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검정 귀신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소?”
임태풍이 조심스레 묻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묻는 건 자유지. 대답하지 않는 것도 자유고.”
“왜 견습생을 계림으로 보내라는 거요?”
“그게 궁금했구나. 대답해 줘?”
어둠 속에서 남궁천의 안광만 새파랗게 빛을 뿜는 것만 같다.
모종의 살기를 느낀 임태풍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됐소. 대신 다른 걸 묻겠소.”
“호기심이 많은 편이군.”
“내 목숨과 관련된 것이니까. 시킨 대로 하면 해독제를 준다는 걸 어찌 믿을 수 있소?”
“내가 그렇게 마음먹었으니까. 뭐, 믿을 수 없다면 목숨 걸고 도박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끄음.”
“우리가 널 조사해봤는데, 그동안 뒷돈을 받아 처먹은 것만 해도 맹에서 잘리고도 남겠던데? 약아빠진 짓을 많이도 했더군. 그게 다 까발려지면, 너만 죽는 게 아니라 남은 네 가족도 위험해지지 않겠어?”
“……!”
임태풍이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무슨 말인지.”
“다행이군. 말귀를 알아들어서. 그럼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남궁천이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들 듯 사라졌다.
잠시 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임태풍이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나직이 불러보았다.
“갔…… 소? 간 거요?”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제야 한숨을 내쉰 임태풍이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개 같은 놈! 감히 내게 독을 먹여?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도대체 누구지?”
“아직 안 갔다, 새끼야.”
“으허억!”
화들짝 놀란 임태풍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정말이지 조금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는데, 남궁천이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게 아닌가?
“아, 이 간사한 새끼. 앞에서는 착한 척하며 고분고분하더니. 뭐? 개새끼? 찢어 죽여?”
“말, 말실수였소.”
“강호에서는 실수 한 번에 저승 강 건넌다는 것 몰라?”
“용서해 주시오.”
“싸가지 없는 놈이 뻔뻔하기까지.”
“그런데 왜 안 가시고…… 우웁……! 쿠우웨에엑!”
갑자기 욕지기가 치민 임태풍이 허리를 숙이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그런 임태풍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깜빡한 게 있어서 전해주려고 했지.”
“뭐, 뭐요? 쿠우웁! 우우웩!”
“네가 처먹은 약에 부작용이 좀 있어. 구토가 자주 일어나는 게 흠이랄까?”
“그런…… 쿠웁!”
“음……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니까 이만 간다.”
“자, 잠깐……! 우우웁!”
다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은 임태풍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가까스로 양동이 하나를 찾은 임태풍이 머리를 박고 연신 구토를 해댔다. 한참이나 구역질을 하던 임태풍이 가까스로 진정을 되찾고는 불렀다.
“가, 갔소? 진짜 갔소?”
이젠 진짜 기척이 없다.
“이런 개 같은 새끼…… 이렇게 지독한 독을……!”
“아직 안 갔다, 이 새끼야.”
“헉! 아니, 왜 안 가는 거요! 쿠우웁! 우웨엑!”
“내 욕 하나 안 하나 지켜봤지. 이거 아주 싸가지 없는 새끼네. 없을 때 무조건 욕하는구나?”
“오, 오해요. 절대 욕하지 않겠소. 그러니 구토만이라도 멈출 수 있게 우욱……! 쿠웨에엑! 헉, 헉……! 이보시오? 해독제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 제발…… 이보시오? 에이, 또 간 척하지 말고…… 응? 아직 있는 거 다 안다니까…….”
처소에 홀로 남은 임태풍의 애절한 목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 * *
짧은 휴식 기간이 지나갔다.
견습생들은 오랜만에 승천각 연무장에 모였다.
정검대로 파견되었던 생도들의 활약상은 이미 무림맹 내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진소홍은 남궁천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오랜만이야, 남궁천! 정검대 호송 임무에서 또 엄청난 활약을 했다면서?”
눈을 반짝이는 진소홍의 표정이 마치 굴러들어온 호박을 보는 것만 같다.
남궁천의 활약은 곧 남궁천의 가치라고 여기는 그녀였기에.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정검대에 가는 건데!”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윤종승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지목을 받아야 하는 거니까.”
“하긴 그렇지.”
진소홍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윤종승이 어깨를 펴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정검대에 들어오지 않길 잘한 거야. 만약 네가 정검대에 들어왔더라면 아주 위험했을 테니까. 그건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으니까.”
“정말? 자세히 듣고 싶어! 얘기해줘! 아, 그러고 보니 너도 흑도 무인 한 명을 물리쳤다며?”
진소홍이 눈을 반짝이자, 윤종승이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갑자기 진중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으음. 그날 일은 워낙 잔인해서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일이나, 내 진 소저를 위해 자세히 말해주겠소.”
“어…… 근데 왜 갑자기 말투가 바뀐…….”
“쉿. 잘 들으시오. 나는 안 좋은 기억을 두 번 얘기하는 사내가 아니오.”
“응…… 그래…….”
“나는 그날 일부러 조금 떨어져서 달리고 있었소.”
“왜?”
“녀석들이 동료들의 뒤통수를 노릴 거라고 예견했으니까. 혼전 상황이 발생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내 소중한 친구들의 뒤통수를 노릴 것 같았소.”
“아아! 그래서?”
“내 예상은 적중했소! 귀주삼살 중 한 놈이 팽 소협의 뒤를 노리고 기습하려는 걸 봤소! 그 순간 질풍처럼 내달렸소! 내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칼날처럼 느껴졌다오! 어쩌면 그 순간 놈의 살기를 귀로 들은 건지도 모르겠소.”
“살, 살기를 귀로……?”
“쉿.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아니, 뭘 자꾸 쉿이래.
“나는 망설임 없이 일권을 내질렀다오! 아니, 망설임이 없었다는 건 거짓이오. 나는 망설였소. 과연 내가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인가? 이자가 비록 악인이라고는 하나, 생명체는 고귀한 것이 아니던가? 결국 나는 그자를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소. 그래서 급히 공력을 거뒀지만…….”
“지만……?”
“내 일격은 생각보다도 강했던 것이오. 나의 일격을 맞은 흉신악살이자, 귀주제일의 흑도이자, 천하가 증오하는 악인이자, 무림공적이자, 수라와 야차 같은 녀석이 그만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버렸소. 그자는 즉사하고 말았소.”
윤종승이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처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의 감각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소. 정말로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나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오.”
“그랬구나. 사람을 죽이면 어떤 기분일까? 아직 난 너무 낯설어.”
순간 윤종승이 진소홍 손을 덥석 잡았다.
“진 소저, 걱정 마시오. 내가 있는 한 진 소저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겠소. 나는 이미 피의 길로 들어선 몸. 이젠 악인을 처단하는 것만이 나의 사명이오. 사실 귀주삼살을 죽였을 때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따악!
순간 뒤통수에 불이 난 윤종승이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지랄도 풍년이다.”
남궁천이 손을 털면서 혀를 차자, 윤종승이 짐짓 억울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정말이야! 넌 그날 다른 곳에 있었잖아. 내가 정말로 악인을 처리하고 임무를 완수한 기쁨에…….”
따악!
윤종승의 뒤통수에 다시 한 번 불이 났다.
“끄읍!”
이번엔 팽수혁이었다.
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염병 꼴갑을 떨어요. 시체 흔들어대면서 일어나라고 질질 짜던 놈이 뭐? 임무를 완수한 기쁨? 아오, 내 손가락 발가락이 다 사라지겠다, 인마.”
“그, 그래도 내가 죽인 건 진짜잖아!”
윤종승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소리치자, 듣고만 있던 진소홍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만 있던 모용강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어디 잡범 몇 마리 잡은 걸로 온갖 호들갑을 다 떠는군.”
순간 팽수혁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어이, 지금 뭐라고 했어?”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언제부터 귀주삼살이 귀주 제일의 흑도인이 된 거지?”
“귀주 제일의 흑도라는 건 저 녀석의 허풍이지만, 강호인이라면 그놈들을 모를 사람이 없을 텐데. 굳이 딴지를 거는 건 열등감이냐?”
“열등감이라는 뜻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뭐?”
“열등감은 하등한 인간이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우러러보면서 느끼는 감정이지. 네가 날 보면서 느끼는 그런 거.”
“뭐, 이 새끼야?”
스르르릉!
순간 화를 참지 못한 팽수혁이 등에 메고 있던 대도를 뽑아 들자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했다.
모용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읊조렸다.
“강호에서 칼을 뽑았다는 건 목을 걸었다는 뜻이지.”
차아앙!
이윽고 모용강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맹렬하게 뒤엉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오냐, 이참에 확실히 어떤 놈이 하등한지 가려보자!”
파앗!
팽수혁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차며 날아갔다.
바로 그때.
짝짝짝!
문득 들려온 박수 소리에 팽수혁이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어느새 단상 위로 비량이 올라와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이야아, 역시 젊음이 좋아. 아침 댓바람부터 수련이라니. 뭐, 대련도 좋지만 우선 집중 좀 해볼까?”
“칫!”
팽수혁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비량이 생도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너희들에게 새 임무가 떨어졌다.”
“또 지목하는 겁니까?”
팽수혁이 손을 불쑥 들고 물었다.
그는 지난번 활약을 제대로 펼쳤던 만큼 이번에야말로 첫 번째로 지목이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에.
하지만 아쉽게도 비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너희들 모두 새 임무를 맡게 될 거야. 다 함께 가는 거지.”
“다 함께요?”
팽수혁이 눈살을 잔뜩 구기고는 모용강과 백무극 등을 돌아보았다.
웬만해선 함께 다니고 싶지 않은 생도들이었다.
그런 속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량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번엔 다 함께 움직인다. 즐겁겠지? 임무에 대해서는 호민각주님이 직접 말씀해 주실 거다.”
비량이 옆으로 물러나자 전각 안에서 호민각주 임태풍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임태풍은 하얗게 질려서 흡사 병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척거리며 단상 위로 오른 임태풍이 퀭한 눈으로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을 본 팽수혁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뭐야? 왜 저래? 어디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임태풍은 슬며시 배를 쓰다듬으면서 생도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그 검정 귀신은 왜 이놈들을 계림으로 보내라고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정예 조직을 보내라는 것도 아니고. 견습생들을 보내라니.
이 일에 대해서 맹주에게 알리고 상의를 해볼까도 했지만…….
‘괜히 목숨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지.’
자칫 검정 귀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간 해독제는 물 건너가리라.
지금도 자꾸만 구토가 치밀어 죽을 지경이다.
‘혹시 이 녀석들 중에 검정 귀신과 관련이 있는 녀석이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