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152화 (152/508)

151.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손우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남궁천이 슬쩍 물러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와서 시치미 떼봐야 너의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인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단지 주군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 염려가 되었을 뿐입니다.”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원래 비밀이라는 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하니까요.”

“그게 비밀이라는 건 어찌 알고?”

“그야 전후 사정을 따져 봤을 때 어림짐작으로 유추했을 뿐입니다.”

“감이 너무 좋은 것 아니냐? 설마 너 그럼 마단곡까지 유추한 거야?”

“예? 마단곡이요?”

손우곤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남궁천은 곧 후회했다.

‘아, 젠장. 거기까진 아니었구나.’

잠깐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이던 손우곤이 튕기듯 물러나더니 대경실색해서 외쳤다.

“설, 설마…… 마단곡의 위치를 알고 계…… 읍! 읍읍!”

어느새 날아와 손우곤의 입을 틀어막은 남궁천이 조용히 뇌까렸다.

“조용히 안 하면 너부터 삶아 먹는다.”

“헉, 죄송합니다!”

손우곤이 얼른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사죄했다.

남궁천이 손을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경계가 너무 무너졌어. 이렇게 나태해지면 안 되는데.”

“에이. 저희들은 흐흐. 믿으셔도 된다니까요. 흐흐흐. 마단곡…… 으흐흐.”

손우곤이 자꾸만 삐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자,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아까랑 웃음의 의미가 다르다?”

“그럴 리가요. 흐흐흐. 그래서 위치는 파악하신 겁니까? 으흐흐.”

이 사악한 놈 보소.

두 눈알에 마단곡이 가득 찼네, 가득 찼어.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럼 그 장소를 아는 자가 지금 주군뿐입니까?”

“내가 알기론 그래. 하지만 누군가 또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지. 문제는 거길 어떻게 가느냐인데…….”

“흐음. 귀왕채나 불명회에 맡기는 건 어떻습니까?”

“그놈들을 어떻게 믿고?”

“그럼 본 대가…… 흐흐흐.”

“지금으로선 네가 제일 위험해 보인다.”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죠. 저는 그저 주군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서…… 흐흐흐.”

“됐고. 말했지? 내 신조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라고. 일단 불명회주를 만나 봐야겠어.”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우곤이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따라오지 마!”

“주군 가는 곳이 곧 저희의 길입니다.”

“그럼 안 보이는 곳으로.”

“존명!”

손우곤이 경쾌하게 대답하고는 귀신처럼 사라졌다.

남궁천이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건 아닌지, 원…….’

* * *

“그러잖아도 주군을 막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불명회주 흑선이 손수 남궁천의 찻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남궁천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무슨 일로?”

“지난번에 맡기신 일 때문이지요.”

“지난번……? 아, 광승회주 감시 말인가?”

“예, 광승회주 혜광을 감시하다가 접선자로 파악되는 인물을 찾았거든요.”

“오, 그래? 누구지?”

“일단은 배후 세력까지 접근한 것은 아닙니다. 워낙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서 아직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녀석이 먼저 그 색광에게 접근했단 말이지?”

“예, 현재는 인근 운몽현에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부상인가?”

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보부상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짜 신분은 모르고?”

“죄송합니다. 아직 거기까진. 저희가 무림맹에 대한 정보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됐어. 그만하면 충분해. 일단 운몽현으로 가봐야겠군.”

“직접 가시려고요?”

“그게 제일 확실하지. 나란 남자,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지.”

“견습 생도들의 휴식 기간이 이제 나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요?”

“나흘이면 충분해.”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흑선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따로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있었는데 일단 보류. 내 예상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번 일과 같이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주군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어째 말하는 게 너무 예쁘다? 너도 콩고물 노리는 거냐?”

“예?”

흑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님 말고.”

* * *

남궁천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서 운몽현으로 내달렸다. 신분을 그대로 노출할 수는 없었기에 얼굴에는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일전에 진소홍이 구해준 그 인피면구였다.

최대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관도를 이용하는 대신 오로지 직선거리로만 달렸는데, 이는 전생의 버릇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아침 바람을 맞으면서 길이 아닌 곳을 내달리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이 오십 줄이 넘어서도 강산을 넘나들며 날아다녔으니 끝까지 도망쳐서 버틴 자신도, 줄기차게 쫓아온 무림맹 놈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씩 이렇게 내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네.’

달리는 거라면 이골이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몸은 의외로 상쾌함을 느끼고 있다.

콧노래도 절로 나온다.

전생에도 매일같이 달려야만 하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남궁천. 이 세상 끝까지, 까지. 달려라, 남궁천.

물론 그땐 이름이 달랐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한참을 새처럼 내달렸더니 정오가 조금 지날 무렵 운몽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용모파기를 한 번 확인한 후 저잣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니 역시나 용모파기와 흡사한 인물이 좌판을 깔아놓고 호객하는 모습이 보였다.

‘잡았다, 요놈.’

남궁천은 곧바로 맞은편 객잔으로 들어가서 보부상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소홍주 한 병하고, 동파육 한 접시.”

“예, 잠시만 기다리십쇼!”

점소이가 유쾌하게 대꾸하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남궁천은 작은 종이와 붓을 꺼내고는 보부상에 대해 깨알 같은 글씨로 적기 시작했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한 번쯤 꼭 해보고 싶었다.

도망자 시절 객잔에서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꼭 이렇게 자신을 훔쳐보며 뭔가를 적는 놈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모른 척하고, 어떤 날은 잡아 족치고, 어떤 날은 따돌리기도 했다.

‘저놈은 내가 염탐하는 걸 알고 있으려나?’

아마 모를 것이다.

자신이 그걸 알아챌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무림공적 제일호의 위엄 같은 것이랄까?

어쨌거나 지금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역할.

세상일이라는 게 이렇게 알 수 없는 거다.

이걸 바로 역지사지라고 하는 거지.

입장 바꿔서 적어보기.

아니면 말고.

음식이 나온 후에도 남궁천은 계속 보부상을 관찰했다.

좌판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는데, 시시한 아이들 장난감도 있었고, 여인네들의 노리개, 무인들이 사용할 암기나 비수, 검파에 매다는 수실 등이 보였다.

남궁천이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었다.

좌판에 물건 많음. 그런데 주제가 없음.

얼굴은 평범하게 생김. 무공은 전혀 익히지 않았음.

그렇게 한참이 지나니 여인 둘이 다가와 노리개를 들고 깔깔거리다가 자리를 떠났다.

여인 두 명, 일각 넘게 노리개 구경만 하다가 감.

보부상이 뒤통수에 대고 쌍욕 함.

‘확실히 재미있네.’

남을 몰래 관찰하는 재미란.

이렇게 변태가 되는 건가?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털보 사내가 다가오더니 좌판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머리 장신구를 구입해 갔다.

털보 머리 장신구 구입.

혹시 남색?

이후에는 키가 작달막한 꼬마가 나타나더니 한 식경 넘게 이것저것 만지면서 구경만 하다가 떠났다.

꼬마가 약 올리듯 한 식경 동안 물건을 살 것처럼 기웃거림. 결국 안 사고 가버림. 내가 다 열받음.

보부상이 쌍욕을 퍼부음. 그 심정 이해 감.

“저어…… 손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점소이가 손을 비비며 어색하게 웃는다.

“언제까지 계실 건지요? 이제 곧 저녁 준비도 해야 해서.”

그러고 보니 꽤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남궁천이 은자 하나를 툭 내놓고는 말했다.

“저 보부상이 자리를 뜰 때까지 있을 거야.”

“예?”

“왜? 염탐하는 놈 처음 봐?”

아니, 본 적도 없지만, 보통 자기가 염탐한다고 이렇게 떠벌리나?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남궁천이 은자 한 냥을 더 올리고는 말했다.

“소홍주 한 병 더. 그리고 두반장 한 접시. 잔돈은 가져라.”

“어이쿠, 알겠습니다요! 그럼 염탐 잘 하십쇼!”

“새끼야,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들키잖아.”

아니, 먼저 말을 뱉은 놈이 누군데?

하나 은자 한 냥을 그저 던져준 손님에게 속내를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

점소이가 얼른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 예. 그럼 얼른 요리 내오겠습니다요!”

점소이가 달려간 후로 남궁천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보부상과 남궁천의 눈이 딱 마주쳤다.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남궁천은 보부상이 자신을 의식했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보부상이 얼른 시선을 돌리고는 태연하게 호객행위를 시작한다.

“자, 자. 없어서 못 사는 물건들만 가져왔습니다. 보고들 가세요.”

남궁천이 재빨리 종이에 글씨를 적었다.

보부상과 눈 마주침. 눈빛이 싸가지 없음. 나쁜 놈이 확실함.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보부상이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털보 사내가 다시 나타났다.

머리 장신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서로 삿대질까지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한참이 지나서 남궁천은 다시 종이에 적었다.

털보 승. 환불받음.

보부상 개털 됨. 하루 동안 판 게 없음.

마침내 보부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시렁거리며 욕지거리를 뱉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남궁천도 소홍주 한 잔을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부상은 봇짐을 멘 채 저잣거리를 가로질러 홍등가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남궁천은 그런 보부상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꾸준히 뒤를 밟았다. 주변에서는 헐벗은 여인들이 뱀처럼 흐물거리며 달려들었다.

“오라버니, 놀다 가요.”

“나, 아직 생도인데.”

“생도는 남자 아닌가?”

“남자는 남자지.”

“응. 잘해 드릴게.”

하지만 지금은 바쁘다.

저 보부상의 뒤를 밟아야 하니까.

그렇게 몸 파는 기녀들을 헤집고 가다 보니 어느 순간 싸늘한 감각이 옆구리에 와 닿는다.

“돌아보지 말고 걷기나 해.”

귓가에 닿는 서늘한 목소리.

어차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털보다.

보부상한테 장신구 환불받은 그 쪼잔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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