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그, 그렇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네가 귀주성 도지휘사의 집을 털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마단곡의 지도를 확인했다는 거잖아.”
“그, 그렇습니다. 금고에 보관된 지도였으니 당연히 꽤 중요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훔쳤습지요. 그런데 그게 마단곡 지도였습니다.”
“이해가 안 되네.”
“뭐, 뭐가 말입니까요?”
“마단곡 지도가 왜 도지휘사한테 있는 거지?”
도지휘사라면 정이품에 해당하는 고위직 벼슬이다. 한마디로 귀주성 일대를 관할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관무불가침 관례를 무시하고 관아가 무림의 일에 개입하기로 한 건가? 아니면 우연히 그 지도만 입수하게 된 걸까?
게다가 마단곡이 어딘가?
마교가 수집하거나 만든 영단을 차곡차곡 모아둔 보고(寶庫)다.
원래는 마교 총타에 있던 것을 패망할 즈음에 마교주가 자신만 아는 곳으로 옮겨두었다고 한다.
마교가 멸망한 이후 그 마단곡을 찾기 위해서 전 강호인들이 얼마나 살육전을 벌였던가?
하지만 결국 마단곡의 위치는 드러나지 않았다.
한데 그 지도가 귀주성 도지휘사 방에서 나왔다니.
남궁천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도절귀가 나름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그, 그건 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 도지휘사에게 뇌물로 바쳤거나, 우연히 습득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흐음. 개연성이 떨어지는데…….”
“세상엔 우연히 벌어지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리고 이 경우 한 가지는 납득이 되지요.”
“납득이 되는 한 가지라면?”
“그간 마단곡의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것 말입니다. 도지휘사가 그 지도를 보관하고 있었으니 무인들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찾아낼 수 없었던 거겠지요.”
그건 좀 말이 되는 것 같다.
무림에서도 마단곡 지도를 도지휘사가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은 일절 하지 못할 테니까.
“좋아, 넘어가고. 그런데 그 마단곡 지도가 지금은 없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네가 분명히 훔쳤는데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
도절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따악!
“큭!”
순간 남궁천이 도절귀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눈알을 부라렸다.
“야이, 새끼야.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이게 누굴 물로 봐?”
퍽! 따악! 철썩! 퍽! 퍽퍽!
“윽! 큭! 아악! 진, 진짜라고요! 아악!”
“이 새끼 맷집 보소. 그래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딱! 퍽! 따악……!
“으윽! 진짜라니까, 이 X발 놈아!”
급기야 도절귀가 욕지거리까지 뱉어내며 발작하자, 남궁천이 손찌검을 멈추고는 노려보았다.
도절귀가 움찔거리고는 자라목이 되어서는 말한다.
“진짜라고요! 진짜요!”
“진짜야?”
“그렇다니까요! 지도가 있어 봐야 어차피 그걸 노릴 놈들에게 시달릴 게 뻔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모조리 암기하고 불에 태워 버렸단 말입니다.”
“아니,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해야지. 그냥 없다고 하니까 어디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잖아.”
“거짓말은 아니잖아욧! 진짜 없으니까 없다고 한 건데!”
따악!
“아윽! 왜 또 때려요!”
“이 새끼가 어디서 큰소리야? 그리고 너 아까 나한테 욕했잖아, 새끼야.”
“그건……!”
발끈하던 도절귀가 남궁천의 냉랭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금세 주눅이 들어 말을 얼버무렸다.
젠장할 놈! 한참이나 어린 새끼가 꼬박꼬박 반말하면서 욕지거리를 뱉는 건 어떻고?
하나 도절귀는 더 이상 남궁천에게 대항할 생각이 없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을 더 갉아 봐야 득 될 게 없었기에.
게다가 남궁천은 거짓말을 귀신처럼 알아챘다. 문제는 사실을 말해도 거짓말로 오인할 때가 있다는 거지만.
“아무튼 지도는 없다고요.”
“흐음. 대신 확실히 외웠단 말이지?”
“예.”
“네 대가리를 어떻게 믿고?”
“이래 봬도 도둑질 경력만 사십 년입니다.”
“너 몇 살인데?”
“마흔셋입니다.”
“이 새끼, 이거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휙!
남궁천이 다시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화들짝 놀란 도절귀가 반사적으로 팔을 들면서 소리쳤다.
“헛! 진짜라니까! 세 살 때 저잣거리에서 만두 훔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요!”
“자랑이다, 새끼야!”
따악!
“크윽! 이런 씹…….”
“씹……?”
“씹…… 십 년…… 만 더하면 도신의 경지에 오를 텐데…… 하고 생각 중입니다.”
따악!
“언변 순발력 보소.”
으이씨, 뭘 해도 때리네, 이 개새끼!
정말이지 욕지거리뿐만 아니라 더 심한 말도 치밀어 오르는 도절귀였다.
하나 성질대로 했다간 제명에 죽지 못하리라.
결국 도절귀가 체념하는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도둑질로 사십 년 경력을 쌓으려면 지리에 빠삭해야지요. 한 번 가본 길은 웬만하면 잊지도 않고, 한 번 펼친 도면은 반의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다 욀 수 있습니다.”
“호오. 황궁도 드나들 놈일세.”
“황궁도 구조는 빠삭합니다. 다만 목숨은 하나뿐이니 들어가질 않을 뿐이죠. 헤헤.”
따악!
“처웃지 말고. 그려봐.”
남궁천이 바닥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뒤통수를 문지른 도절귀가 내심 이를 갈았다.
빌어처먹을 놈. 맡겨놨다는 듯이 말하네.
하나 어쩌겠나? 공진철에 묶인 자신은 지금 공력조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인데. 우선은 시키는 대로 한 후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알지? 개수작질하면 바로 맴매야.”
“끄응. 그, 그럼…….”
절그럭…… 절그럭……!
도절귀가 공진철을 질질 끌면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 단순한 선에서 시작한 그림이 점점 모양을 갖춰갔다.
슥…… 스윽.
남궁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도절귀의 체내에 흐르는 공력을 자세히 살폈다.
공진철에 구속된 도절귀의 공력은 무척이나 예민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가 거짓말을 할 때면 순조롭게 순환하던 공력도 요동을 치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남궁천은 도절귀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었던 것.
따악!
“아얏! 왜, 왜요!”
“수작질하면 맴매라니까.”
남궁천이 눈알을 부라리자, 움찔거린 도절귀가 헤실헤실 웃는다.
“이런 제가 잠깐 착각을 했네요. 하하. 이 길이 아니라, 여기였지.”
“또 장난치면 죽는다. 말했지? 나한테 거짓말 탐지기가 있다.”
니미럴, 귀신같은 새끼. 어떻게 다 알아채는 거지?
도절귀가 바닥을 슥슥 문지르고는 다시 지도를 그렸다.
도절귀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짓말 탐지기인지 지랄인지는 몰라도, 정말 남궁천이 독심술을 쓰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바닥에 선을 그어가던 도절귀가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는 말했다.
“다 그렸습니다요.”
남궁천이 횃불을 내밀어 도절귀가 그린 지도를 비춰보았다.
과연 정교한 지도였다.
‘이건…… 진짜 지도군.’
전 중원을 제집 안마당처럼 누비며 도망 다니던 남궁천이다. 중원 곳곳 가보지 않은 곳은 없다.
게다가 이 정도로 정교한 지도라면 분명 실존하는 것이리라. 공력의 흐름도 무난했으니 거짓은 아니리라.
하나…….
“이게 마단곡 지도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가봤나?”
“그, 그건…….”
따악!
“크윽!”
뒤통수를 얻어맞은 도절귀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남궁천이 손을 털며 말했다.
“가봤네, 가봤어. 이 새끼 다 빼돌린 거 아냐?”
“끄으. 아닙니다. 빼돌리기에는 너무…….”
“너무?”
“……많은 양이라고 들었습니다.”
“으흐흐흥. 그으래?”
모처럼 남궁천이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냥……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놈들을 물색 중이었는데…….”
“잡힌 거냐?”
“예.”
“재수도 없지. 쯧쯧.”
남궁천이 혀를 차자, 도절귀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개 같은 놈아, 널 만난 게 내 인생에서 제일 재수 없는 일이다!
그런 속내를 삼키고는 애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제 살려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살려는 드려야지.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남겼는데.”
“감사합니다.”
“어차피 네가 죽으면 내 첫 견습 생활에서 흠집이 생기기도 하고.”
“아…….”
“그 전에 한 가지 확인은 해야겠다.”
“뭘 말이오?”
“네놈이 정말 영단을 하나도 복용하지 않았는지.”
“정말이오! 그걸 먹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소?”
“하긴. 그건 그렇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확인해 보자.”
남궁천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도절귀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척 올렸다.
도절귀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왜 확인을 이런 식으로……?”
“너 그간 훔친 애새끼들만 몇 명이냐?”
“그건 왜 물어보시오? 한…… 열 명 정도 되려나?”
“됐다. 충분해.”
“뭐가…….”
“벌 받을 이유.”
“커헉!”
순간 도절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남궁천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내린 웅혼한 기운이 도절귀의 정수리를 통해서 사정없이 침투해 들어갔다.
이내 도절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허옇게 뒤집어갔다. 뒤이어 코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끄으으어! 으어아아아악!”
도절귀의 비명이 동굴 가득 처절하게 울렸다.
남궁천이 무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려는 드리지. 그런데 다른 곳에서도 이걸 떠벌리면 의미가 없어지잖아?”
* * *
회상을 마친 남궁천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흐음. 그렇게 똥멍청이를 만들었으니, 하나는 해결된 셈인데…….”
“누가 똥멍청인데요?”
“으허억! 어우씨, 깜짝이야! 뭐야? 너!”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주군.”
바로 곁에서 묻던 창응대주 손우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모양이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해 무엇하랴.
전생에는 발밑으로 지나가는 개미 새끼조차 신경 쓰던 자신이 아니던가?
한데 손우곤이 바로 곁으로 다가올 때까지 의식을 못하다니.
“너무 나태해졌어. 젠장. 이렇게나 방심하다니.”
그러자 손우곤이 조금은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주군, 저희들한테는 방심하셔도 됩니다.”
“아서라. 세상에 믿을 새끼 하나 없다는 게 내 평생의 신조다.”
“그러시기엔 지금…… 너무 무방비시던데요?”
“시끄러워.”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시선을 외면하자, 손우곤이 빙그레 웃었다.
‘주군, 저희들 앞에선 언제든 무방비이셔도 됩니다. 목숨을 걸고 저희들이 지켜 드릴 겁니다.’
생각을 거둔 손우곤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물었다.
“한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신 겁니까? 제가 옆에 온 줄도 모를 정도로. 혹시 고민 있으신지요?”
“아냐.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흐음. 그럼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혹시 도절귀를 바보로 만든 사람이 주군이십니까?”
내심 뜨끔한 남궁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으응? 아닌데? 즈으언혀 아닌데?”
너무 티 나잖아요!
손우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뭘 알아내신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봐, 이봐!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그새 내 걸 노려?”
“예? 주군 거요? 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