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기습인 듯 기습 아닌 기습 같은
남궁천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승려들을 보며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도 감탄했다.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수십 명이 공력을 한껏 끌어 올려 달려들 때면 늘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비아냥거리거나 비꼬는 게 아니다.
실제로 남궁천의 눈에는 이들의 현란한 움직임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수십 명의 단전에서 일어나는 형형색색의 공력 줄기가 각자의 혈맥을 따라 빠르게 흘러가다가 남궁천에게로 쏟아진다.
마치 오색찬란한 빛줄기가 남궁천에게 빨려들며 흡수되는 듯한 착각마저 일어난다.
이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지상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은데.
뻗어오는 빛을 검신으로 튕겨내고, 그 사이를 파고들어, 단숨에 갈라 버린다.
촤아아악!
종국에는 붉은 핏줄기가 시린 달빛에 젖으며 사방으로 비산하게 된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전생에서도 수많은 적들을 상대하며 이 오묘한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진즉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많은 인간들에게 공적으로 몰려 죽을 위기를 넘나들던 순간들.
그 와중에도 이런 아름다운 빛깔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버틸 만한 삶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만 볼 수 있는 이 광경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일지도?
그렇다면 나는 정녕 미친 건가? 정상인 건가?
‘아무렴 어때?’
즐기면 그만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누가 제일 처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은 천재가 분명하리라.
촤촤아악! 촤악!
은빛 빛줄기가 형형색색의 빛줄기를 섬뜩하게 가를 때마다 붉은 핏물이 마구 터져 오른다.
그럼에도 남궁천의 장삼에는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 역시 습관이다.
상대와 부딪치거나 마찰하는 일을 최대한 없앤다.
그것이 도망자가 익혀야 할 싸움 방식이다.
불필요한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
하여, 여차하면 그 틈바구니로 바람처럼 달아나는 것.
도망자의 덕목이자 자질.
그러다 보니 수천 명에게 둘러싸여 검을 휘두를 때가 아니면 남궁천은 늘 바람처럼 움직였다.
바람에 핏방울이 묻을 수는 없는 법.
파바밧! 촤아악! 깡! 쉬이익, 푹!
남궁천은 도취되어 갔다.
오랜만에 수십 명을 상대하며 살풀이를 하다 보니 그동안 신경 쓰이던 것들이 하나둘 잘려 나가는 기분이다.
한동안 잊었던 짜릿한 감각이 검신을 타고 손끝에 전해진다.
그래 봐야 살기일진대 저 오색찬란한 빛을 빨아들이는 남자라니.
저 아름다운 빛깔 사이를 누비며 검무를 추는 나란 남자!
남궁선이 뻑 가지 않을 수 없는 남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장 아름답게 누비는 남자!
‘역시 나는 자아도취할 자격이 충분하다!’
파바바밧! 촤아아악!
“끄아아악!”
오른팔이 아예 잘려 나간 승려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퍼억!
남궁천의 발길질을 얻어맞은 승려가 그대로 튕기듯 날아가면서 구석에 처박혔다.
“고함만 내지르는 건 아름답지 않다.”
남궁천의 싸늘한 목소리를 끝으로 수십 명의 승려들이 더 이상은 달려들지 않고 머뭇거렸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데 일순 거짓말처럼 조용해지거나,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세상이 정지하는 순간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승려들이 일순간 멈춰 버렸고, 남궁천을 따라 살풀이를 하던 창응대원들도 잠시 거리를 두고 호흡을 골랐다.
두 세력의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남궁천이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 다시고는 물었다.
“다친 놈들 없냐?”
“네 명 있습니다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손우곤이 얼른 다가와 말했다.
“얼마나 다쳤어?”
“가벼운 자상입니다.”
손우곤의 말대로 창응대원들 대다수는 멀쩡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다수의 승려들이 미쳐 날뛰는 남궁천에게 집중적으로 달려들었으니까.
다만 그래도 날붙이를 들고 싸우는 상황이니 부상자가 아예 없을 수는 없는 법.
그래도 이만하면 압도적인 싸움이라 할 만했다.
기습인 듯 기습 아닌, 기습 같은 공격이었지만.
어쨌든 대성공.
촤아아악!
남궁천이 검신을 휘둘러 벽라검에 묻은 피를 한 차례 뿌리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이, 불나방들. 뭐 해? 안 오고. 내가 갈까?”
남궁천이 성큼 내딛자, 승려들이 우르르 물러나면서 경계했다.
“어어……? 멈, 멈춰라!”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안 오면 내가 가고.”
“멈추라니까!”
승려들이 다시 두 손을 들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에 눈에 익은 자가 승려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눈이 가느다랗게 찢어진 사내. 파각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또 보네. 반가워.”
“지금 인사나 나눌 상황은 아닌 것 같소만?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요?”
“정말 몰라서 물어? 너희들이 협상을 안 하면 전쟁한다고 했잖아.”
“협상 기한은 내일까지였잖소!”
“아, 맞다. 그랬지.”
파각이 멍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아, 맞다?
아, 맞다라니!
지금 야밤에 기습전을 펼쳐놓고 그게 할 소린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어차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뭐요? 애초에 협상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단 소리군!”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아니, 뭐 이런……!”
“그런데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
“솔직히 너희들 내일까지 오만 냥에 상권을 넘기려고 했어? 그냥 미친개가 짖는다며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어?”
‘그걸 아는 놈이 오만 냥을 제시한 거냐?’
파각이 이를 빠득 가는데, 남궁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협상은 물 건너갔을 테니 먼저 쳐들어왔다. 순서만 바뀌었을 뿐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거야. 그러니 너무 황당해하지 말도록.”
“뭔 개 같은 논리를……!”
그때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전각 뒤쪽에서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곧이어 파각 뒤로 도열했던 승려들이 좌우로 물살 갈라지듯 물러났다.
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나이 지긋한 사내.
승복을 대충 걸쳐 입었는데, 목덜미와 가슴 언저리에는 여인들의 색조 화장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광승회주 혜광이었다.
그의 곁에는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진 괴불자가 따르고 있었는데, 낮에 무슨 짓을 어떻게 당한 것인지 안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파각이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회주 스님 나오셨습니까?”
“대체 무슨 소란이오?”
그러자 옆에 있던 괴불자가 부어오른 눈을 부릅뜨며 남궁천을 가리켰다.
“저, 저놈……! 저놈이 남궁천입니다!”
“남궁천?”
혜광이 남궁천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천이 먼저 괴불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너 낮에 본 땡중 아니냐?”
“이노오옴! 감히 신성한 광승회 장원까지 찾아와 이게 무슨……!”
“어디서 그렇게 처맞은 거야?”
처맞긴 뭘 처맞아! 이 미친놈아!
괴불자가 약이 바짝 올라 숨을 삼키는데, 혜광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오시오. 남궁세가에서 오셨다고? 한데 초면에 인사가 좀 격하구려.”
그가 인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승려들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지어 팔다리가 잘려 나간 승려들도 꽤 보인다.
‘소문이 마냥 허황된 것은 아니란 말이렷다.’
혜광은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도 내심 남궁천을 경계했다.
한데 그런 혜광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궁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누군가 했더니…… 허참. 너였냐?”
“……?”
“살이 많이 쪘구나.”
남궁천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혜광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승은 소협을 처음 보오만.”
“그래, 그건 그렇겠지. 한데 여전히 분내가 묻어 있는 걸 보니 버릇은 여전하군?”
“……?”
“그러면서 멀쩡한 스님 역할도 하고 말이야. 많이 발전했어, 색광.”
“……!”
남궁천의 말이 떨어지자 혜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가 뺨을 파르르 떨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넌.”
“남궁천이다, 이 색광아.”
“……!”
혜광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떨렸다.
색광(色狂).
지금까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이는 딱 한 명밖에 없다.
대살성 진천랑!
하지만 대살성 진천랑은 죽지 않았던가?
남궁천이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심성은 착한 놈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냐?”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아, 그러고 보니 네놈이 대살성의 사생아였지.”
“그런데?”
“나에 대해서는 친부에게 들은 것이더냐?”
“그래, 이 새끼야. 우리 아버지가 꿈에서 알려주시더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본 가 상권까지 날로 먹고 있어?”
혜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어쨌거나 상관없다.
‘그 대살성의 아들이 제 발로 찾아왔단 말이지.’
갑자기 잊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색정광사로 악명을 떨치던 혜광은 무림맹으로부터 한 가지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대살성을 사로잡아 오면 무림공적 명부에서 제외해 주겠다는 것.
그때부터 대살성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진천랑을 만났을 때 혜광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터졌다.
급기야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 후로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몇 개월간 대살성을 따라다니며 온갖 수발을 다 들고, 몇 가지 독문비기도 강압을 견디지 못해 알려주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대살성이 자신을 보며 심성은 착하다고 말한 것이.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더랬지.’
다시 생각해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
한데 눈앞에 그놈의 아들이 나타났다.
혹여나 그놈과 엮일까 봐 그 아들 녀석만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젠 대살성도 죽고 없는 상황.
‘아들놈을 어찌하든 엮일 일은 없단 말이렷다.’
이것이야말로 부처가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아미타불. 시주께선 상권을 되찾고자 나를 찾은 것인가?”
“그래.”
“하나 상권을 돌려줄 수 없다면?”
“예전처럼 처맞는 거지.”
쳇, 그놈이 그런 이야기까지 아들에게 한 건가?
그럼에도 혜광은 안면 가득 피어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처맞는 게 그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
“자신 있으면 어디 해보시던가?”
“하나 소승은 불도에 뜻을 둔 몸. 어찌 함부로 시주를 해하겠는가?”
“지랄 염병을 하네. 여염집 아낙들을 후리다가 파계승이 된 주제에 불도에 뜻은 개뿔.”
“허허, 어린 시주께서는 말이 심하군. 본 회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제값을 주고 상권을 양도받았다네. 한데 이제 와서 본전 생각이 난다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다면 세상이 남궁가를 손가락질하지 않겠나?”
“그러니 백만 냥을 내고 되찾아라?”
“백만 냥이 어렵다면 이건 어떤가?”
“씨불여봐라. 색광아.”
혜광의 안면에 핏대가 살짝 섰지만 이내 웃음을 머금고 말을 이었다.
“여러 사람 피 볼 것 없이 그대와 내가 비무를 통해서 결정하는 게 어떤가? 내가 이기면 상권은 본 회가 소유하는 것이고, 자네가 이기면…….”
“이기면?”
“처음 본 회가 사들였던 값 그대로인 십만 냥만 받고 넘겨주겠네.”
“싫은데?”
“하면?”
“내가 이기면 그냥 여기서 사라져라. 모든 걸 내려두고.”
“그건 어렵…….”
“단, 내가 진다면 천만 냥을 줄게. 아무 조건 없이.”
“……!”
순간 장내의 사람들은 물론, 정문 밖에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입을 딱 벌렸다.
혜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요즘 먹고 죽을 것도 없다는 남궁가에서 천만 냥을 내놓겠다? 그걸 나보고 믿으란 소린가?”
“이걸 보면 좀 믿을 건가?”
남궁천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척 내밀었다.
혜광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것을 살피다가 화들짝 놀랐다.
“금, 금왕의 명패?”
일순 주위 사람들이 아까보다 더욱 놀란 표정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창응대원들마저도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입을 딱 벌린 채 명패와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