아니다.
조금 전 그의 언행에서 알 수 있었듯이 검에 분명한 뜻을 담고 있다.
뜻이 담기지 않은 검은 죽은 검이다.
닭 모가지를 썰어대는 칼보다도 못한 것이 바로 그런 사검(死劍)이다.
한데 저 남궁천은 다르다.
그만의 기준이 명확하다.
검로가 정해지기 전에 심로(心路)가 정해져야 하는 법.
‘한데 저 아이는 이미 심로가 정해져 있다.’
진정한 잠룡!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기재!
싸우는 모습조차 경이롭다.
달려드는 적의 칼날을 여유 있게 피해내고 부드럽게 달려들어 강하게 후려친다.
슈컥!
목을 깊게 베인 적은 단말마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단 일격에 절명한다.
거의 일검일살을 펼치고 있다.
마치 군대의 검을 보듯이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며 철저한 실전용이다.
‘저것이 남궁세가의 검법인가?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구나.’
그럴 수밖에.
지금 남궁천은 남궁세가의 검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겉모습만 그럴 뿐 운기 방식은 무수한 실전 속에서 최적화되어 변형된 흐름이었다.
그러니 검법이 실전에 맞게 조금씩 변형되어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검술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둘러싼 적을 순식간에 제거한 남궁천이 돌연 고개를 휙 돌려보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 왜……?”
느닷없이 달려오니 당황해서 중얼거렸는데, 그걸 또 들은 남궁천이 버럭 소리쳤다.
“왜긴 왜야! 남은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혼자 불구경하고 있어?”
“아, 아니. 잠시 나도 모르게…….”
“정신 안 차려? 지금 전쟁이야!”
“그, 그래. 그런데 왜 반말을…….”
“뭐야? 목숨이 걸린 다급한 순간에도 예의 따지다 뒈져야 하나?”
허, 듣다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왜 들을수록 기분이 나쁘지?
물론 남궁천은 이런 난전이 펼쳐지자 저도 모르게 전생의 습관처럼 반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연추량이 버벅거리자, 남궁천이 주변을 힐끔 둘러보고는 물었다.
“연막탄!”
“뭐, 뭐?”
“연막탄 어디 있어요?”
“글쎄…….”
연추량이 이사흠을 힐끔 보자, 이사흠이 마침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을 막아내고는 소리쳤다.
“연막탄이면 있긴 한데 왜 그러나?”
“있긴 한데?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쪽수가 이렇게 밀리는데 연막탄을 놔두고 왜 안 쓰고 난리야! 전술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연막탄은 아꼈다가 고기 구워 먹을 때 쓰려고 그러시나?”
아니, 그걸로 고기 구워 먹을 수나 있나? 아, 그게 문제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이사흠이 자신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적과 연신 칼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저기 두 번째 수레의 검은 상자 안에 들어 있다!”
“칫! 진작 말할 것이지!”
혀를 한 번 찬 남궁천이 바람처럼 몸을 날리더니 이사흠을 공격하던 무인의 턱을 가차 없이 걷어찼다.
퍼억!
발길질에 튕겨나간 무인이 수레바퀴까지 굴러가서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허어, 신룡은 신룡일세.’
이사흠이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연추량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피식 웃었다.
괜히 남궁천을 골칫덩어리 취급했던 게 민망해서였다.
한편 수레로 곧장 달려간 남궁천은 검은 상자의 덮개를 검기로 얇게 날려 버렸다.
카창!
그 안에 둥글둥글한 연막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워낙 잦은 흑산채 습격을 의식해서 만약을 생각해서 대비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사람들이 말이야. 써먹을 생각을 해야지! 이걸 이렇게 묵혀두나?’
남궁천이 양손 가득 연막탄을 들고는 씨익 웃었다.
인해전술을 막기 위한 전략?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나 남궁천이 지금 다급히 연막탄을 찾은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간 바로…….
‘흐흐. 마단곡이…… 눈앞…… 흐흐흐.’
입술을 비집고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남궁천이 연막탄을 사방으로 뿌리며 던지기 시작했다.
콰앙! 쾅! 쾅!
연신 폭음과 함께 희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눈만 가리는 용도였기에 소리만 컸지 실제로 폭발력을 지니진 않았다.
푸쉬이이이이이!
갑작스럽게 협곡 가득 짙은 안개가 퍼져나가자 뒤엉켜 싸우던 사람들이 바로 앞의 적을 제외하곤 대략의 인영만 보일 뿐이었다.
남궁천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됐어!’
이제 눈을 가리고 판은 깔아둔 셈이다.
“대주!”
남궁천이 나직이 소리치자, 그의 곁으로 창응대주 손우곤이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확실히 창응대의 은신술은 뛰어나다. 지금껏 함께 있어도 남궁천이 의식을 하지 않으면 잘 느낄 수 없을 정도니까.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벽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더니 돌연 벽라검으로 암벽과 지면이 맞닿은 틈을 푹 찌르는 게 아닌가?
검기까지 뽑아서 내질렀지만 단단한 바닥과 벽에 막혀 검이 더 이상 파고들어가진 않았다.
“……?”
“봤지? 이렇게 바닥과 벽 사이를 닥치는 대로 쑤셔.”
“예? 갑자기 그건 왜…… 아!”
뭔가를 깨달은 손우곤이 눈짓으로 물었다.
‘여기가 거기군요!’
‘알았으면 실시.’
손우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존명!”
대답과 동시에 손우곤이 다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이걸로 창응대원 전원이 암벽과 바닥 틈을 닥치는 대로 쑤시기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살기와 소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연막탄으로 연무까지 자욱하니 창응대의 움직임을 눈치챌 자도 없을 테고.
‘아,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머리가 좋았어.’
남궁천이 새삼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눈을 뒤집고 달려드는 적의 가슴에 벽라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커억! 컥……!”
“사람이 도취되어 있을 땐 방해하는 거 아니야.”
남궁천이 무심히 검을 뽑아내고는 다시 암벽과 바닥 틈을 푹푹 찔러갔다.
‘여기 어딘가에 있다! 이제 다 왔다! 영단, 영단……! 흐흐흐!’
* * *
챙챙! 채앵!
푸욱!
“끄억!”
촤아악!
쿠웅!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연추량이 어깨를 들먹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욱, 훅……!”
정말이지 어디서 적들이 계속 나타나는지 환장할 지경이다.
만약 남궁천이 연막탄이라도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꽤나 어려운 싸움이 되었으리라.
그럼에도 마치 협곡이 흑산채 무인을 잉태라도 하듯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는 이동하다 보면 발에 시체나 부상자들이 꽤나 걸린다.
다행히 다수는 흑산채나 삼봉파 무인들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표사들이나 비월문도들도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쟁자수들은 다행히 안전한 편이었다. 표물이 실린 수레에 밀집해서 이따금씩 연막탄을 던지는 수준이었기에 깊이 파고들어온 적이 아니면 다칠 위험이 적었다.
거기에 표물을 보호하기 위한 표사들이 잔뜩 긴장해서 경계를 서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일단은 희망이 있다!’
새삼 남궁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상황을 단박에 막상막하로 만들지 않았나?
뿐만 아니라 남궁천과 함께 온 생도들도 제법 한 수가 있었다.
조금 전엔 운경이라는 생도가 배후를 노리던 적의 목을 베는 바람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강호 경험이 일천하다고 무시했건만. 선입견에 사로잡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아직 멀었다.’
새삼 반성을 한 연추량이 고개를 드는데, 마침 저만치 칼을 휘두르는 또 한 명의 생도가 보였다.
‘저 녀석은 섬뜩할 지경이군.’
그의 시야가 닿은 곳에는 백무극이 막 사람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고 있었다.
퍼억!
그대로 넘어간 적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백무극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는 중얼거렸다.
‘남궁천. 남궁천은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