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기습인 듯 기습 아닌 기습 같은
“대, 대주님. 저거 정말 금왕의 명패입니까?”
“그, 그런 것 같다.”
손우곤도 놀라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천의 품에서 금왕의 명패가 나올 줄이야.
사람들이 연신 술렁이는데, 혜광이 옆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금각사(金覺師)!”
“예, 회주 스님.”
허리가 구부정한 노스님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자, 혜광이 남궁천의 명폐를 노려보며 일렀다.
“가서 확인해 주시겠소?”
“알겠습니다.”
금각사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잠시 실례를.”
금각사가 남궁천의 손에 들린 것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져가서 보시든지.”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휙 던져주자, 금각사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받아들었다.
금각사는 남궁천이 던져 준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목을 벨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이다.
금왕의 명패를 들고 한 걸음만 물러나도 날붙이가 목을 베고 지나가리라.
‘으음……!’
한참을 이리저리 살피던 금각사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잘, 잘 보았소.”
금각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궁천에게 명패를 건네주었다.
남궁천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고는 다시 품에 갈무리했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금각사가 혜광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금왕의 명패가 틀림없습니다.”
“……!”
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혜광이 눈자위를 파르르 떨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이제 보니 소승이 귀한 손님을 몰라봤군. 어린 시주께서는 말의 무게를 잘 아실 테지?”
“그딴 건 모르겠지만 한 입으로 두 말 하진 않는다.”
“좋구나, 좋아.”
혜광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내 불도가 이제야 하늘에 닿았구나.’
오늘에서야 부처님의 은혜를 받게되다니.
그는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남궁천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면 시주께서는 비무 날짜를 언제로 정하시겠는가?”
“뭘 언제로 정해?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지금 하자고.”
“지금?”
“그래, 지금.”
“허허!”
“왜? 쫄았어?”
“그럴 리가. 소승은 어린 시주의 패기에 감동했을 뿐이라네.”
“그럼 잘됐네. 오랜만에 옛 생각 떠오르게 해줄게. 색광아.”
이 어린놈의 새끼가…… 아까부터 계속……!
‘아니다, 참자. 저 아이는 부처님이 보내주신 은혜다.’
혜광이 치미는 분을 다스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네. 하면 이곳의 모두가 증인이 되겠군.”
“그렇지. 다들 들었지? 오늘 내가 색광을 이기면 광승회는 이현을 떠나고 상권은 다시 남궁세가가 되찾는다!”
“옛, 주군!”
“어린 시주, 졌을 때도 공표해야 하지 않겠나?”
“필요 없어.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건방진…….
하나 혜광은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은근한 공력을 담아 소리쳤다.
“소승이 이기게 되면 여기 어린 시주가 아무 조건 없이 본 회에 천만 냥을 시주하겠다고 했소!”
“확인했습니다, 회주 스님!”
승려들이 한목소리로 대꾸한다.
창응대와 승려들뿐만이 아니다.
정문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 소리를 모두 들었다.
남궁천이 그런 사람들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훌쩍 날렸다.
파바밧!
그가 순식간에 담벼락 위로 올라서자, 혜광이 움찔거리고 소리쳤다.
“무슨 짓인가? 설마 비무를 약속해놓고 이대로 달아날 생각인가?”
“그럴 리가. 이왕이면 모두가 잘 볼 수 있도록 담벼락 위에서 한 판 붙자는 거지. 담벼락을 비무대로 삼아서 떨어져도 실격, 패배를 인정하거나 뒈져도 실격. 어때?”
“허허허, 좋네. 좋아. 그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지.”
혜광은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오래전, 진천랑에게 당했던 앙금을 그 자식 놈에게 풀 수 있는 데다, 천만 냥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콧노래가 절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휘리릭!
순식간에 몸을 날려 담벼락 위로 올라선 혜광이 천천히 철택채를 앞으로 내밀고 철탁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후우우웅!
한 차례 격한 바람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공력이 운기되면서 승복이 펄럭인 것이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면서 벽라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살이 뒤룩뒤룩 쪄서 둔해진 줄 알았더니, 그사이 무공은 좀 발전한 모양이구나.”
“시주의 아비가 무슨 말을 전했는지 모르겠으나, 과거의 소승이 아니라네.”
“그래, 그래. 그 생글거리는 얼굴부터 과거로 돌려놔야겠다. 영 적응이 안 돼서 말이야.”
“재미있는 시주로고.”
“원래 내가 한 재미 해.”
“하나 이젠 그 입을 쉬이 놀리기 어려울 터!”
파앙!
순간 혜광이 담벼락을 차면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우오오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터뜨렸다.
출렁거리는 뱃살을 가진 노스님으로만 보이는데도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이 아닌가?
쒸에에엣!
철탁채가 직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순간 남궁천이 담벼락을 툭 찍어 차면서 소리쳤다.
“창응대는 잘 보아라!”
“예, 주군!”
창응대원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혜광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 잘 지켜볼 것도 없네. 아차피 소승이 시주를 이길 테니까!”
쑤아아앙!
콰장!
철탁채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담벼락 일부분이 부서졌다.
간발의 차이로 철탁채를 피한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어딜!”
쩌어엉!
검봉과 철탁이 부딪치면서 마찰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크읏!”
“우악!”
근처에서 구경하던 양민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다.
창응대원들과 승려들은 공력을 끌어 올려 고막을 보호했다.
“더럽게 시끄럽네.”
남궁천이 투덜거리자, 혜광이 씨익 웃는다.
“소승이 지닌 철탁의 특징이라네. 공력을 담으면 더 큰 소리도 울리는데 어디 한 번 들어보실 텐가?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마음을 정양하기에 좋을 걸세.”
부우우웅!
철탁이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며 쇄도한다.
남궁천이 다시 바닥을 찍어 차며 물러났다.
부우웅, 부우웅!
파바밧! 타닷!
남궁천이 연이어 물러나자, 혜광이 혀를 찼다.
“쯧, 어디까지 피하기만 할 텐가? 담벼락도 한정이 있는데.”
“글쎄. 뭔 땡중들이 이렇게 넓은 곳에 사는지. 담벼락만 타고 돌아도 한나절 걸리겠어.”
“수양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네. 수양을 하면 결코 먼 거리가 아니지.”
부우우웅!
다시 수직으로 떨어지는 철탁!
그 순간 남궁천이 몸을 낮게 숙이며 혜광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혜광이 얼른 뒷걸음질을 치며 빠르게 물러났다.
‘가소로운!’
쩌어어어어엉!
다시 한번 철탁과 검봉이 부딪치면서 고막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굉음이 일어났다.
“크읏!”
신음을 먼저 터뜨린 것은 뜻밖에도 혜광.
그는 골이 띵하게 울려오는 통증을 느끼면서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철탁의 울림에는 내성이 생겼을 터다.
지금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수행을 했던가?
대살성보다도 지독한 스승을 늦은 나이에 만나서 몸이 부서져라 수양했다. 마침내는 철탁의 공명음을 받아낼 수 있는 신체를 만들었다.
한데 어째서!
혜광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사이 다시 벽라검이 횡으로 베어져 들어왔다.
이번에는 철탁채를 거꾸로 세우며 막았다.
따따아앙!
공교롭게도 철탁채가 검신과 부딪치더니 그대로 튕기면서 철탁을 때렸다. 그 울림에 온몸이 진동하는 듯하다.
“크으윽!”
한 줄기 뇌력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면서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는 것만 같다.
사실 이는 단순한 원리였다.
혜광의 기운이 금계라는 것을 확인한 남궁천이 상극을 이루는 화계의 공력으로 맞선 것이다.
쇠처럼 단단한 공력을 한 줄기 화계의 기운으로 녹여 버리며 침투하니 당황할 수밖에.
물론, 단지 상극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만으로 이만한 효과를 거두기란 어렵다.
정확한 때를 맞춰서 적절한 수준의 공력은 운기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만, 초견파공안을 지닌 남궁천에게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을 뿐.
‘뭐, 뭐야? 이게!’
혜광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오른발을 뒤로 빼며 균형을 되찾았다.
콰드드득!
담벼락 상단부가 일부 무너지면서 혜광이 가까스로 멈춰 섰다.
“이이이익!”
약이 바짝 오른 혜광이 다시 한번 쏘아지듯 날아갔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름답지 않군.’
혜광의 단전에서 검은색 기운이 솟구쳐 올라오더니 양손에 들린 철탁과 철탁채로 이어진다.
확실히 오색찬란한 빛깔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춤을 추던 풍경과는 다르다.
우우우웅!
마침 철탁이 공명하면서 미묘한 소리를 울린다.
부우우웅!
철탁이 어둠을 가르고,
휘이이익!
철탁채가 밤공기를 찢는다.
하나 남궁천의 옷깃만은 스치지도 못한다.
혜광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째서……! 어째서 이놈에게서 그놈이 느껴지는 거냐!’
부자지간이니 당연한 걸까?
혜광은 남궁천에게서 진천랑을 보았다.
더럽게 빨랐던 대살성의 그 얼굴이 남궁천과 묘하게 겹친다.
파바밧! 파밧!
‘똑같다. 그놈과! 마치 그놈과 싸우는 것처럼 똑같다!’
점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마침 벽라검이 다시 가슴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역시 똑같잖아!’
더 환장하겠는 건, 똑같은 걸 아는데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남궁천은 자신이 어찌 움직일지 다 알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치잇!’
철탁을 끌어당겨 막으려던 혜광은 일순 멈칫거렸다.
철탁의 공명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기에.
‘허어!’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본디 철탁의 공명음은 방어와 동시에 음공(音功)의 효과로 역공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한데 그 음공이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다니!
결국 방어를 포기하고 회피하려던 혜광은 왼쪽 어깨를 찔리고 말았다.
푸욱!
“크으윽!”
비명을 터뜨린 혜광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허억, 허억……!”
혜광이 거친 숨을 몰아쉬자, 남궁천이 싸늘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그러게 침대에서 뒹굴지만 말고 운동을 좀 하지 그랬어?”
“……!”
똑같다. 저 말투와 표정!
거기에 저 말은 과거 대살성이 자신에게 한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지 않은가?
“누구냐, 너!”
“남궁천이라니까. 벌써 노망난 거야?”
“크익! 이노오오옴!”
혜광이 분노를 터뜨리며 곧장 달려나갔다.
파바바밧!
어찌나 힘을 실었는지, 발끝마다 담벼락이 부서져 나간다.
남궁천이 뒤로 물러나다가 찌르고 베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의 공방이 치열하게 오간다.
둘의 싸움을 한참 바라보던 차무진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가 손우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대주님. 설마 저거……?”
“나도 보고 있다.”
“맞죠? 그거?”
차무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손우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틀림없다. 주군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창궁무애검진(蒼穹無涯劍陣)의 움직임에 대해 알려주고 계신 거다.”
“……!”
차무진은 물론 다른 창응대원들이 저마다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단순히 싸우는 중인 줄 알았는데, 창궁무애검진에 대해 알려주는 중이라고?
“아…… 그래서 일부러 담벼락으로?”
“아마도.”
창궁무애검진의 기본이 직선의 움직임이다.
직선에서 보법이 흐트러지면 검진 전체가 무너지게 마련이다.
지금 남궁천은 그 움직임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차무진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주군은…… 인간이긴 한 겁니까? 어찌 저 젊은 나이에?”
“나도 궁금한 걸 나한테 묻지 마. 다만 괴물인 건 확실해.”
그러면서도 손우곤은 안면 가득 벅찬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암! 괴물이자, 잠룡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