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금수저의 삶이란
임태풍의 시선이 모용강에게 머물렀다.
‘저 녀석이 모용강. 모용신 단주의 동생이라지? 혹시 모 단주가 지난번 진소홍 생도 납치 건에서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려고 동생을 이용하는 건가?’
생각을 멈춘 임태풍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생각이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모용신이라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냥 자신에게 찾아와서 한마디 언질을 하면 그만이다.
이제 임태풍의 시선은 백무극에게 향했다.
‘저놈은 그냥 생각이 없는 것 같고. 설마 종남파에서?’
임태풍이 운경을 돌아보았다.
하나 이번에도 곧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지. 종남에서 뭐 하러 그런 짓을…….’
역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생도들을 보면 그래도 뭔가 짐작 갈만한 게 있을까 했건만.
‘저 녀석은 무연회 우승한 남궁천. 혹시 남궁천을 노리는 녀석들의 짓인가?’
남궁천이 대살성의 사생아인 만큼 원한을 가진 자가 있을 수도 있다.
하나 역시 딱 떨어지는 뭔가가 없다.
아니면 이번에도 진소홍 생도를 노린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옆에서 비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주님?”
“아, 미안하오.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임태풍이 생각을 거두었다.
남궁천이 그런 그를 지켜보다 어딘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골이 아픈 모양이군.’
하긴 지금쯤 애가 탈 것이다.
시시때때로 치미는 구토 때문에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겠지.
사실 임태풍이 복용한 건 맹독이 아니다.
단순한 구토유발제.
하지만 특별한 약재를 사용한 만큼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구토는 한 달간 멈추지 않으리라.
한 달이 지나면?
자연스레 멈추게 된다.
그때는 임태풍도 알게 되리라. 자신이 복용한 게 맹독이 아니라는 것을.
마침 팽수혁이 윤종승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렇게 생각하다가 골로 갈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임태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때때로 치미는 구토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제정신으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손발은 부들부들 떨린다.
“각주님, 몸이 좋지 않으시면…….”
“아, 아니오. 말하겠소.”
임태풍이 손을 들어 보였다.
이만한 일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심호흡을 한 임태풍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광서성 계림분타로 가게 될 것이다.”
“광서성이요?”
팽수혁이 놀라서 되묻자, 임태풍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계림분타를 통해 비월문에 지원을 가는 것이다. 자세한 임무는 그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조직에 편입되는 겁니까?”
“너는……?”
임태풍이 눈을 가늘게 뜨자, 팽수혁이 어깨를 쫙 펴며 말했다.
“팽수혁입니다. 며칠 전 정검대에서 탈주 공범들과 싸웠지요.”
“그렇군. 네가 하북팽가 팽수…… 우우웩!”
느닷없이 치민 구토 때문에 임태풍이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해댔다.
팽수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럽잖아! 이거 너무 실례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을 헛구역질한 임태풍이 입가를 소매로 훔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젯밤부터 줄곧 토했더니 이젠 신물밖에 올라오지 않는다.
“아, 아무튼…… 너희들만 간다. 함께 가는…… 조, 조직은…… 없다.”
“예? 그럼 생도들만 파견된다는 겁니까?”
“그래. 너희들만 파견된다. 하북팽가는 실전에 특화된 가문. 기대하마, 팽수…… 쿠웨에엑!”
팽수혁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 깃든다.
‘아, 뭐냐고. 왜 내 이름 말할 때만 토악질이야! 내가 역겨워?’
이젠 멈추지도 못하는 임태풍을 보며 비량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각주님, 괜찮으신지요?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그, 그럼 생도들을 잘 부탁드리겠소.”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비량의 부축을 받은 임태풍이 비틀거리면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생도들은 곧바로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 * *
“마지막입니다.”
장흥표국주 이사흠이 얕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비월문주 연추량이 흠칫거리고는 찻잔만 물끄러미 보았다. 차마 이사흠을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 수가 없었기에.
솔직한 마음은 실망감이 크다.
하나 어찌 이사흠을 탓할 수 있겠는가?
벌써 두 번이나 실패했다.
흑산채가 계림 인근에 터를 잡은 후로 장흥표국은 중요한 표물이 있을 때마다 비월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현재 계림에서는 비월문이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이젠 비월문보다 삼봉파를 찾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장흥표국은 비월문을 저 버리지 않고 찾아주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오래전 비월문주가 표행 중 위기에 빠진 장흥표국주를 구해준 사실이 있었기에 그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두 번의 표행은 모두 실패였다.
철저하게 준비했음에도 흑산채는 표행을 덮쳤고, 비월문과 장흥표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다른 표국 같았으면 진작 비월문을 등지고도 남았으리라.
그럼에도 장흥표국주는 세 번째도 비월문을 찾아주었다.
하나 그도 이젠 최후통첩을 알린 것이다.
마지막 의뢰.
이번마저도 실패하면 장흥표국 역시 삼봉파에게 모든 의뢰를 맡기게 되리라.
실망스럽지만, 이사흠도 할 만큼 해주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준 셈이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이쪽이 보답해야 할 때리라. 그의 신뢰에 비월문이 답해주어야 한다.
물론 순수한 의리 때문만은 아니겠지.
비월문이 무림맹에 입맹하지 않았더라면 장흥표국은 더 빨리 손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맹에서는 뭐 하고 있단 말인가?’
시름 섞인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밖으로 뱉진 않았다.
괜히 자신 없는 것처럼 비쳐질까 봐.
이사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멀리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디 이번 표행에서 비월문의 힘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자못 간곡한 어조다.
그로서도 은인이자, 무림맹에 입맹한 비월문을 등지고 싶진 않으리라.
이사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주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 신의에 보답하겠소.”
“그럼.”
이사흠이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멀리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연추량은 정문까지 배웅을 했다. 그렇게 이사흠을 보내고 돌아설 때였다.
마침 반대쪽 길목에서 익숙한 얼굴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계림분타주?’
틀림없다. 무림맹 계림분타주다.
그가 비월문주 앞에 다다라서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장문인! 드디어 답이 왔습니다! 맹에서 답이 왔습니다!”
“맹에서? 오오, 뭐라고 했소?”
“지원을 보내겠답니다!”
“아아, 역시! 드디어 맹에서!”
“하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조금 기다리시면 분명히 맹에서 조치를 취해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엔 좀 너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제라도 지원을 해주겠다는 게 어딘가?
“그래서 누가 오는 거요?”
“글쎄요. 파견한 조직이 어디인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호법당에서 파견을 했다고 하니, 청랑단이나 철혈대가 아니겠습니까?”
“오오, 청랑단! 철혈대!”
그 두 조직이라면 정예 중에서도 정예가 아닌가?
분명 비월문에 큰 힘이 되리라.
삼봉파 역시 무림맹이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눈치를 보게 될 테고.
“청랑단이든 철혈대든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왜 나와계셨습니까?”
“장흠표국에서 마지막으로 표행 호위를 부탁해왔소.”
“아…… 마지막이군요. 언제입니까?”
“보름 후가 될 것 같소.”
“오! 그 정도면 맹에서 보낸 지원군이 도착할 때겠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도 되는구려.”
“이왕이면 청랑단이면 좋겠습니다.”
“하하. 철혈대면 어떻소? 어쨌든 그들은 맹의 정예군인데. 하하하!”
모처럼 연추량이 파안대소하며 근심을 떨쳤다.
* * *
타닥. 탁.
장작이 타들어 갔다.
불씨가 흩날리면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모닥불에 땔감 하나를 던져 넣은 비량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이렇게 모여서 함께 임무를 가는 것도 나중에는 좋은 추억이 될 거야. 서로 얘기 나누다가 쉬도록. 나는 이만 빠져줄 테니까.”
“예? 주무시려고요?”
윤종승이 화들짝 놀라면서 묻자, 비량이 기지개를 늘어지도록 켜면서 말했다.
“흐아암. 자야지.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져서 일찍 자야 해.”
‘그렇게 나이 들지도 않으셨으면서.’
윤종승이 속으로만 중얼거릴 때, 비량의 기척이 어둠 속에 묻혀 버리듯 지워졌다.
“아…… 가셨네.”
윤종승이 뻘쭘하게 서 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생도들을 보았다.
모닥불을 가운데에 놓고 둘러 앉아 있는 생도들.
얼핏 보기 좋은 광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싸움닭들이 여차하면 칼부림할 틈만 노리는 중이었다.
‘아…… 교관님이 안 계시면 분위기 이상해진다니까…….’
이미 팽수혁과 모용강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불꽃 튀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한편 백무극은 계속 남궁천을 힐끔거리며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딘지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이는 진소홍이 유일했다.
“좋다. 이렇게 야영을 하다니.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곁에 있던 팽수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야영이 처음이냐?”
“음. 야외에서 이렇게 그냥 자는 건 처음이지.”
“그럼 객잔이 없는 곳에서 머물게 되면 어떻게 했는데?”
중원은 넓다.
특히 지금처럼 먼 변방까지 가려면 마을과 마을 사이를 하루 이상은 가야 한다.
진소홍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통 수행원들이 집을 지어주지.”
“……!”
순간 주변 생도들이 입을 쩍 벌리고는 진소홍을 보았다.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 으쓱이며 할 소리냐!
한참이 지나고서야 팽수혁이 어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집…… 집을 짓는다고? 하루 만에?”
“응. 왜?”
“아니, 그게 가능해?”
“왜 불가능해?”
“아니…… 원래 집이라는 게 하루 만에 지어지는 거였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팽수혁이 돌연 휙 돌아서더니 윤종승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네가 대답해 봐. 내가 무식해서 모르는 거냐? 원래 집이라는 게 그런 거냐?”
“아…… 내가 집을 지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하루 만에 집을 짓는 건 무리지 않을까?”
“역시 그렇지? 그게 상식이지? 내가 무식한 게 아니라고!”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현이 빙그레 웃으면서 진소홍을 보았다.
“혹시 수행원이 몇 명이었습니까?”
“으음.”
진소홍이 별빛을 담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번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보통 아빠랑 함께 다니면…… 천 명?”
“뭐엇!”
“처, 처, 처…… 천 명! 천 명이라고!”
팽수혁이 대경실색하며 외쳤다. 너무 놀라서 입에 거품을 물기 직전 같았다.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
이게 진정한 금수저의 세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